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6
제186화. 잠꼬대를 조심하라
드넓은 잔디밭 위를 달리고 있는 두 사람.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단발의 은색 머리칼. 이안은 어렵지 않게 그가 로버사이드임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안 경!”
진? 이안은 무릎을 꿇으며 자신에게 안긴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생기가 돋는 얼굴이다. 저 멀리 달려오는 로버사이드가 무엇인가를 외쳐댔으나, 잘 들리지는 않았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즐겁지. 즐거워.”
“무엇이 그리 좋으십니까?”
진은 활짝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이안은 아이의 볼에 보조개가 파어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황제의 증거라 여겼던 얼굴의 상처 역시 없다.
쿠구궁!
그때, 천지가 갈라지며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평화로웠던 들판에는 마물들이 나타났으며, 세상을 덮을 것처럼 어둠이 들이닥쳤다. 가까이 다가온 로버사이드가 새된 소리를 질러대며 경고했다.
“죽여라!”
아이는 단검으로 이안의 심장을 찔렀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당황해서일까? 바로 뒤까지 바짝 붙은 로버사이드가 검으로 아이의 등을 베어내며 고함쳤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라! 죽여!”
촤아아악!
등이 베인 아이는 이안에게 안겨 죽어갔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자지러지는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안이 당황스럽게 아이를 내려다보자, 그는 이안의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쥐어 귀를 가져왔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는, 너 아니던가?”
* * *
“이안 님?”
이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거칠게 들이쉬며 일어났다. 거센 심장 고동에 온몸이 울릴 지경이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마법부 직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안 님.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
“심하게 앓으셔서 놀랐습니다.”
“어제 무리하셨으니, 몸살 나는 건 당연하지만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가?”
“예? 아니요. 그저 신음만 흘리셨는걸요.”
이안은 축축해진 머리칼을 넘기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꿈자리가 영 심상치 않은지라, 혹여 허튼 잠꼬대라도 했으면 난감할 뻔했다.
“무슨 일이지?”
“아,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더 주무세요.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마법부 부하들이 걱정 어린 투로 뒷걸음질 쳤으나, 이안은 옷매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직실 안은 마지막 그의 기억과 달라진 게 없다. 로만드로와 시아오시, 진. 모두가 사경을 헤맬 정도로 단잠에 빠져있었으니. 입에 종이를 문 베릭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베릭이 저러는 연유를 아는 자 있나?”
“모르겠습니다. 바나나 뭐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종이 물고 다시 자던데요.”
“…조용히 나가지.”
이안은 부하들을 다독이며 밖으로 나섰다. 이미 해가 중천에 걸려있었다. 몇 시간이지만, 그래도 누워서 좀 잤다고 몸이 개운하다. 이안은 원탁에 걸터앉아 부하들의 보고서를 순차적으로 받았다.
“천려족, 그러니까 이안 님의 아버, 아버지께서 전사들과 합심하여 재건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종족이랍니까? 잠도 안 자고 아주 쌩쌩하던데요.”
브라츠를 재건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황궁을 누비는 전사들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방으로 퍼지며 잔해 아래 깔린 사람을 구하고, 부서진 돌벽을 치웠으며, 흐트러진 사체 조각을 모았다.
이안은 웃으며 당부했다.
“소중히 하여 존중하라. 순수하게 우리를 돕는 자들이다. 어머니는?”
“그, 어머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사들이랑 같이 움직이시는 것 같더라고요, 전사 중 말이 안 통하는 자들이 있어서, 통역 겸 뭐 그리하시는 듯합니다.”
어쩐지 안 보인다 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것이 필리아 나름대로 이안을 돕는 법임을 알고 있었다.
“아코렐라 대장이 호박색 원석 관련한 중간보고를 오후 중으로 올리겠다 하셨는데요. 그 전에 미리 대략적인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우선, 호박빛 원석을 ‘이드갈’이라 명명했습니다.”
“연유는?”
이드갈이라. 마치 사람의 이름 같지 않나.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되물었다.
“원석이 인공적이라서요. 반으로 가르니 기하학적인 모양의 태가 보이는데, 이는 연금술사의 흔적입니다.”
이안은 보고서를 살짝 내리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러고 보니, 워낙 정신없이 움직인 터라 연금술사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 언질 주는 걸 잊었다.
“…생각보다 실력이 좋군.”
고작 하룻밤 사이, 아니지. 정확히 시간으로 따지면 열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사이. 아코렐라 대장은 원석에서 연금술사의 흔적을 알아낸 것이다. 부하는 코를 훌쩍이며 뿌듯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다들 성격 참아주는 것이지요. 아, 제가 이런 말 했다는 건 비밀입니다. 이안 님.”
“계속해 보시게나.”
“잘 아시겠지마는, 마법사든 주술사든 연금술사든 초자연적인 힘에는 언제나 흔적이 남습니다. 특히 제조와 관련된 자들은 그게 또렷한데, 기하학적인 태를 분석하니 바리엘 공용어로 ‘이드갈’이라 읽을 수 있더군요.”
“그게 연금술사의 이름일 가능성이 있나?”
“상당합니다. 연금술사 본인도 자신만의 고유한 기하학무늬를 알고 있을 것이고, 의미를 부여해 별칭으로 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했다.
“나중에 반지를 하나 주마. 그것도 잘라보거라.”
“반지요?”
변경에서 중앙으로 올라올 때, 리엔 부인이 마약과 함께 답례로 넘겨줬던 것. 부인의 보석도 이드갈이라 하면, 문제의 연금술사가 속해있는 상단을 더욱 좁게 추격할 수 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있지.”
