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
제18화. 준비
입적은 않되, 천려족을 만나겠다?
몰린의 표정이 볼만했다. 당황과 황당 사이의 어떤 감정. 그는 턱수염만 연신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이안이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려는 것이다.
천려족을 만난다는 건 곧 국경을 넘는다는 뜻. 이안 입장에선 죽는 길이 아닌가.
그의 머뭇거림에 맥과 드고르 역시 고개를 빼고서 양피지를 들여다봤다. 마찬가지로 표정이 볼만하게 변했다.
-천려족을 만나겠다는 뜻이 무엇인지 모릅니까?
-잘 압니다. 하지만 황궁에서 조사 나오면 아버지는 분명 저를 의심할 것입니다. 브라츠 영지에서 중앙 사람이라고는 몰린 경 일행뿐인데, 저택에서 가깝게 지낸 자는 저잖습니까. 혹시 심어둔 눈과 귀가 있다 한들, 제가 먼저 의심받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궁에서 친히 보름 가까이 내달려 조사관을 보냈다면 어느 정도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뜻이고, 확실한 증거라 하면 브라츠 저택에서 흘러나왔다는 의미다.
-저를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조사관이 들이닥치는 순간 어떻게 될지 몰라요. 아버지의 성격상, 칼로 베며 심문하시겠지요. 그러니 저는 국경을 넘겠습니다.
세 남자가 시선을 주고 받았다.
사실상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아비한테 죽든, 노예가 되든, 국경을 넘어가든 말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브라츠 가문의 몰락이요, 그로 인해 차지할 영지의 가치였으니까.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안이 이것을 모를 리 없다.
화친이 유지되는 상황에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데, 가문이 사라진다면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 줄 안단 말인가? 차라리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면.
이안은 그들의 생각을 꿰뚫고서 문장을 이어 적었다.
-저와 어머니를 숨겨주시겠습니까?
몰린은 덤덤하게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맥과 드고르는 난감하다는 게 여실히 보였다.
몇 대째 내려오는 브라츠 가문을 함락시키는 일이다. 한시가 급하고 위험할 터인데, 서자와 어미까지 보호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무엇보다 그들은 외지인이었다.
-브라츠 영지는 아버지의 손아귀 안에 있어요. 무리인 것을 잘 압니다. 그러니 저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일단 국경을 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데르가가 건재한 이상, 이안의 뼈는 국경밖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도망친다 한들 갈 곳이 없으니까.
하지만 브라츠가 멸문당한다면? 아니. 적어도 가주 데르가만이라도 없어진다면?
이안은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이전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
‘위험하지만 나쁜 선택은 아닐지도.’
맥이 눈썹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여기 있으면 아비에게 죽거나, 노예가 되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떠난다면…….
‘희망이 생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모두의 기억이 흐려질 때쯤.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소리 없이 이안에게 박수를 보냈다. 펜을 가져와 끄트머리에 적는 글씨체가 반쯤 누워있었다.
-진정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선택이다! 선생님. 저는 이만하면 들어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안의 도움으로 당장 증거를 확보하는 게 우선 아닙니까. 데르가 저자, 눈치가 보통이 아닙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몰린은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친이 진행되면…….
맥이 뒤이어 쓰려 하자, 드고르가 펜을 저지했다. 가볍게 도리질하며 꾸중하는 시선이다.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맥이 이안을 돌아봤다. 안색을 살피는 시선이 영 멋쩍어 보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문장을 완성했다.
-화친이 진행되면 여러모로 이득.
중앙 조사단과 데르가의 마찰로 영지가 어수선해질 거다. 그런데 그 틈에 천려족까지 기승을 부리면 곤란했다. 일단은 약속된 화친은 진행하는 게 안전하지 않겠는가? 후에 가주가 바뀌더라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이안 님. 바깥으로 자주 나가봅시다. 꽃이 만개할 때 떠날 것인데, 그 전에 아름다운 브라츠 영지를 눈에 담아두시어야지요.”
모든 것이 차질 없게, 원래 예정된 봄날 모든 것을 진행하겠노라 말하는 것이었다.
