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9
제189화. 먼저 내딛다
이안의 마차가 마법부에 도착하자,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하나둘 달려 나왔다. 보고하고 결재할 게 산더미인지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이다. 그들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안의 뒤를 따르며 저마다 한마디씩 던져댔다.
타닥타닥!
“한 시각 후, 수상께서 대회의를 여신다고 합니다.”
“알겠다. 각 부서는 로만드로에게 자료를 넘겨라.”
“이안 님. 현재 황궁의 시체 처리 모두 완료했습니다. 신원 파악이 된 자들은 각 부서에 명단을 배부했으며, 불가한 자들은 소멸시켰습니다. 부서에서 돌아오는 답변과 성문 개방 후 들어오는 신고로 다시 조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사령술사들이 온전한 시체 몇 구만 인도해 달라 하던데요.”
이안은 걸으며 보고서를 건네받았다. 대충 흘겨보는 것 같지만, 중요한 내용은 모두 정확히 읽어냈다. 이안이 펜으로 결재하며 다시 돌려주었다.
“불허한다.”
“네. 아무래도 그렇죠.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리고 현재 게일 저하의 처소에서 마력봉인석 5개를 회수했습니다. 크기는 각각 10그램과 50그램짜리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공식으로 등록된 마력봉인석보다 적은 수입니다. 마리브 저하와의 전투, 그러니까 리아마 대장을 죽이면서 일부 소실된 것으로 예상됩니다.”
“마리브 황자도 작지만 지니고 있을 것인데.”
“현재 처소 및 집무실을 수색 중입니다만, 소식이 없습니다. 마리브 저하가 깨어나시면 심문을 허락해 주십시오. 여기, 결재서입니다.”
“좋다. 또한 행정부에 기록을 확인해 달라 요청하라. 웨슬리의 부임 중에 마력봉인석 관리에 관하여 권한 조정이 있었을 터이니.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웨슬리가 마력봉인석 대부분을 게일에게 넘겨주었으니, 흐름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이안은 허락한다는 뜻으로 서명을 그렸고, 집무실에 당도할 때까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달깍.
인기척이 들리자,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베릭과 시아오시, 진이 동시에 이안을 돌아봤다. 세 사람은 도화지를 둘러싸고, 무엇인가를 그리는 중이었다. 애석하게도 여전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안 주무셨습니까?”
이안은 그리 말하며 시아오시를 쳐다봤다. 아르센과 함께 있으라 명하였거늘 여기 있는 이유는 분명해 보였다. 그가 없는 틈을 타, 딜라이나가 아르센을 데리고 간 것이라.
“그, 잠이 깨었네.”
배시시, 진이 볼우물을 만들며 웃었다. 그러자 베릭은 뒤에서 손가락으로 뿔 모양을 세운 채 온갖 험악한 인상을 써댔다. 딜라이나가 부린 소란이 꽤 거셌던 것 같다. 아이는 다시 묵묵히 색연필을 끼적였다. 더더욱 형체가 뭉그러지고 있었다.
“바로 나가십니까?”
시아오시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잠깐 생각하더니, 로브를 바꿔 입으며 진을 불렀다.
“저하.”
“응?”
“잠이 오지 않으시면,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밖으로?”
“저는 대회의에 참석할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함께 하시고, 아니라면 밤 산책을 하십시오. 베릭과 시아오시가 함께 있을 것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제 이틀째이긴 하나, 온종일 실내에만 있으면 수면이 흐트러지고, 이내 밤낮의 흐름이 깨집니다.”
진은 눈을 끔뻑였다. 밤 산책을 권유하긴 했으나, 이안이 원하는 바를 알아챘다는 듯이. 대회의에 가자, 이안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거기엔 어머니가 있지 않나?”
진도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마리브와 게일이 후계 구도에서 멀어지게 되면, 다음은 아르센과 자신일 것이라고. 하여, 이안의 태도로 보아 언젠가는 아르센과 정면으로 맞설 수도 있겠노라고.
