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8
제188화. 등가교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입니다. 가우디노 하이만 공작님 맞으십니까?”
이안의 부름에 하이만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마주하고 나니, 이안은 신년회에서 그를 본 적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한 번 봤다면 절대 못 잊을 외모였으니까.
“이안 히엘로 장관이시군. 가우디노 하이만 공작일세.”
기묘한 미중년이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칼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이마, 각진 눈썹, 날카로운 콧대가 범상치 않았으나, 그보다 더 범상치 않은 것은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위압적인 분위기는 하이만 가의 이름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의 시선에서 오는 듯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이안은 악수를 먼저 청하지 않았다. 작위로 본다면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분이긴 하다만, 현 상황에서 하이만은 황궁에 위해를 가한 자들이고 이안은 그걸 수습한 책임자였다. 그걸 자각한 하이만이 예의를 차리며 살포시 웃었다.
“히엘로 장관의 노고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 이쪽은 내 막내 딸아이 멜라니아. 처음 보겠군. 잘 부탁하네.”
하이만은 이미 멜라니아와 이안이 만난 적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리 초면인 것처럼 소개하는 것은, 멜라니아와 이안 사이의 연결고리인 게일을 가볍게 부정하는 처사였다.
본디 사교계에서 안면이 있다 하더라도, 공식적인 만남에서는 처음 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정숙의 표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멜라니아 영애는 녹색 빛 드레스를 가볍게 잡으며 인사했다. 살며시 마주친 눈매가 웃고 있다. 능글맞게 아비의 장단에 맞추는 태도가 여간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영애께서는 처음 보시는 거겠지만, 사실 저는 뵌 적이 있습니다. 게일 저하의 처소에 보고서 올리러 갔다가 먼발치에서요.”
이안은 멜라니아의 손등에 입술을 누르며 웃었다. 체통은 지켜주되, 게일과의 연결고리를 단번에 짚는 말이었다. 하이만 부녀는 이안의 대응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난색을 보였다.
“히엘로 경. 실은 그것으로 인해 급히 황궁을 찾았네. 마리브 저하와 게일 저하께서 아주 불미스러운 일을 벌이셨다고. 하여, 내 입장도 난처해졌어. 황제 폐하께 직접 변을 고하고 싶은데, 그대의 마법사들이 길을 터주지 않는구려.”
황제를 직접 만나게 해달라는 청이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하이만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흰자가 안 보이는지라, 그가 어디를 바라보는 중인지 바로 알아챌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아직 딜라이나와 접촉하지 못했다면, 황제가 동결한 것은 모를 것이라. 황궁 밖으로 나간 자가 없으니, 마리브가 황제를 찔렀다는 것도 모를 것이라.
지금 이안이 하는 대답이 곧 그에게는 정보이며, 문을 나서는 순간 행동 지침이 된다.
“모반 죄인이 황제 폐하를 알현한 역사는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안의 대답에 하이만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제의 신변에 대한 정보는 넘겨주지 않으면서 황궁 내 소란의 죄명이 확정되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러니 변하실 것이 있다면 제게 하십시오.”
현 황궁의 책임자가 자신이라는 걸 은근히 드러내는 말이었다. 하이만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물었다.
“마리브와 게일 저하, 두 분 모두 무사하신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게일이 살아있다면 하이만 가의 항변이 타당성을 잃게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정보를 하나도 내놓지 않는 이안 탓에, 하이만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이내 조심스레 운을 띄었다.
“…오해일세. 멜라니아가 게일 저하와 잠시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마력석 갑옷을 지원해 준 건 제국군의 병력 연구에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어. 이리 쓰일 줄은 전혀 예상도 못 했다네.”
제국방위부가 마리브의 편에 섰다는 것으로 받아칠 수 있었지만, 지금 그걸 말하면 하이만에게 황궁 병력 부재를 알리는 것과 같다. 가끔은 반박보다 침묵이 상대의 폐부를 깊이 찌를 수 있는데,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하여 곧, 수상함을 감지하여 절반을 회수함으로 대처했네. 이것을 황제 폐하께 직접 알리고 싶네만.”
“말씀드렸다시피, 불가합니다.”
“폐하의 뜻인가?”
황제의 명령이 있었냐는 물음이다. 그 누구도, 황제가 직접 명하지 않은 것을 명했노라 말할 수는 없었다. 변경에 있을 때, 이안이 작위임명장을 가져온 치엘로니아를 그것으로 쳐내지 않았던가.