“네. 그렇습니다. 다행히, 나키나를 포함해서 몇몇 마법사들의 마력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주 미약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듣던 중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수가 적은 마법부이거늘, 이런 상황에서 인재를 잃으면 곤란했다. 이안이 몇 년 만에 들어온 신입이었으니까, 다음 마법사를 만나기까지 또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른다.
부하들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저기, 이안 님. 이드갈과 마력봉인석은 확연한 차이가 있지만, 아무래도 성능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저희도 느꼈습니다. 마법이라는 것이 언제고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을요.”
이안은 보고서를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보라는 뜻이었다.
“우리 마법사들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안전을 위해, 마력봉인석과 이드갈 둘 중 하나는 없애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력봉인석은 자연에서 나는 것이니, 아무래도 연금술사를 추적하여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의 힘에 닿았다 여겼으나, 마리브 화살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박살 났다. 오만하였고,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이런 일을 겪고도 살아났으니까.
“자연을 죽이느니, 연금술사 한 명을 죽이는 게 쉽습니다.”
이안은 툭툭, 보고서 끄트머리를 매만지며 잠시 침묵했다. 이들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도 동의하는 바다. 마력봉인석의 존재는 신의 뜻이지만, 이드갈의 존재는 연금술사의 뜻이라.”
견제와 위협은 전혀 다른 선상의 말이었다. 이안은 걱정하지 말라는 의도로 보고서를 넘겨줬다.
“고작 한 명의 뜻에 마법사들이 위험해지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마리브를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라. 상황이 얼추 수습되면 연금술사를 추격하여 대처하겠다.”
아마 원 시대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들도 이안과 같은 결정을 내렸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안의 시대까지 이드갈이 전해지지 않았던 걸까?
마법사들은 이안의 수장의 말이 만족스러운지,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다음.”
“게일 저하가 2황궁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되었다?”
이안은 순간 멈칫거렸다. 말의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보고했다.
“자해하신 상태로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마리브가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사이, 게일은 자결하여 상황을 끝내고자 했다. 언제나처럼 두 사람의 결정이 다르다. 누가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안은 턱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은 아직이고?”
“네. 하지만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 셋이 차출되어 의사와 함께 갔습니다. 조만간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안은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알아채고 몸을 돌렸다. 타 부서의 하급 관료들과 신원이 불분명한 자들이 보고서를 산더미처럼 들고 오는 중이었다.
“알겠다. 게일 황자가 누워있는 곳을 철저히 감시하고, 혹여 또 자결하려 한다면 결박하여 가두어라.”
“네. 알겠습니다.”
“죽더라도 재판장에서 죽어야 할 것이라.”
그리해야 훗날의 진에게 부담이 없다. 황후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고 견제 세력에서 그의 적통을 지적당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아예 황가의 역사에서 마리브와 게일을 없애 버리는 게 낫지 않겠나.
타닥타닥!
“저기, 이안 님. 성문 중앙 입구에 하이만 공작이 당도했습니다.”
입구를 폐쇄하고 관리하던 마법사가 달려와 이안을 불렀다. 뜻밖의 이름에 다들 멈칫거리며 이안을 돌아봤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싶다 하시는데요.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대회의에 참석하여 공작님이 오해를 풀고 싶다 하십니다.”
“오해라.”
이안의 비릿한 웃음에 마법사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참으로 담대하고 뻔뻔하지 않나. 게일을 방패 삼아 황궁을 전복하려 했던 세력이, 이리 직접 제 발로 걸어들어와 변명하겠다고 하다니.
“이안 님, 어떻게 할까요?”
“마음 같아서는 죽이고 싶네요.”
“안 돼. 나 거기에 돈 맡겨놨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안은 펜대를 까딱까딱 돌리며 잠시 고민했다.
안쪽으로 들이면 분명 황제가 쓰러졌음을 알게 될 터. 그럼 하이만 공작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예측할 수 없다.
“멜라니아 영애도 함께입니다.”
“…출입을 허가하되, 바로 구금하여 모셔라. 다른 자들과 접촉하지 않게 하고, 나만 대면하겠다.”
‘구금’과 ‘모시다’가 공존할 수 있는 단어였나? 하지만 마법사들은 알겠노라 답하며 뒤로 뛰어갔다.
이안은 남은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보며 일 처리를 이어갔다. 아무래도 하이만 공작을 만나는 건 급한 것을 다 끝낸 후, 마지막에 할 예정인 듯싶다.
‘일종의 기 싸움.’
고귀하신 공작께서 언질 없이 몇 시간 동안 기다리는 그 행위 자체가 이안에게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음 보고서.”
“네. 여기 있습니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하이만 가도 그러하지만, 그를 상대로 저리 덤덤하게 처리하는 이안도 보통이 아니다. 마법사들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계속해서 보고서만 넘겨댔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게일 저하의 저주요.”
마법사의 말에도 이안은 서명 휘갈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사악사악, 펜촉 긁히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저주가 풀린 게 사실입니까?”
“그건 어째서 묻지?”
이안이 저주를 풀었다고 선언했으나, 마법사들은 믿지 않았다. 종일 같이 있었는데 그가 한 것이라고는 계속해서 마력을 때려 부으며 사람들을 구하고, 마리브를 제압한 것이었으니까.
“그, 음, 게일 저하께서 의식이 없는 와중에 무어라 계속 중얼거린다 하십니다. 아무래도 저주와 관련된 게 아닐까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