몰린은 종이에다 손끝으로 자신의 가문 인장을 그려 넣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자들이 맹세할 때 하는 행동이다. 가문의 이름을 거는 만큼 절대적인 약속. 이안의 희생 아닌 희생에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인장이 특이하군.’
이안이 별 감흥 없이 그의 손짓을 새겨보던 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후식을 들이겠습니다.”
“들어오시게.”
다행히 메리 백작 부인이 아니다. 쟁반 가득한 찻잔과 주전자를 옮기는 하인들이었다. 그들이 분주하게 방으로 들어오자, 맥은 양피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서 물었다.
“궐련을 한 대 태우고 싶은데요. 이안 님.”
“피우셔도 됩니다. 창문만 열어주세요.”
“고맙습니다. 이보게, 뚜껑 있는 재떨이를 가져다줘.”
“네.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좀 늦으시는군?”
메리 부인이 늦어진다면 담뱃잎과 함께 종이를 태울 생각이었다. 찰칵찰칵. 맥이 버릇처럼 라이터를 깔짝이며 묻자, 하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메렐로프 부인께서 이것저것 많이 보내셨더라고요.”
“자주 그리 교류하시나?”
“네? 으음. 일주일에 두어 번씩 하인들이 오갑니다.”
하인은 공손하게 금빛 재떨이를 대령했다. 창문을 열던 맥이 문득 익숙한 화분을 발견했다.
“그때 공원에서 산 화분이군요.”
“희한한 꽃이에요. 만개한 상태로 오래가더군요.”
“저택 사람들도 이게 뭔지 모른답니까?”
“네. 다들 처음 보는 식물이라 합니다. 혹여 독성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흐응. 맥이 담배 연기를 훅 내뱉으며 시선을 옮겼다. 하인들이 모두 나가자, 재떨이에 고이 접은 양피지를 구겨 넣었다. 그리고 지그시 불을 지지며 끄트머리를 태워갔다. 희미한 연기가 창밖으로 휘날리며 사라졌다.
똑똑.
이번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이 열렸다. 메리 부인이었다.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늦어서 죄송하네요. 손님들 두고 예의가 아닌데.”
“아닙니다. 부인. 메렐로프 백작 부인께서 귀한 선물을 보내셨나 봅니다.”
“그쪽이 하완 왕국과 가깝다 보니 이것저것 신기한 게 많이 들어와서요.”
“그렇습니까? 중앙에서도 보기 힘든 물건이 많겠군요.”
맥이 구경하고 싶다는 뉘앙스로 물어봤으나, 메리 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여인들 쓰는 것이라 흥미가 없으실 겁니다. 그나저나…….”
그녀는 차향을 음미하려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멈칫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죄송합니다. 부인. 궐련을 태웠어요.”
“어머. 그러셨구나.”
이안을 노려보려던 눈초리가 사르륵 풀렸다. 순간적으로 방 관리가 안 된 줄 안 것이다. 메리는 화사하게 웃으며 다시금 가십거리를 꺼내 들었다.
* * *
한 시간.
오찬을 마치고 몰린 일행이 돌아가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게다가 초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메리 부인과 함께한 자리. 덕분에 브로치 확인하는 시간이 훨씬 짧았다.
데르가는 마력통에서 보석을 꺼내며 물었다.
“공백이 좀 있군. 설명해 봐라.”
특히 부인이 들어오기 전까지.
데르가는 차려자세로 서 있는 이안을 날카롭게 훑었다. 딱히 긴장하거나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맥과 드고르 경이 대화하는 걸 듣고 있었을 뿐입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 밖을 구경했고요.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
달그락달그락.
데르가가 브로치 굴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한껏 의심하는 표정이었으나, 이안은 알고 있다. 그것이 저를 겁주고 누르기 위한 협박이라는 것을.
“확인이 끝나셨으면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가정교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친필 서신을 쓴다고 했지?”
“네. 미흡하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미 무엇을 써야 할지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브라츠 가문과 천려족의 화합을 함께 도모하자는, 필체 감별 외 하등 의미 없는 내용투성이일 것이다.
“나가 봐라.”
“아버지.”
이안의 부름에도 데르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눈썹만 까딱거리며 말하라는 허락을 보였다.
“어머니께서 편지를 받으셨을까요?”
“…쓸데없는 걸 묻는구나.”
