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4
제184화. 차기 황제
딜라이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대회의장을 돌아봤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달려왔는지 은색의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위해 의자를 빼주었다.
“급히 오셨나 봅니다.”
그럴 것 하나 없는데.
이안의 의도를 알아챈 것인지, 딜라이나는 이안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황제 폐하의 상태는 베올스 대장에게 전해 들었네. 그런데 대체, 무슨 저의로 나와 아들들을 갈라놓은 거지?”
힘겨운 숨결 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의문과 두려움이 한데 섞인 물음이다.
로만드로는 바깥에서 그녀를 데리고 온 마법사와 귓속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이안에게 눈짓했다. 걱정할 만한 소란은 없었다는 듯이.
“저의라니요. 억측이십니다.”
이안은 로만드로의 신호를 받고서 나지막이 대답했다. 감히 시선을 바로 하는 이안의 작태에, 딜라이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르센과 진을 보려 했으나 그대의 부하들이 막아서 길을 터주지 않았어. 이런 상황에 그런 처사라. 내가 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되겠나?”
“쌍둥이 황자 저하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혼란스러운 지금, 누군가 살기 위해 두 분을 해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요.”
싱긋, 화사한 미소였으나 담겨있는 의미는 살벌하고 잔혹하다. 마리브에게 목숨을 구걸하고자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어미가 아닌가? 그걸 제 두 눈으로 보았으니, 황자들의 안위를 맡길 수 없다는 말이다.
딜라이나는 사색이 되어 목소리를 쥐어짰다. 억울하여 분하다는 듯 눈가 역시 촉촉해졌다.
“나는, 나는 바리엘을 위해 그리한 것이라.”
“아하. 바리엘이 그리하라 시키덥니까?”
“불손하다!”
“아니면 어째서, 마리브가 어미의 목숨으로 아이를 꾀어낼 때 가만히 계셨는지 묻고 싶군요.”
이안의 품에 안겨있던 진. 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딜라이나를 죽이겠다던 마리브.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비명을 내지르던 딜라이나.
이안은 지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인의(人義) 상실의 순간에서 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안은 보지 못했다.
“아르센이 죽으면 황가의 대가 끊어진다는 신탁을 알고 있을 터인데? 아르센은 아직 어려. 내가, 뒤에서 도와줄 자가 필요하단 말이다. 어미이기 전에 나는 황가의 사람이다. 누가 나를, 나를 비난할 것인가?”
딜라이나는 한 음절씩 꾹꾹 눌러가며 분에 찬 듯 중얼거렸다.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노라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안은 그녀를 바라보다 덤덤한 시선으로 받아쳤다.
“…비난을 피할 수는 있어도, 이해를 얻기에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진 황자 역시 황가의 사람이기 전, 딜라이나 님의 아들 아닙니까.”
그때였다. 퀸타나가 딜라이나에게 다가와 무엄하게 어깨를 붙잡았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퀸타나는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궐련 냄새가 배어나오는 숨이다.
“딜라이나 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정하고 앉으십시오. 의논할 거리가 많습니다.”
퀸타나의 말에 딜라이나는 정신을 차리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이안이 빼주었던 의자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괜찮으십니까, 다친 데는 없어 보여 다행입니다.”
“마침 후계에 관한 얘기 중이었습니다만.”
“아르센 저하와 진 저하, 두 분 중 한 분을 선택해야 할 것 같은데요. 딜라이나 님의 의견을 여쭙습니다.”
관료들이 딜라이나를 바라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서열상으로도 우선이고, 먼저 태어난 아르센이 후계 자리에 오르는 게 맞다 봅니다.”
“사실 저도 그리 생각을…….”
“성정도 밝으시고, 영민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신탁이 걸립니다. ‘황좌에 가까운 자가 죽으면 황실의 대가 끊어진다’라는 말이요. 마리브와 게일 황자가 황가에서 퇴출당하면, 아르센 저하야말로 황좌에 제일 가까운 분 아닙니까?”
“맞습니다. 신탁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리브 황자도 그걸 의식하여 결국 아르센 저하를 해치지 못했다 하지 않았나요?”
다들 이안처럼 한 부서의 고위 관료다 보니, 숨겨진 신탁을 알고 있었다. 아르센을 지지하자는 의견들 속에서, 이안이 손을 들려고 하는 순간.
“저는 반대합니다.”
