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0
제180화. 투항
“이안 경을 호위하라!”
“이아아안! 으하핫!”
전사들의 호탕한 웃음이 이안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날아드는 화살에 기꺼이 몸을 내주었으며, 어렵지 않게 손으로 잡아채 깃대를 부숴 버렸다.
“이안 님! 조심하십시오!”
마법사들도 마찬가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변방족과 인사 나눌 새 없이 바로 등을 맞대며 이안에게 길을 터주었다. 밀고 올라오던 병사들은 속절없이 뒤로 밀리며, 발치에 밟히고,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콰앙! 콰직!
타닥타닥!
“이안 님을!”
“이안 경을!”
“이안을!”
모두가 동시에 소리치며 스스로를 이안의 방패로 자처하였다. 그의 손에 쨍한 빛이 모이며, 이내 손가락 틈 사이로 물줄기처럼 시원하게 뻗어났다.
피잉!
그런 그의 목덜미를 노리는 마리브의 화살. 네르사른이 손으로 쳐내며 이안과 함께 뛰었다.
“이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살얼음이 깨지면 도와달라 하셨지요. 봄이 오고 있건만, 황궁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심합니다.”
“그대가 바람을 막아주어 지금은 차갑지 않군.”
“아비의 이름으로-”
채앵!
네르사른이 덤벼드는 병사들의 목덜미를 베어내며 중얼거렸다. 뜀박질 탓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귓가가 붉다.
“-온 것입니다.”
“으아아악! 사람이 아니라 마물이다!”
“우리는 대사막의 전사이니라!”
“짐승 새끼들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리브 저하, 우선 뒤로 물러나십시오!”
“3황궁의 병력과 합류하셔야 합니다! 저하! 퇴각 명령을!”
채앵!
마리브의 보좌관이 한 전사와 합을 겨누었다. 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사방에서 검과 검이 맞닿으며 간헐적으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마리브는 뒷걸음질 치면서도 활시위를 놓지 않았다.
쉬이익!
채앵! 챙!
이번에 화살을 쳐낸 것은 헤일이다. 그 역시 이안과 함께 계단 아래로 뛰어내리며 날아드는 기괴한 것을 손수 쳐냈다.
촤아악!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피웅덩이가 흥건했다. 이안이 몸을 아래로 낮추며 착지하자, 그의 발치에서 마력의 흐름을 타고 핏물이 휘몰아쳤다.
“마리브!”
지이잉! 지잉!
목소리에 위엄이 가득하다. 절벽에서 울부짖는 사자의 호통처럼, 시끄러운 전장을 가볍게 누르는 힘. 이안이 디딘 발치에서 지각이 일어났다.
「만엽(萬葉)」
헤일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인지보다 바닥의 균열이 먼저였으니, 세상이 좌우로 갈라질 것처럼 흔들렸다.
쿠구구궁!
만엽(萬葉), 무성한 잎이 아득하여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영원의 나무. 이계의 마법수(魔法樹) 힘을 그대로 가져오는 주문 아니던가.
이안의 뒤편에서 고목의 가지가 아름답게 뻗어나왔다.
사아악.
가지가 기지개를 켤수록 녹음의 이파리가 돋아났고, 이안은 다시 달렸다. 그 모습은 마치 이안이 숲속을 홀로 달리고 있는 것과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움직여! 이안 님과 같이 움직여라!”
타닥타닥!
신기루와 같은 나무줄기가 살아 움직이듯 병사들을 포박했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사지를 사정없이 옭아맸다. 몇몇은 목뼈가 부러져 죽어 나갔고, 몇몇은 호흡 곤란으로 손끝을 떨구었다.
‘기속(羈束)과 달리, 이것은 광범위한 전장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마법이다. 다만 이계의 마법수를 부르는 것이라, 마력 소모가 엄청날 터인데.’
헤일은 거리낄 것 없이 달리는 이안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봤다. 믿을 만한 자들이 와서 모든 걸 마음 놓고 쏟아내는 듯 보였다. 출혈의 정도로 봤을 때, 이미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 같지만.
쉬이익! 핑!
“저하, 가까이 옵니다!”
“마리브 저하, 피하십시오!”
“저하를 모셔라! 저자를 막아!”
“젠장.”
마리브는 마지막 화살까지 쏘고서 욕설을 중얼거렸다. 거의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는 것도 아쉬운데,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다니. 그는 가까이 다가오는 줄기를 활로 쳐냈다. 활에도 의문의 원석이 박혀있는지, 마법수에 닿을 때마다 퍼엉-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
솨아아아!
타앗!
바람이 분다. 사방으로 흐트러지는 나뭇잎이 장관이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이안의 금안과 마주한 마리브는 저도 모르게 멈칫거리고 말았다.