쓸데없지 않다. 데르가에게 이안의 족쇄가 어미인 것을 의식적으로 되새기는 중이니까. 제 손에 목줄이 꽉 쥐어져 있노라 자만하게 만드는 거다. 하지만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겠지.
“죄송합니다. 그럼.”
이안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집무실을 나섰다.
몰린 경이 필요한 것은 횡령의 단서. 자세한 것은 황궁 조사관이 밝힐 일이니,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인장만 찍으면 문제없다.
‘브로치는 책상 가운데 서랍. 따로 잠금장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지.’
각도 상 이안은 데르가의 정면이었기에 서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귀한 마력석을 보관하는 장소였고, 무엇보다 데르가의 서재에는 금고로 보이는 게 딱히 없었으니. 금고가 있다 하더라도 책상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하면 책상을 뒤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
“이안 님.”
“해나?”
계단을 내려오니 해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좌우를 둘러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 누가 보고 있는가 확인하는 자세다.
“무슨 일이지?”
“혹시 베릭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베릭?”
알다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속삭였다.
“베릭이라는 자가 이안 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정문에서 농성 중이라 합니다.”
그 모습이 상상되어 피식 웃음이 났다. 어미도 못 만나는 귀한 몸이건만, 사병단에서 쫓겨난 시정잡배를 만나게 해주겠는가?
“잠깐 보고 올 테니 교사에게 말 좀 전해다오.”
“네. 이안 님.”
해나는 후다닥 별채로 뛰어갔고, 이안은 정문으로 향했다. 확실히 정원관리사들과 문지기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경비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내 손님이 찾아왔다고 하던데.”
“그것이-”
문지기는 코를 긁적거리며 설명했다.
“전 훈련생 신분인데, 아무래도 저택에 앙심을 품고 있는 듯하여 물렸습니다.”
이안을 찾아온 게 아니라, 그저 저택으로 들어가기 위해 구실로 삼았다 오판한 게로구나. 그래서 중간관리자 정도에서 보고가 마무리된 거다.
“건방지구나.”
“네?”
이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난데없는 꾸중에 그가 눈을 끔뻑였다.
“아랫것들이 감히 주인의 손님을 함부로 가려? 나를 찾아왔다 하면 당연히 위에 묻고 상황을 진행해야지 그대가 무엇인데?”
‘위’라 하면 데르가를 뜻하는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숨길 일이 아니었고, 숨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베릭을 수족으로 부린다 함은 곧 거둬들이겠다는 것이니까.
“…죄, 죄송합니다.”
이안은 눈을 흘기며 고갯짓했다.
“문을 열어라.”
“하지만…….”
“나가지 않는다.”
단호한 이안의 말에 문지기가 정문을 열었다.
끼익.
조금 떨어진 곳에 베릭이 반쯤 드러누워 있었다. 이안을 만날 때까지 여기서 먹고 잘 생각이었나 싶다.
“야!”
베릭이 금빛 머리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튀어왔다. 그 앞을 문지기의 창이 막았다. 하지만 베릭은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너! 뭐야!”
그날의 금빛 눈과 의문스러운 힘을 말하는 거겠지.
이안은 방긋 웃으며 문 앞에 섰다. 문지기들에게 이른 대로 저택 밖으로는 나가지 않은 셈이다.
“몸이 아주 근사해졌구나.”
줄줄이 그어져 있는 채찍 자국이 선명했다. 이안은 가까이 오라는 뜻으로 손짓했고, 그들은 저택과 바깥의 경계에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들 잠시 물러가.”
“하지만-”
“집사를 부를까?”
이들을 직접 관리하는 건 데르가가 아니라 집사였다. 보고가 중간에 끊어졌다는 게 알려지면 크게 혼날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이안을 찾아온 자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서자에 관해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관리하라는 명이 있었다.
“잠깐 동안만입니다.”
문지기들이 조금 떨어졌다. 작게 말하면 들리지 않지만, 문제가 생길 시 빠르게 대응 가능한 거리. 이안은 베릭의 귀를 끌어당겼다.
“너. 내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잔말 말고 그때 그게 뭔지부터-”
“나도 네가 필요하다.”
이안은 베릭의 말을 잘라먹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지금부터 나를 따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