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7
제187화. 웨슬리의 저주
게일이 치료를 받는 별궁의 작은 방. 문틈으로 희미하고 따뜻한 빛이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닥에는 피로 젖은 옷과 수건들이 구분 없이 널브러져 있었고, 마법사 세 명을 중심으로 시종들이 따뜻한 물을 길어왔다.
“이쪽을 더 닦아라.”
“네. 마법사님.”
“피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지혈점에 마력을 더 세게 넣어봐. 조금만, 조금만 더.”
“여기서 더 넣으면 호흡에 문제가 생겨.”
“하필이면 목을 그으셔서…….”
“좋아, 좋아. 그렇게만 하면 돼.”
마법사들의 콧잔등으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해라 하면 보통 손목을 긋는 경우가 많거늘, 게일은 목덜미와 쇄골이 만나는 지점을 찔러버렸다.
“피를 더 만들어. 더더.”
“이봐, 가서 아코렐라 대장한테 혈강 약물을 받아와. 종류 따지지 말고 있는 거 다 달라고 하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세 마법사가 출혈을 담당하며 안쪽에서 새살을 만들어내는 동안, 의사는 갈린 부분을 꼼꼼하게 봉합하며 진정제를 투여했다.
지이잉. 지잉.
마력의 열기인지, 의료진의 열기인지 모를 것 때문에 방안이 후덥지근했다. 마법사들은 게일의 상태가 안정되자, 피 묻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한숨 돌렸다. 살려두었으니, 저들이 할 일은 다한 것이라.
“이만하면 되었다.”
“저하께서 정신을 차리시거나, 혹은 이상 행동을 보일 시 바로 우리에게 알려라. 옆방에서 쉬고 있을 터이니. 의사 선생. 그대도 그만하지.”
마법사들의 명령에 시종들은 허리를 숙이며 알겠노라 답했다. 마법의 위대함을 익히 듣긴 했지만, 이 정도 수준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목덜미가 찢긴 자를 살리는 것도 모자라 안정화시키다니. 마법의 최고봉이 치유 마법이라는 게, 영 과장은 아닌 듯싶다.
끼이익.
“다들 수고했다.”
“이안 님.”
그때, 이안이 방으로 들어섰다. 피비린내와 소독약 냄새가 지독하다. 게일은 목뿐만 아니라 허리와 팔, 정강이 등지에도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직 정신은 없으시고.”
“네. 그래도 워낙 본 체력이 좋으시어, 마법을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회복이 빠르실 것이라 여겨집니다.”
“잠꼬대를 하셨다고 하는데.”
“아, 그게.”
마법사들은 난감하게 피식 웃으며 게일을 힐끔거렸다. 죄인 신분이긴 하지만 아직 황자 아니던가. 경망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보고했다.
“멜라니아 영애 이름을 부르며 무어라 하시던데요. 목 부근을 다쳐서 제대로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대충 뭐, 배신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주가 어쩌고저쩌고, 말도 하시고요.”
이안은 의자를 하나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그러곤 시계를 확인하며 마법사들에게 지시했다.
“쉬게. 나는 여기서 두어 시간 뒤에 나갈 것이니.”
하이만 공작이 황궁으로 들어와 구금 아닌 구금을 당한 지 벌써 세 시간 째. 이안은 하이만 공작의 인내심이 바닥 치고, 체념으로 반등하기 전 순간을 노리고 싶었다.
남은 두어 시간 도중, 게일이 정신을 차려 멜라니아 영애에 대한 정보까지 흘려주면 금상첨화라.
“하암.”
“로만드로 님, 보고서.”
눈이 퉁퉁 부어서 쫓아온 로만드로가 처리할 보고서를 정리해서 넘겼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다시 조용히 울리는 침실.
짜악!
“…….”
“하, 하핫.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끔 로만드로가 잠을 쫓기 위해 제 볼을 내려치는 것 외에는 적막하여 평화로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안은 게일의 손끝이 움찔거리는 걸 알아챘다.
