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9
제19화. 정보원
“당장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걸 잘 안다.”
그간 받았던 급료는 피해 보상금이라는 이름으로 몰수되었을 게 빤했다. 말 그대로 맨몸 신세인 베릭이었다.
이전에 빌어먹던 주점에서 죽을 얻어먹었지만, 몇 날 며칠이고 이리 살 수는 없었다. 베릭이 눈썹을 찌푸리며 이안을 노려봤다.
“시발, 너 약 썼어?”
“그 정도였나 보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너만 만났다 하면 몸 상태가 그랬어. 뭔지 모르겠지만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난 그딴 식으로는 안 싸우니까.”
핏줄로 투지가 끓어오르는 기분. 주먹을 꽂아 넣을 때는 쾌감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지 않은가. 두 번의 경험에서 공통점이라고는 저 금발 머리 자식뿐이었으니.
“흐음.”
이안은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아쉽다는 태도였다.
“자세는 좋다만, 생각보다 아둔하구나.”
“뭐?”
느닷없는 말에 베릭이 황당해서 멈칫거렸다. 이안은 팔짱을 끼며 문에 기대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라는 듯 제 관자놀이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처음 만났을 때 부어준 물은 내 것이 아니라 훈련생 중 한 명의 것이었다. 또한 육포는 그쪽이 거절하지 않았던가?”
그 외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베릭의 얼굴이 점점 혼란스럽게 변했다. 사실 반쯤 확신하고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궁금한 걸 알려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약속해야 한다.”
사아악.
이안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베릭에게 마력을 흘려보내지는 않았다. 여기서 망아지처럼 날뛰면 일이 어그러질 수 있으니까.
“먼저, 금안에 대해 함구할 것.”
“아니, 그래! 이거!”
베릭이 펄쩍 뛰며 소리치자 뒤에 서 있던 경비들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이안은 뒤돌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불손하게 굴지 말 것.”
이안은 담담하게 베릭을 쳐다보며 경고했다. 마검사라는 힘이 필요해서 봐준 부분이 많았으나, 베릭은 그 정도가 과했다. 성격상 데르가 앞에서도 똑같이 행동할 것 같다만.
‘그래서 마검사가 귀한가?’
제명을 재촉하다 못해 죽여주십사 목을 들이미는 성질머리. 아직 아물지 않은 채찍 상처가 그 증거였다. 베릭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것뿐?”
“마지막으로. 온갖 위험에서 나를 호위해 주길 바란다. 그리하면 그날의 힘을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주지. 혹여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나는 그저 네 안에 숨어있는 힘을 끄집어낸 것뿐이다.”
외부 힘에 의존하는 걸 질색하는 듯 보였으니, 못 박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베릭은 놀란 눈치로 눈을 끔뻑였다.
“내 힘이라고?”
“제안은 여기까지. 하겠다고 하면-”
“할게!”
“목소리를 제발 낮춰.”
더 생각할 것도 없다며 소리치는 베릭의 작태에, 경비병들이 의심스러운 낯을 띄기 시작했다. 서로 수군덕거리며 뭔가를 의논해댔다.
“나와 함께한다는 것은 국경을 넘는 것도 포함이다. 다시 돌아올 때도 네가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돌아와? 여기로?”
화친으로 팔려나간 제물이 어찌하여 다시 브라츠로 돌아올 수 있나? 아무리 베릭이라도 그것이 불가능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답은 명쾌했다.
“국경 넘는 게 뭐 대수라고. 어차피 집도 가족도 없는데 어딘들.”
“죽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라.”
“여기 있으면 굶어 죽어.”
그래. 곧 죽어도 존대는 안 하는구나. 이안이 어이없이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몇 번이고 상소리를 들었는데, 이만하면 발전했다 싶었으니.
“그러니까 이제 시원하게 말해봐.”
베릭의 눈이 뜨겁게 일렁였다. 강함을 추구하는 단순한 눈빛이었다. 이안은 잠시 쉬운 말을 고르다 물었다.
“마검사라고 들어는 보았나?”
“아니.”
“그렇다면 마력은?”
“그것도.”
“…….”