허공에서 맞물리는 두 사람의 시선.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마리브는 어쩐지 억겁처럼 느껴졌다.
촤아아악!
이안이 손짓하자 마법수 줄기가 마리브의 몸통을 뚫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마리브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새로운 검을 빼 들어 맞섰다. 이안은 검날의 색이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대체, 그 의문의 원석을 얼마나 갖고 있는 겁니까.”
“천하고 더러운 마법사들을 모두 죽이기에는 모자름이 없지.”
천하고, 더러운.
마법사들의 태생이 대부분 그러한 것은, 자연의 섭리와 같았다. 바리엘에는 천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
“천하고 더러운 것은 마리브 네놈이다!”
“옳소! 하루아침에 황궁을 이따위로 만들었으면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있어!”
죽음의 경계에서 오간 마법사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나키나는 아예 가운뎃손가락까지 올리며 차마 이해 못 할 욕까지 바락바락 내지르고 있었다.
“이안 님! 저 말고 화살 맞은 마법사들이 꽤 됩니다! 저 새끼 족쳐서, 아니, 목을 비틀어 원석에 대해 실토하도록 해야 합니다!”
“방자한지고! 어딜 마리브 저하를!”
“주둥이 닥쳐! 여기서 마리브를 저하라 부르는 것들은 네놈들뿐이라!”
마리브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마법사들의 거친 발언에 제대로 자극받은 듯하다. 그는 검을 바로 잡으며 이안을 노려봤다.
“아랫것들의 실수는 곧 지도자의 책임이라. 그대의 목을 베는 건 이 검이 아니라 저놈들의 세 치 혀다.”
그는 바로 달려들어 이안의 마법수 환영을 시원하게 끊어쳤다. 고운 빛 가루로 변하며 사라지는 마법. 하지만 이안은 계속해서 마력을 끌어내 맞섰다. 전사들이 도와주기 위해 달려오자, 이안이 소리쳤다.
“안 된다. 마리브는 내가 감당할 자다.”
정치적으로 말이다.
안 그래도 천려족은 변방 소수민족이라 바리엘에서 천시받는데, 황자를 직접 제압했다가 어떤 부담을 떠안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현 사태에 대한 황제의 선언이 없으니, 마리브만큼은 이안의 선에서 해결을 봐야 했다.
촤악!
한쪽에서는 연신 공격만 퍼부었고, 한쪽에서는 막아내며 자리를 지킬 뿐이다.
무겁지만 정적인 합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진과 필리아, 마법부 동료들, 전사들 그리고 대피했던 황궁의 모두가 그들의 전투를 묵묵히 지켜봤다.
‘원석이 앗아가는 마력의 힘이 조금씩 줄어든다.’
그저 휘두르는 자는 모르겠으나, 몸으로 맞서고 있는 이안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청신호다. 원석에 제한이 있다면, 마법사들의 불능 상태가 일시적일 가능성이 크다.
쩌억.
그 순간, 호박색 검날에 금이 갔다.
“이안!”
쉬이익!
흥분한 마리브는 그것도 모른 채 일격을 날렸고, 마법수에 닿자마자 무자비하게 박살 났다.
산산이 조각난 날붙이가 마리브의 귓불을 찢었으며, 이안은 심하게 각혈했다. 필리아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이안!”
“부인, 부인. 괜찮아요.”
그런 필리아를 다독이는 진. 아이의 손 역시 떨리고 있었으나, 전투를 바라보는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이안 경이 웃었습니다.”
검이 박살 나는 순간, 이안은 각혈하며 미소를 지었다. 틈이라는 걸 알아챘다는 듯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힘을 끌어올렸기에, 피가 솟구친 것이다.
솨아아아!
이안이 허공으로 뛰어오르자, 더더욱 웅장하게 뻗어나는 마법수. 이내 마리브의 사지를 붙잡고 들어 올려 사정없이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아앙! 콰직!
“크헉……!”
마리브 위로 떨어진 이안.
그는 무릎으로 마리브의 명치를 제압함과 동시에 멱살을 붙잡았다. 아래에 깔린 마리브가 풀린 동공으로 이안을 올려다봤다.
“저하!”
“떼어내! 저놈을 저하에게서 떼어내!”
“누구 마음대로! 죽여라!”
“죽여!”
마리브의 부하들이 달려들자, 다시금 작은 소란이 일었다. 바닥에 누워있던 마리브는 목덜미에서 축축하고 뜨거운 게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부하들의 피였다. 흐르고 흘러, 그의 금발을 적셨다. 아래로 떨어지는 이안의 머리칼은 영롱하였으나, 마리브의 머리칼은 흙과 피로 엉망이다.
“…….”
“제가 말씀드렸죠.”
귓가를 간지럽히는 이안의 속삭임.