퀸타나였다. 그녀는 불붙지 않은 궐련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피고 싶으나 딜라이나 때문에 참는다는 듯이.
“지금 사태가 어찌 일어난 것인지 모릅니까? 자질 없는 자들이 권력을 탐해 일어난 사달입니다. 서열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건 의사가 부여해 준 순서지요. 바리엘의 미래를 맡기기에, 그것은 너무 하찮은 기준입니다.”
“그러면 진 저하를 지지한다는 뜻인가?”
“아니요. 자질이 있는 저하를 올리자는 뜻이지요. 시일을 조금 두어 검증하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께서 위중하시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황제가 동결한 걸 모르는 관료가 걱정스레 짚었으나, 퀸타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서둘러 그르치는 것보다 조금 늦되 확실한 게 맞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때는 외세의 공격도 섞여들 것이니.”
지금처럼 대제국 바리엘을 잡아먹기 적당한 시기가 또 있을까? 황제는 쓰러졌고, 황자들은 구금되었다. 거기에 귀족들은 죽어 나갔으며, 대제국의 병력은 와해하지 않았나?
“아무튼, 이안 경이 출입문을 폐쇄하여 참으로 다행입니다. 저도 입궁하고서 알았거든요.”
퀸타나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지만, 결국에는 바리엘을 지키는 일이다. 그는 퀸타나의 말을 이어받으며 선언했다.
“저 역시, 아르센 저하를 반대합니다.”
이안의 선언은 깊게 들을 가치가 있었다. 황궁 수습 주체의 중심이자, 황제의 전언을 받았고, 무엇보다 황자들을 처단하여 앞으로 권력을 응집할 자였으니까.
“이안 경도 두 황자의 자질을 검증하자는 뜻인가?”
“아니요. 저는 진 저하께서 차기 황제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회의장에 번개가 들이닥친 것 같았다. 이안의 지지 선언에 다들 웅성거리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르센도 아니고 진이라니. 제 형을 죽일 것이라, 그리하여 황가의 대를 잘라버릴 것이라 낙인찍힌, 저주받은 아이를!
“그, 이안 경? 쌍둥이 중 형이 아르센일세.”
누군가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뱉어냈다. 이안은 대답 대신 고운 미간을 찌푸림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질을 따져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여, 진 저하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이안의 시선은 퀸타나로 닿아있었다. 모두가 아르센을 외치는 이 상황에서, 목적은 다르나 결론은 같은 자들끼리 뭉칠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탁이 있지 않나?”
“신탁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네. 쌍둥이 저하의 신탁을 내려준 곳은 다름 아니라 카르보 신전일세.”
관료가 은근슬쩍 딜라이나를 바라보며 다그쳤다. 현 쌍둥이 황자의 외척이자, 개국공신의 신성한 가문. 그런 곳에서 직접 내려준 신탁이건만, 어찌 부정한단 말인가.
“그에 관해서는 제가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이라니? 어떻게?”
진이 차기 황제라는 것은 이안이 확신하는 바였다. 그가 황실 복도에서 매일같이 지나친 초상화가 눈앞에 생생했다. 성인인 진은 여전히 상처를 품고 있었고, 어린 지금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늠름하게 장성했었다.
역사는 변하지 않지만, 인간의 말로 떠도는 신탁은 변할 수 있는 노릇.
“‘황좌에 가까운’이라는 의미가 불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경들은 아시겠습니까? 일 분 차이로 새겨지는 서열? 아니면 설마, 물리적인 거리?”
관료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의대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안의 태도가 굉장히 호전적인지라, 섣불리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 그대들이 아르센 저하의 이름을 말했기에, 아르센 저하가 황좌와 가까워진 것입니다.”
다들 침묵하여 숨을 훅 들이쉬었다. 차기 황제는 신하들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자다. 신하의 선택을 받은 황자가 황좌에 가까운 것이라 말하는 것이니.
이안은 반역자 명단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황궁 정비가 얼추 마무리되는 대로 신탁에 대해 다시 알아볼 것입니다. 차기 후계자에 관해서는 시일을 두고 논하도록 합시다. 황제께서 자리보전하셨지만, 당장 위급하지는 않아요.”
죽음이 필요할 때까지, 그는 죽지 않는다.
이안의 말에 관료들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어수선하게 웅성거렸다. 혼란한 틈에서, 다시금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아르센을 지지하는 딜라이나와 진을 지지하는 이안.