“게일 황자.”
“…아.”
게일은 낯선 쇳소리를 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목덜미가 답답하여 손으로 긁어내려 했으나, 붕대 실밥만 일어날 뿐이다. 이안은 펜으로 그것을 가볍게 저지하며 말했다.
“제시간에 깨어나서 다행입니다. 나눌 말이 많지만, 서로의 사정을 고려하여 짧게 하지요. 우선, 황자의 마지막은 침상이 아니라 재판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결하여 명예로운 죽음 따위 찾을 생각일랑 말라는 뜻이다. 게일은 인상을 찌푸리며 빛바랜 벽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하이만 공작과 멜라니아 영애가 입궁하여 대기 중인데, 황자께서 전하실 말이 있다면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안의 말에 게일이 피식 웃었다. 하이만 가가 지원해 주기로 한 마력갑옷 누락이 승패의 당락을 확실히 나누었다. 그로 인해 지금 그가 이리 누워있는 것 아닌가.
“…그대는 전할 말이 있길 바라지.”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잇는 목소리가 위태롭다. 하지만 이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론입니다. 전하실 말이 없다면, 제가 알아서 전할 것입니다.”
제삼의 세력이 황궁을 장악한 지금, 하이만 가가 두 황자, 특히 게일과의 연관성을 부정할 건 모두가 짐작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안은 게일의 증언이라는 이름으로 공격권을 만들어낼 수밖에.
“혹 하이만 가의 결탁 자료를 넘겨준다면, 마리브 황자보다 영예로운 죽음을 약속합니다.”
이안의 제안에 게일이 낮게 웃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 중 제일 최선의 상황이라는 게 고작, 그런 죽음이라니.
“그리고 하나 더.”
“…무엇인가.”
“황제 폐하의 처소에 있는 나무를 지키겠습니다.”
황제가 게일의 생모 꿈을 꾸고 나면 멍하니 바라보았던 복숭아나무. 생전 자신의 어미가 유독 아끼고 아껴, 유해가 묻혀있는 복숭아나무. 게일은 팔로 눈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탁 자료는 그대가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
“누구 덕택에 처리할 일이 많아서요.”
“…원래 그런 눈이었나?”
게일은 문득 이안의 눈빛을 보고 의아하게 되물었다. 언제나 예사롭지 않기는 했으나, 뭐랄까. 지금의 이안은 좀 더…….
“그대가 황궁의 주인인 것 같군.”
“사족을 붙이기엔 황자의 목 상태가 안 좋습니다.”
입 닥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는 뜻이다. 게일은 키득키득 웃으며 모든 걸 내려놓았다.
“하이만 가와 직접 서신을 나눈 건 없다. 그쪽이나 나나, 알 만한 사람들 아닌가. 마력석 갑옷을 비롯하여 마리브를 저지하는 데 조력해 주면 멜라니아를 황후로 추대하기로 하였어. 그뿐만 아니라, 하이만 가의 세금 혜택과 그자의 처조카들에게 요직을, 핏줄이 이어져 있는 왕국에는 무역 혜택을.”
“아주 꼼꼼하게 나눠 먹으려고 하셨군요.”
이안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멜라니아가 가질 황후 자리 외,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하이만에게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마지막에 게일을 도와주지 않았을까?
“하이만 가의 지원이 부족하였던 것 같은데요.”
“그대가 성문을 폐쇄하지 않았나.”
“거사를 치르기 전, 입궁하여 준비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예상한 것의 절반 정도만 받으셨다고.”
게일은 이안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마치 연유를 알긴 하다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멜라니아 영애는 저하를 연모하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연모? 나를? 그대는 여인을 만나본 적이 없나?”
“…….”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 그렇다. 하지만 그때 봤을 때의 모습이 연인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아주 죽고 못 사는 듯하지 않았나?
“멜라니아는 나를 연모하지 않는다.”
게일은 확신을 가진 채 중얼거렸다.
