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3
제183화. 수습 회의
황제의 주치의는 조심스럽게 청진기를 들었다. 사람의 살갗이라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몸. 따뜻한 물수건으로 갈무리했으나, 얼룩덜룩 남아있는 혈흔은 황제의 상태를 더더욱 처참하게 만들었다.
스윽.
주치의가 코 아래 손을 가져다 댔다.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숨결이 새어나왔다. 두꺼운 솜이불 아래 훈기가 가득하건만, 황제의 숨결은 냉랭했다. 이안과 베올스가 멀찌감치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떠신가?
“사, 살아계신 것은 맞습니다.”
“동결을 푼다면, 치료는?”
“그것이…….”
옆구리에 난 상처가 도드라져 있었다. 젊고 건강한 자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황제는 이미 노쇠하여 겨울철 감기마저 치명적이었다.
주치의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주치의는 눈물을 글썽이며 잠든 황제를 바라봤다. 마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 황제는 치유 마법조차 받을 수 없는 상태다. 이안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상태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라, 소문이 돌면 그대가 책임져야 할 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폐하의 뜻이라면 저 또한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황제는 앞으로 공식 석상에 나설 수 없다. 혼란스러운 지금, 황제의 안위에 의문이 제기될 것을 대비하여 주치의를 들인 것이다. 그의 증언이 황궁의 불안감을 잠식시키리라.
달깍.
주치의가 나가자, 베올스는 이안 앞에 익숙한 인장을 내려놓았다. 황제가 마지막 전언 위에 찍었던 그것이다. 그리고 이안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후대의 직인이기도 했다.
“당분간은 개인 인장으로 업무를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안 경께서 수상께 전해주십시오.”
이안이 쓰던 것은 군데군데 흠집이 나 있었는데, 이것은 갓 만든 것처럼 금칠이 매끈했다. 과거, 자신이 3년간 쓰던 것이거늘, 막상 손에 잡으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 계속 쓰게 되는구나.’
황제가 공식으로 죽기 전까지, 꽤 긴 시간 동안 인장을 이용할 것이라.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다 한들, 직인을 다시 파는 것보다 어쨌거나 선황제가 쓰던 걸 이어받는 게 정통성 측면에 긍정적이니. 그게 대를 잇고 이어 후대의 이안에게 내려온 게 분명했다.
“베올스, 그대는?”
“저는 오늘 여기서 황제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겠노라. 주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대장의 자책이 물씬 묻어났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꼭.”
“…후계자 논의 날짜가 정해지면 전언하지.”
이미 밤이 내려앉은 시간.
어둠이 짙었으나 마법사들의 불빛이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시체를 태우는 빛이다. 역한 냄새 없이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의 흔적이 바리엘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핏물을 닦아내! 여기 사람 좀 더 보내주고.”
“미안하지만, 우리도 손이 모자라.”
“베릭, 좀 도와줄래? 이것 좀 같이 옮기자!”
“나키나! 호송 마법 좀 부탁해!”
마법사들은 각 부서의 대장들 아래에서 일사불란하게 수습을 이어갔다. 로만드로 역시 보고서를 이리저리 흔들며 뭔가를 소리치다가, 이안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달려왔다.
“현재 친위대 제이럿 대장, 수상, 입법부 부장관, 행정부 총감독관, 재판부 판사 대표 등이 입궁했습니다. 바로 대회의실로 가면 될 듯합니다만.”
이안이 지나가자 마법사들과 황궁 사용인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하루의 사건을 수습하는데, 아마 서너 달은 족히 걸릴 것이라. 무엇보다 부서진 건물들이 문제였다.
“황궁 출입은 계속 관리하고 있는가?”
“네네. 고위 관료들만 들이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식자재나 의료품, 부자재 따위는 문제없어서 그 이후에 납품받으면 될 듯합니다.”
“납품받을 때 고지하라. 들어오면 나갈 수 없다고. 아니면 인원을 차출해서 성문에 사람을 직접 보내 운반하라. 나키나에게 호송을 맡기면 되겠군.”