하지만 이리 빠르게 정계로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요. 안 계십니다.”
딜라이나는 하이만 공작을 만나느라 정신없을 것이니까. 무엇보다 지금 열리는 대회의는 황궁의 직접적인 수습을 의논하는 자리인지라, 딜라이나가 관여할 부분이 많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력을 모으고, 하이만과 뜻을 합치는 게 효율적일 것이리라.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황궁의 관료들이 어찌 의논하고, 의결하며, 정사를 다루는지 말입니다.”
꾸준히 황실 교육을 받긴 했다만, 대부분 예법과 지식 혹은 문화에 관한 것이었고 정치적인 부분은 의도적으로 배제당했다.
쌍둥이가 아직 어린 탓도 있었지만, 마리브와 게일이 위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는 탓이 컸다. 그들에게 나랏일은 금단의 열매처럼 그저 바라만 볼 수 있는 존재였으니.
“재미있으실 겁니다.”
이안이 방긋 웃자, 진이 벌떡 일어났다. 보기 드물게 생기가 도는 눈동자다. 반짝반짝, 아이는 작은 두 손을 꼭 쥐며 소리쳤다.
“구, 궁금하오!”
“외출복으로 갈아입으시지요. 밖에 누구 없는가.”
이안의 부름에 시종이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진은 후다닥 그를 따라나섰고, 시아오시 역시 당연하게 뒤를 함께했다. 베릭만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빈둥댈 뿐이다. 형체 모를 그림을 전등에 비추어 보며.
“이안아, 이것 봐라? 황자님이 나 그려줬다?”
“베릭, 너도 나갈 채비 하라.”
“에엥? 나도?”
“주인들이 다 나가는데 어찌 혼자 호사를 누리려고.”
이안의 웃음기 섞인 명령에 베릭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황궁 사달이 터지고 나서는 제대로 먹질 못했다. 물자가 제한된 곳에서 나가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지만.
똑똑.
“이안, 진 저하께서 이 밤에 어딜 가시는가?”
그때, 로만드로가 열린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냈다. 품에는 밖에서 받은 보고서 따위가 한가득 안겨있었다.
“대회의에 함께 가실 것입니다. 채비해 주십시오.”
“오, 그거 좋군. 관료들이 저하가 안전하다는 걸 직접 보면 더욱 안심할 것이라.”
하이만 측은 날조된 소문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딜라이나는 아들을 만나지 못했다. 이런 둘의 만남은 이안이 강압적으로 황궁을 장악했노라는 말에 힘을 실어줄 터. 그걸 차단하기 위해 조금씩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진 저하께서는 언제고 장성하시어 직접 정사를 이끄실 것입니다. 미리 감을 익혀두시는 게 좋지요. 이런 상황이 흔치는 않으니, 분명 도움 되실 겁니다.”
본격적인 황자 교육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황제인 아비는 동결되어 누워있고, 어미는 형만 감싸니 이런 걸 알려줄 자가 또 있겠는가?
어찌 보면 진에게는 기회였다. 그의 옆에서 하나씩 짚어줄 자가 황제였으니까. 황제가 일러주는 황제의 길만큼 확실한 게 또 어디 있겠나.
‘…나는 배반당하여 목까지 베였으니, 가서는 안 될 최악의 길 또한 알고 있다. 진에게 일러줄 것이 많아.’
이안의 경험이 진의 지혜가 되기를.
그는 서류를 갈무리하며 싱긋 웃었다.
* * *
대회의장 건물로 달리는 마차.
진은 베릭과 함께 창문에 이마를 바짝 붙이고는 황궁의 밤을 구경했다. 언제나 규칙적인 생활을 한 터라, 이리 늦은 밤 바깥에 나온 적이 처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반파된 황궁은 어둠 속에서 그럴듯하게 보였다.
‘신기하다. 이 시간은 내 생각보다 어둡지 않구나.’
“저하.”