“웨슬리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웨슬리의 이름이 어찌 여기서 나온답니까.”
“그녀의 저주, 뭔지 궁금해했지?”
그리고 이내, 궐련을 찾는 듯 테이블을 휘적거렸다. 목에 상처가 났다는 자각이 아예 없는 듯하다. 이안은 궐련만 넘겨주고, 불은 로만드로에게 치워 버렸다.
“내가 한번 말하지 않았나? 개인적인 저주라고.”
“그렇습니다. 실담물약으로 증명하셨죠.”
“나는 앞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게일 그대는 오만하여 나를 짓밟았으니, 영원히 나처럼 사랑받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애초에 알고는 있었어. 멜라니아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황자의 지위라는 걸. 그래서 대비를 한다고 했는데. 이리되었군.”
게일은 잇새로 궐련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렇다면, 저자도 하이만 가의 변심을 확실히 정의할 수 없다는 뜻이로다. 이안은 자리를 털며 의자에서 일어섰고, 이내 궐련을 빼앗았다.
“치료 잘하고 계십시오. 사실, 저하가 일어난 것만으로도 제게는 호재거든요.”
하이만 가를 직접 누르고 견제하며, 압박할 수 있는 수가 생긴 것이다. 사실상 게일의 증언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까.
“마리브는?”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재판장에서.
이안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고, 게일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깨어난 걸 알았으니 이제 죽지 못하게 24시간 밀착 감시에 들어갈 것이라. 끝내고 싶어도 쉬이 끝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달깍.
이안은 복도로 나오자마자 경비에게 단단히 일렀다.
“인력을 증원하여 틈 없이 지켜라. 가능하다면 황궁친위대에도 연락해.”
“친위대 말씀이십니까?”
경비대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게일의 자해만 막으면 되는 것인데, 어찌 친위대까지 부른단 말인가. 안 그래도 황궁 재건에 사람이 부족하거늘.
“명령에 이유가 필요한가?”
“아, 송구하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이안은 구구절절 말하는 것 대신 꾸중으로 대답을 이끌어 냈다. 로만드로는 그의 뒤를 따르다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되물었다.
“하이만 가 때문이지?”
“그렇습니다. 황자가 무사히 일어났으니, 하이만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리된 거, 어차피 죽을 황자. 재판에 오르기 전 죽여서 하이만과의 결탁을 표면적으로 끊어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외부의 공격으로 황자들이 죽는다면 겨우 가라앉은 혼란이 다시금 부풀어 오를 수 있다.
“하이만 공작이 대기하는 곳으로 가지.”
“네. 알겠습니다.”
히이이잉!
이안은 목적지를 알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일곱 시간 하고 사십 분.
공작이 입궁하여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었다. 고고하시어, 바리엘의 중추라 불리는 공작이 감내하기에는 꽤 긴 대기였을 것이라.
“하이만 공작을 본 적이 있습니까? 로만드로 님?”
“신년회에서 한번 보지 않았던가? 아닌가?”
“그때 영식을 보긴 했던 것 같은데요.”
하이만 공작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이안이 황제였을 때 봤던 하이만 공작이 11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의 가주는 어떤 자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핏줄 못 속인다고, 어지간하면 비슷한 자겠지만.’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공작이 구금된 건물로 달려갔다. 저 멀리, 입구를 지키는 성문의 병사들이 보였다.
“궁 밖의 분위기는 어떠합니까?”
“조금씩 근본 모를 소문이 도는 것 같기는 하네. 황궁에 들어간 자들이 나오질 않으니,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지 않나. 조만간 입장 발표를 하긴 해야 할 것이야.”
오래 끌 수 없는 일이다. 이안은 사흘, 딱 사흘 안에 일 처리를 대강이나마 끝내놓겠다고 다짐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하이만 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끼이이익.
“하이만 공작님이 안에 있는가?”
“네. 이안 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언하라.”
이안은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좌우로 벌어지는 응접실의 문.
이안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는 하이만 공작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