“우선 후계 자리에 관한 것은 이 정도로 넘어가고, 당장 급한 수습을 의논합시다. 제국방위부의 장관이 마리브의 편에 섰다 죽었습니다. 기강을 서둘러 잡고, 남은 병력을 파악하여 질서를 잡는 게 우선이지요.”
“크흠, 아, 그럽시다. 그래요.”
“순서가 있으니까. 음음.”
“부장관이었던 모레노는 어떻습니까?”
“출장으로 수도를 나갔다 하던데요. 전체에 비하면 소수지만, 질서 있는 병사들이 여럿 있으니 서둘러 귀환하라 명합시다.”
후계자가 누가 되는지에 따라, 황궁의 권력 구도가 다시금 뒤바뀌게 될 것이다. 관료들은 회의를 하면서도 제각각 정세를 계산하고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딜라이나 역시 마찬가지.
‘이안 경, 저자는 대체 어째서?’
어째서 진을 지지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쌍둥이 중 누구라도 황제가 된다면 딜라이나는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진을 버렸다는 걸 보았으니, 그걸 빌미로 견제하기 위해 진을 밀어주는 게 아닐까?
‘진이 버려졌다는 걸 이용해, 황권에 도전하려는 것이라. 마리브와 게일이 몰락하니, 새로운 자가 덤비려는구나.’
딜라이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뜯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아르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넘실거렸다.
이안은 모른 척 회의를 이어갔지만, 그런 딜라이나의 행동을 모두 시선에 담았다.
“…그럼, 잠시 회의를 마칩니다.”
몇 시간 정도 지났을까. 바깥에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관료들은 시큰거리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정부 쪽에서 지시사항을 전달해 주면, 바로 인력을 보내주시오. 납품받는 것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재판 준비는 사법부의 주도 아래, 각 부서의 정보를 모두 공유하도록 합니다.”
“각자 건물을 정비하고 오후쯤 다시 모이지.”
“예. 그럽시다. 필요 자재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타닥타닥!
관료들은 각 부처로 돌아가며 오후 회의를 기약했다. 이안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코를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피가 흐를 것처럼 코가 아렸다.
“괜찮으십니까? 마력 계속 썼는데, 잠도 못 주무셔서 그렇습니다. 우선 점심까지 눈 좀 붙이세요.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로만드로가 걱정스레 이안을 부축하여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런 그들을 막아서는 딜라이나. 이안이 피곤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르센과 진을 돌려주시게.”
“누가 들으면 제가 몹쓸 짓이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정신 차리고 한 번을 보질 못했어!”
이안은 딜라이나를 지나쳐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허락했다.
“좋습니다. 대신 아르센 저하의 곁에 있는 부하를 물리지는 않을 것이고, 진 저하는 저하가 허락하실 때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진이 나를 거부한다 말하는 것인가?”
“그리 말하지는 않았는데.”
이안은 말꼬리를 흐리며 마차 문을 닫았다. 그러곤 피곤하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히이잉!
타닥타닥!
로만드로는 마차 뒤쪽 창문으로 멀어지는 딜라이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계속 우리를 노려보는데.”
“제가 거슬릴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그, 그래도 딜라이나 님이 무얼 할 수 있겠나? 응? 안, 안 그래? 지금 황궁에서 이안만큼 중요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로만드로는 괜히 무서운지, 연신 뒤쪽을 힐끔거리며 식은땀을 닦아댔다. 이안은 눈에 손등을 얹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글쎄요.”
“글, 글쎄요라니?”
“제가 딜라이나 님이라면, 상황을 타개할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는데… 그리 해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뜻 모를 이안의 말에 로만드로가 눈만 끔뻑였다. 딜라이나가 타개할 방법이 있는 것도 놀랍지만, 꼭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이안?”
“진 저하가 계신 곳으로 갑시다.”
“나도 좀 알려주시게.”
“…저 잡니다.”
“끄응.”
잔다는 말 한마디에 로만드로가 입을 꾹 다물며 머리를 긁적였다. 곧이어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마부에게 일렀다.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
“예?”
천천히, 이안이 조금 더 잘 수 있게.
마부는 고삐를 천천히 풀며 마차 속도를 늦췄다. 흔들리는 마차의 움직임을 따라, 이안의 고개 역시 가볍게 까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