“저하께서는 역사에 새겨지지 못할 것이라고.”
또 그 소리군. 마리브가 벽안의 눈동자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러면 그대는?”
“…….”
“그대는 역사에 새겨질 것 같은가?”
“저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쉬익!
마리브는 손목에 감췄던 단도를 꺼내 이안의 목덜미를 노렸다. 하지만 그가 가를 수 있는 건 짙은 잎사귀들뿐이다.
거대한 고목의 무게가 점점 더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압사하여 죽으리라.
“나는, 나는 바리엘 제국의 1황자다! 다들 똑똑히 보라! 지금 나를 죽이는 게 누구인지! 이자는 게일의 처소에 침입자를 보냈고, 나를 기만하여 형제간에 전투를 유발한 자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겨우 뱉어내는 발악이다. 대피한 황궁 사람들이 술렁임이 들려왔다.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 이안이 더더욱 마리브의 숨을 조였다.
“역사가 흐르고 난 뒤, 후대가 평가할 것이라! 누가 옳았고, 그릇되었는지 말이다! 마법부는 나를 죽이고, 황궁을 차지할 속셈이라!”
“아니다!”
마리브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된 목소리. 진이었다. 이안은 그제야 놀란 듯이 뒤를 돌아봤다. 아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용기를 쥐어짜고 있었다.
“다들, 다들 똑바로 들으라! 이안 경과 마법부는 나와 아르센, 그리고 어머니를 구했다. 그리고 그대들도 구하였어! 황궁을 차지하기 위해 사달을 일으킨 게 누구인지, 흔들림 없이 생각하라. 그대들이 보고 겪은 게 진실이다.”
이어서 잠시 숨을 멈춘 다음 결단을 내렸다.
“마리브 형님. 저를 죽이려 하셨던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요.”
황자들끼리의 다툼. 마리브와 진의 경우, 다툼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폭력이었으나 관례상 다툼으로 해석될 것이라.
“나를 먼저 죽이려 하였으니, 나 역시 형님을 죽일 권한이 있습니다. 이안 경. 그대의 뜻대로 하라. 그것이 나의 뜻이니.”
이안이 마리브를 죽인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지지하는 선언이었다.
마리브는 인상을 찌푸리며 어이없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쪼그만 것들이 짜고 치는 것도 아니고.
“항복.”
마리브는 결국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중립구역에서 항복한다.”
“저하!”
“이래도 죽일 것인가?”
황제의 선언과 재판이 있기 전이니, 누구에게 죄가 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중립구역을 표방한 이안으로서, 항복한 자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단하기에는 난감할 것이라.
마리브는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죽일 것인가!?”
스으윽.
이안은 대답 대신 줄기로 그의 숨통을 더욱 세게 죄였다.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은지라, 마리브는 이안의 목소리가 늘어지게 들렸다.
“추합니다. 저하.”
“커억…….”
마리브는 바들대며 결국 정신을 잃었다. 널브러진 몸을 뒤로 하고, 이안은 마법사들에게 지시했다.
“주, 죽었습니까?!”
“마리브를 포박하여 감금하라.”
“오, 오오오! 네네! 알겠습니다!”
“병사들 역시 죽은 자와 산 자를 가려 정리하라. 마법사들은 황궁에 마리브의 투항을 알리고, 게일의 위치를 사수해. 또한, 마력을 잃은 마법사들은 혼란스럽겠지만 우선 대열을 지키며 기다려라.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안이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상황을 주도하는 때였다. 멀리서 베릭이 흑검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타닥타닥!
쿵! 쿠웅!
“이 X새끼들아! 우리 이안이 어쨌냐! 이안아! 이안아! 헉!”
정신 잃고 달려오던 베릭이 전사들을 보며 멈칫거렸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마리브. 베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좌우를 살피며 당황해했다.
“뭐, 뭐여.”
“우리 싸가지 없는 베릭! 오랜만이다!”
“아 뭔데뭔데! 다들 뭔데! 으하아앗!”
“이리 와봐라! 키가 얼마나 컸는지 보자!”
“이놈 이거, 수련을 게을리했나 본데? 물렁물렁해.”
“아니거든? 다들 여긴 어떻게 왔어? 어? 이긴 거야? 지금 이긴 것 같은데?”
베릭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반가운지 방방 뛰어대며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걸 보며 웃던 이안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이안 님!”
“이안아아앍!”
“골 울린다. 조용히 해다오.”
“이안 님, 괜찮으십니까?”
이안을 둘러싼 마법부 동료들과 전사들, 그리고 베릭. 필리아와 진까지 계단을 내려와 피를 밟았다. 이안은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웃음만 설핏 흘렸다.
하루가 너무 길다.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라.
이안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며 물었다.
“베릭, 그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