“근데 나키나가 이리저리 너무 바빠서요. 내일 돼서 다시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성문이 열리긴 했으나, 우선 관료들만 들이고 제국민의 출입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다. 황궁은 바리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중요한 곳이다. 제국민들의 기억에는 언제나 완벽하고, 고귀한 곳으로 인식되어야 했다. 핏물이 흐르고, 시체가 나뒹구는 곳이 아니라.
“단단히 하라. 여기서 살아남은 자들도, 황궁이 정리 될 때까지는 나갈 수 없으니.”
“그럼요. 일러두었습니다.”
“…비비안나에게 전서구라도 날리겠나?”
타닥타닥.
이안이 계단을 내려가며 넌지시 물었다. 임신한 채로 그를 기다릴 여인. 황궁에 들어가서 연락이 뚝 끊어졌으니 걱정하고 있을 게 당연하다. 로만드로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거절했다.
“아닙니다. 예외를 둘 수는 없지요. 새 한 마리도 황궁을 나갈 수 없습니다.”
앞서 걸어가는 이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밤중이라 그걸 본 자는 없었지만.
“게일은?”
“계속 수색 중입니다.”
게일은 궁 어딘가에 숨어버렸다. 황제의 전언이 내려왔고, 마리브가 생포되었다는 걸 알았으니 그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코렐라가 마력석 가루 지도를 토대로 게일 측의 세력을 확인하고 있으니, 늦어도 새벽이 오기 전에는 그를 잡아낼 것이라.
히이잉!
이안은 말을 타고 대회의실로 달려갔다. 마리브와 게일의 첫 분쟁이 일어났던 그곳이다. 관료들이 대충 세워둔 마차들이 어지러이 엉켜있었다.
“오오, 이안 경!”
“이안 경!”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저하께서는, 아니, 아니지, 폐하께서는요?”
정제된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리브와 게일이 한바탕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런 것일까. 관료들은 의자 대신 테이블에 걸터앉아 궐련을 빽빽이 피우고 있었다. 중대 회의였으나, 보고서 따위도 없다.
“다들 앉으십시오.”
“저, 저기, 이안 경.”
“아직 게일 저하가 안 잡혔다고 하던데.”
“체통을 지키고 앉으세요. 긴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럴수록 침착하고 정신을 바로 모아야 합니다. 그것이 폐하께서 그대들을 그 자리에 앉힌 이유 아닙니까?”
밥값을 하라는 뜻이다. 평소에는 녹봉 먹으며 편하게 지냈으면 이럴 때만큼은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게 도의 아니겠나.
이안이 딱딱하게 꾸중하며 먼저 앉자, 관료들은 헛기침하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앉지.”
그때, 누군가 앞장서서 의자를 끌어당겼다. 행정부 안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부장관, 퀸타나였다. 그녀는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올린 채 날카로운 눈매로 주위를 훑었다.
“앉으라니까.”
“크흠. 그래, 앉습니다.”
“앉아요. 앉아. 얘기가 길다 하시니.”
행정부의 수장은 황제였으나, 그 아래 재정을 담당하는 퀸타나의 권한은 장관만큼이나 독보적이었다. 재정, 즉 한 해의 예산을 비롯하여 세금까지 함께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대충 짐작하시리라 믿고, 결과 공유만 하겠습니다. 우선, 황제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이안의 말에 몇몇 관료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퀸타나 역시 마찬가지. 딱딱하고 냉철한 표정에 설핏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다만 충격이 너무 커서 쓰러지셨어요. 직접 뵐 수는 없고, 당분간 수상께서 업무를 처리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스윽.
이안은 베올스가 넘겨준 인장을 수상에게 전해줬다. 그가 그걸 내려다보며 의문스럽게 물었다.
“본 직인은요?”
“마리브 황자의 찬탈로 행방이 묘연합니다. 현재 마리브 황자는 마법부 지하 감옥에 감금 중입니다. 그 역시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하니, 재판을 서둘러 여는 것에 문제가 없겠습니다. 황궁 재판장.”