“황가의 뜻입니다.”
이안은 모호하지만 확실한 대답으로 회피했다. 하이만은 가죽 장갑 낀 손으로 제 딸아이의 손등을 덮었다. 멜라니아는 담담한 시선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깊이 통감하네. 이번 사태에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일정 부분 관여했음을 인정하지. 최선의 보상금으로 보답하고, 하이만의 명예를 지킬 길이 있다면 힘을 다하여 따를 것이라.”
배상금이 아니라 보상금이라? 배상금은 법적인 처벌이 관련된 경우고, 보상금은 그 외로 도의적인 책임을 질 때 내는 것인데.
‘단어 사용이 교묘하여 날카롭구나.’
감히 반역에 가담하고서도 목숨을 부지할 것이라 여기는 건방진 태도. 하이만의 위상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이기에 이리 나오는 게다.
여식을 황후 자리에 밀어 넣으려 했던 수작질로 보아, 황권에도 개입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역시, 아르센과 함께 견제해 두는 게 좋겠어.’
이안은 보란 듯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공작님께선 제국의 안위를 돈으로 살 수 있다 여기시나 봅니다. 제아무리 그득한 금고라 한들, 수백 년의 바리엘 권위 앞에서는 한낱 돌덩이인데요.”
“바리엘의 권위가 바로 그 돌덩이 위에 세워졌네.”
“송구하지만, 조만간 하이만 가와 게일 저하의 연관성에 대해 조사가 들어갈 것입니다. ‘보상금’이 아니라, 조사 결과에 합당한 ‘배상금’을 내시면 되겠습니다.”
배상금에는 언제나 다른 처벌이 뒤따른다. 작게는 작위 해제나 권한 축소, 크게는 수감 및 처형까지. 이안의 말에 하이만 공작이 손을 까딱거렸다. 부하가 가까이 다가와 그에게 담배 파이프를 건네주었다.
“…딜라이나 님과 쌍둥이 황자 저하들은 무사하신가?”
나지막한 물음이 담배 연기와 함께 뱉어졌다. 정세를 가늠하려는 공작의 까만 눈동자가 재빠르게 이안을 훑고 지나갔다.
“무사하십니다.”
“폐하를 알현할 수 없다면 딜라이나 님이라도 뵙고 싶은데.”
“불허합니다.”
“불허한다라?”
이안의 말에 하이만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흘러간 단서를 알아챈 것처럼. 불허한다는 것은 딜라이나의 뜻이 아니라, 온전히 이안의 뜻이라는 걸 의미하지 않나.
“어째서?”
“황궁 내 질서 유지의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이안 경. 지금 외부인이 본다면 마리브 저하와 게일 저하가 소란을 피운 게 아니라, 그대가 전복하여 장악한 것이라 오해하겠네.”
“어험! 크흠!”
하이만의 말에 뒤에서 듣고 있던 로만드로가 불쾌하다는 듯 헛기침을 터트렸다. 하이만의 호위기사들 역시 기류를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팽배해진 분위기 속에서, 하이만은 느긋하게 다시 청했다.
“딜라이나 님께 고하시게. 하이만 가의 공작이 알현을 청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오해가 사실이었노라 치부한다는 태도였다.
“좋습니다. 대신 멜라니아 영애를 제외하고 공작님만 허락하며, 황궁의 경비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공작님은 게일 저하와 결탁하였다는 혐의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머지 지시 사항을 전했다. 들어온 건 마음대로였으나, 나가는 건 그렇지 않으니까. 설령 황제라 하더라도 궁이 수습될 때까지는 아무도, 바깥과 접촉할 수 없다.
“성문 앞에서 공작님을 기다리는 일행이 있습니까?”
“그렇네.”
정확히, 하루가 지나도록 어떤 언질이 없다면 구하러 오라는 명령을 받은 채 대기하는 기사단이었다. 범의 아가리로 기어들어 오면서 허리춤에는 안전장치를 단단히 해둔 셈이다.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며 재차 말을 이었다.
“사흘 안에 일차적인 수습을 완료할 것입니다. 그전에는 누구도 출궁할 수 없으니, 문지기에게 이 사안을 대신 전언하도록 하지요. 그럼.”
끼이익.
이안은 그리 말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고, 이내 완연한 적막이다. 멜라니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지요, 아버지? 게일 저하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마리브 저하도 참 어지간하시네요. 황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동안, 그거 하나 못 죽여서.”
“걱정할 것 없다. 딜라이나가 답이다.”