이안의 부름에 진이 고개를 돌렸다. 은발이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들어가기 전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로만드로가 헛기침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분위기로 보아 그리 유쾌한 전언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진은 자세를 반듯하게 하며 시선을 단단히 붙잡았다. 지금까지 이안이 했던 말 중에, 해가 되는 것은 없었으니까. 무엇이 되었든.
“딜라이나 님은 현재 황궁에서 아르센과 진 저하의 유일한 보호자입니다.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이안 경도 있지 않소.”
진의 대답에 이안이 살짝 웃었다. 마음 깊이 보호자였으나, 외부인이 보기에는 전혀 그러지 않을 것이라. 힘없는 황자를 내세워 황궁의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는, 노골적인 공격에 무방비했다.
“오늘처럼 딜라이나 님이 진 저하를 뵙고자 한다면, 언제고 저는 물러설 수밖에 없습니다.”
순간, 창가에 그림자가 졌다. 달이 구름 뒤로 숨은 것이었으나 이안은 진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어쨌거나, 딜라이나 님은 진 저하의 어머니시니까요. 조만간 수습을 마무리하고 황궁을 개방할 것인데, 그때 되면 진 저하를 보호할 명분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대체 어찌…….”
“한 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 저하께도 부담되는 일이라 이렇게 미리 의견을 여쭙습니다.”
진은 어렵지 않게 이틀 전 한낮을 떠올렸다.
처소에서 마주한 마리브. 시원한 바람. 데구르르 구르는 누군가의 머리통. 속삭이는 아르센. 자신의 손을 놓는 어머니.
“어머니가 마리브 형님께 나를 넘겼다는 걸 말하시오?”
이안이 고개를 짧게 주억거렸다.
역사에 기록될 반역죄인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진을 넘겼다. 아르센을 살리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진 역시 고귀한 황제의 핏줄. 보호자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으니, 이게 곧 딜라이나에게서 진을 떼어낼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었다.
“허락만 하신다면.”
진이 허락만 한다면, 그것을 밝혀 딜라이나에게서 벗어나게 하겠노라는 의미였다.
아이가 입을 다물자, 마차에는 말굽 구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안은 대답을 기다리되, 재촉하지 않았다. 황제가 될 자였으니까. 선택 하나하나가 스스로 설 필요가 있다.
“이안 경.”
“예. 저하.”
“나는 살고 싶소.”
한참 만에 내놓은 아이의 대답은 간결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매만지며, 창문 너머로 그날 또한 매만졌다.
“그런데 어머니와 지금 함께 있으면 나는 죽을 것 같아. 그것이 숨이든, 영혼이든.”
완전히 저버릴 수는 없었다. 어머니이지 않은가.
무수히 많은 자가 이름만으로 세상의 모든 존경을 바친다는, 그 이름 어머니.
“그래서 이만하면 스스로 버틸 수 있겠다 싶을 때, 어머니를 뵈려 하네. 그때 되면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지 않아도, 내가 어머니를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또한, 아르센의 속삭임이 심장을 옭아매지 않을 때.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만한 일은 인내할 수 있다. 모두가 버려진 황자라 수군거린다 해도 버틸 수 있다.
“멋진 의지이십니다.”
“이안 경이 도와주시오.”
끼이익.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이안은 먼저 내려 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행동으로 대신하는 대답이었다. 언제나 이리 손을 잡아줄 것이라고.
타앗!
바닥에 가볍게 발 디딘 진이 콩콩 뛰는 심장을 겨우 달래며 대회의장 건물을 올려다봤다. 고위 관료들의 마차가 줄지어 서 있고, 각 부서의 중간 관리자들 역시 모여서 어지러이 정보를 나누고 있었다.
“저하, 오늘 밤을 기억하십시오.”
이안의 손을 잡은 진이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사람들은 이안을 먼저 알아보고, 이내 그 옆에 있는 진을 알아봤다. 좌우로 갈라지는 인파가 고개를 숙이며 진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늘은 저하가 처음으로 대회의에 참석하신 날입니다.”
그러곤 웃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여기는 아르센도 오지 못한 곳이라. 황제의 자리에 한 걸음 더 앞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