이안의 부름에 한 노인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최대한 서둘러 황자의 지위 박탈 재판을 준비하시오. 현재 반파된 건물 외 시체의 수습은 새벽이 가기 전, 마법사들이 정리할 것이라. 로만드로.”
뒤에 서 있던 로만드로가 이안의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길고 긴 이름들이 빼곡하다. 이안은 잠시 목을 축인 다음, 천천히 그걸 읽어갔다.
“사법부의 카스퍼, 레이너스, 애버킨, 입법부의 카스테스로 장관, 레너트, 미치엘, 제국방위부의 타이하 장관, 세라노, 클라인, 클레먼스…….”
마리브와 게일, 그 어느 편에 합심하여 황궁을 어지럽힌 자들의 명단이었다. 이어서 가담한 귀족들의 이름도 줄줄이 이어졌다.
타악.
“이상이 황궁의 반역자 명단이오.”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의 바리엘의 전력 절반 이상을 도려내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안은 종이를 가볍게 내려놓은 다음, 한숨을 삼켰다.
“수가 너무 많아 조사와 재판을 일일이 열 수가 없으니, 각 부서에서 담당하여 반역자를 색출하고 처단하시오. 공석은 아랫사람이 이어받아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장관직 등의 요직이라면 임시로 권한을 부여하는 바요.”
“저기, 이안 경. 아무리 그래도 수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업무에 마비가 옵니다.”
“그, 그러니까요. 당장 지금과 같은 사태가 이어질 것인데, 전부 처단하는 것은…….”
콰앙!
퀸타나였다. 그녀는 재떨이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반역자를 살리면 나라를 좀먹는 벌레를 살려두는 것과 같소. 반역자를 살리면, 그대들 역시 반역자요.”
살벌한 경고에 관료들이 입을 합 다물었다. 바깥에서는 아직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저곳에 자신의 피가 섞여 들어간다고 한들, 그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
“동의합니다. 마리브 황자는 황제 폐하께 직접 위해를 가했고, 게일 황자 역시 귀족을 끌어모아 허가되지 않은 병력을 모았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소.”
“그, 그러면 우리 부서는 어후, 사람이 없는데.”
“이안 경의 보좌관. 명단을 더 주실 수 있나?”
“예. 여기 있습니다. 넉넉하게 작성했으니 나눠 가지십시오.”
로만드로는 재빠르게 서류를 나눠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퀸타나가 궐련을 비벼끄며 손을 들었다.
“황궁의 체계는 황궁 자체에서 수습한다고 하지만, 외부는 어찌할 것인가? 귀족들이 몰락하면 당장 다음 해의 세금이 충당되지 못해.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알기로는 하이만 가 역시 이번 사태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던데.”
하이만 가. 바리엘의 금융을 책임지는 가문. 그자들이 없으면 당장 바리엘의 모든 거래가 중단될 수도 있다. 황궁 내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과 다르게, 또 다른 대혼란이 올 것이라.
하지만 이안은 단호했다.
“예외 없습니다. 목숨을 건 반역이었으니, 그 대가를 가져와야지요. 다만 사안의 중요성을 참작해 제가 직접 맡겠습니다.”
“직접?”
퀸타나의 눈썹이 의외라는 듯 휘었다. 까탈스러운 자들을 직접 대적하겠다고 하니,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이다. 관료들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안 경이면 믿고 맡길 만하지. 암암.”
“그렇지. 마법부 장관 아니신가.”
까다롭지만, 해결하면 입지 다지는 것에 그만한 굳히기가 없다. 진의 미래를 위해, 올바르고 강한 황제가 가져올 평화로운 바리엘을 위해. 이안이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러면, 보자, 재판을 준비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만 다음 후계자는 어찌하나? 황제께서 자리 보전하고 누우셨다면, 서둘러 후계 자리를 채우는 게 안정적일 터인데.”
한 관료의 질문에 다들 눈만 데구르르 굴려댔다.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진과 아르센, 아르센과 진.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이안에게 모이는 순간.
끼이익!
다급하게 대회의실 문을 열어젖히는 여인, 딜라이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