“딜라이나 님이요?”
하이만은 이안과의 대화를 천천히 복기하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아라. 마리브와 게일이 반역으로 제명당한다면, 다음 후계는 쌍둥이 황자다. 차기 황제라 이를 정도로 유력할 것이라.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리지.”
“딜라이나 님이 대리로 나서겠지요.”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황궁의 실세는 딜라이나다. 하나 이안의 작태로 보아, 정세가 그쪽으로 쏠려있는 게 분명해. 당장은 수습이니 뭐니 딜라이나가 뒤로 물러서 있겠지만, 이런 기세가 계속된다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무엇보다, 이안이 하이만을 대하는 태도가 적대적이다. 분명 황궁의 나사 빠진 몇몇 관료들은 하이만이라는 가치를 계속 끌고 가고자 원할 터인데.
‘마리브, 게일을 제압한 자를 견제할 수 있는 건 하이만이 제격이니. 그쪽으로 밀어붙이며 틈을 노리는 게 좋겠다.’
아르센과 진이 갈라졌다는 걸 몰랐으나, 하이만은 얼추 상황적 추론을 성공적으로 끌어냈다. 딜라이나와 만나면 모든 게 더욱 확실해질 터.
“하아. 그나저나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마리브와 게일 저하 둘 다 이리되다니. 투자 실패입니다.”
멜라니아는 피곤하다는 뉘앙스로 차를 홀짝였다.
“마리브 저하가 러더포드 상단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진작 알았으면 좀 달라졌을까요?”
러더포드, 연금술사들로 이뤄져 있는 의문의 상단. 마리브가 호박색 원석을 보급받았던 곳이었으며, 하이만과 오랜 거래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은밀한 단체라, 설마 황자와도 연이 닿아 있는 줄은 몰랐다.
“아니. 딸아, 과정은 달라졌겠지만, 결과는 그대로일 것이다. 역사의 선택은 절대적이니까.”
너무 늦게 알았다. 게일과 결탁하고 나서, 러더포드의 가공 원석 흐름을 인지했다. 추적하고 보니 마리브와 닿아 있었고, 이내 하이만은 마리브가 마력봉인석에 준하는 걸 손에 넣어 준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일이 이기면 이기는 대로 좋았고, 마리브가 이기면 러더포드라는 매개체로 그쪽에 붙으면 되었다. 그래서 마력석 갑옷도 반만 보냈던 것이거늘.’
줄타기했으나 끊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게일을 배반한 행위는 다시 그들에게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겠지만.
“나가서 딜라이나와의 독대 일정을 알아 오라.”
“네. 공작님.”
타악.
멜라니아는 러더포드라는 이름과 함께, 변방에서 보았던 그 아이를 다시금 떠올렸다. 희미해진 기억에 이안 히엘로의 얼굴이 덧칠되었다. 비슷하다고 여겨진 이후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 *
한편, 밖으로 나온 이안 일행. 로만드로는 마차 문을 열어주며 걱정스레 되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하이만 가와 딜라이나를 만나게 하는 것이 영 걱정스러운 듯했다.
“상황이 이러한데 정녕 만나게 해도 될는지 모르겠네. 각자 처리해도 까탈스러운 자들 아닌가.”
“한배를 탄다는 것은 의지와 약점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덩치가 커진다고 해서 두려울 것 없습니다. 크면 클수록, 어디로 던지든 공격에 맞을 것이니. 견제를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걸 가진 자를 붙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은.”
“그리고 아까 대화, 상당히 수확이 좋았습니다.”
“음? 수확이 좋았나? 그래?”
로만드로는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은 백지상태로 들어온 외부인이었다. 이안은 정보를 쥐고 있는 쪽이고.
어떤 대화를 나누든, 그 불균형으로 인해 이득인 쪽은 하이만이라 여기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쪽에서 직접 알려주던데요?”
“이상하다. 나 자리 비운 적 없는데.”
“외부에서 본다면 제가 전복하여 장악한 것이라 여길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무릇 말이란 생각의 표현. 저자들이 정세를 반전시킬 방도로 그걸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로만드로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말도 안 되지만, 말이 된다! 사정을 모르는 바깥 제국민들이 날조된 소문을 들으면 타격이 있을 게 분명하다. 특히나 진의 후계자 계승에.
“웃으세요. 로만드로 님. 상황이 나쁘지 않습니다.”
이안은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싱긋 웃었다. 그에 따라 로만드로도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달그닥달그닥,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마법부 쪽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