서로가 서로를 기이하게 쳐다보며 침묵했다.
이안이 황제로 있던 시대에도 무교육자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100여 년 전의 시골 변경. 고아로 길바닥을 전전하던 베릭이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이안 님.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교대할 시간인지라.”
둘이 대화를 멈추자, 경비병들이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이안은 턱을 매만지며 베릭에게 당부했다.
“곧 부를 터이니 기다리고 있어.”
“어? 저기? 잠깐만.”
“얌전히 말이야.”
마지막 말은 거의 부탁하다시피 덧붙였다. 경비병들이 거대한 문을 천천히 밀어 닫으려 하자, 베릭이 따라붙듯 뛰어들었다. 긴 창에 가로막혀 무산되었지만.
‘분명 기다리라고 했는데.’
어찌 명령과 동시에 어기고 마는가. 안 그래도 할 것이 많은데, 신경 써야 할 게 하나 더 늘고 말았다.
이안은 혀를 끌끌 차며 별채 쪽으로 움직였다. 시간이 어중간해서 그런지, 복도에는 하인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다들 청소 후 쉬러 간 모양이다.
똑똑.
“이안입니다.”
이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분명 교사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코트와 가방 그리고 반쯤 식어 있는 찻잔으로 보아 돌아간 것은 아닐지언데.
“…어딜 간 거지? 선생님?”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지만, 인기척이 아예 없었다. 이안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누웠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교사의 가방을 주시했다.
‘데르가가 나를 감시하기 위해 붙인 자다. 분명 쓸만한 정보가 있을지도.’
이안은 그의 가방을 뒤적거리며 종이뭉치를 확인했다. 대부분은 수업을 위한 참고자료였다.
나머지는 라는 논문이었는데, 중간에는 작년에 발간된 학술지도 끼어있었다. 놀랍게도 발행처가 바리엘 대학이다.
‘대학을 나왔다고는 하더니만, 그게 바리엘이었군.’
수재 중의 수재가 어찌하여 브라츠 변경에 있는 것인지는 짐작 가능했다. ‘대사막’이 천려족의 주둔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라스터해’는 사막의 끄트머리, 동방과 맞닿은 바다다.
스윽.
가방의 밑바닥까지 털어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이안은 자료를 잘 정리해 넣은 다음 낡은 코트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 쓰레기가 들어있는 것 외에는 깔끔했다.
“음?”
소매 안쪽 깊은 곳. 의상실 라벨이 붙어져 있다. 옷을 디자인하고 만든 자의 이름이었는데, 옆에 찍힌 인장이 어딘가 익숙했다.
‘…몰린 경이 썼던 인장과 비슷한 것 같은데.’
손끝으로 하나씩 선을 따라가며 그려봤다. 기억 속 몰린의 손짓과 많이 유사했다.
그 순간 다시 눈에 들어오는 ‘바리엘 대학’의 학술지. 바리엘 대학은 국가 운영 기관이었기에, 정부 쪽 사람과 연 닿을 기회가 많지 않은가? 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몰린 경의 눈과 귀가 가정교사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얼추 알 만했다. 천려족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의 정보는 하인들이 알 수 없지 않나. 이안은 코트를 정리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파에 앉았다.
‘교사는 알고 있을까? 내가 몰린 경과 손잡았다는 걸?’
단순한 정보원이라면 거기까지는 알릴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 이상이라면 뒤에서 이중으로 이안을 감시하고 있는 터.
그때였다.
끼익.
“이안 님?”
허겁지겁 들어오던 교사가 이안을 발견하고 흠칫거렸다. 살짝 배인 땀과 상기된 얼굴. 아무래도 굉장히 아슬아슬한 일을 하고 온 모양인데.
이런 경우는 보통 밀회이거나 염탐이거나 혹은 도둑질. 맨몸인 것으로 보아 염탐일 가능성이 컸다.
“볼일이 있어 좀 늦었습니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화, 화장실을요.”
“화장실이라면 방에도 있는데요.”
“그것이, 음…….”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안은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책상에 앉았다.
“오늘 서신을 써야 합니다. 아버지께 들으셨죠?”
“네. 그렇지요. 내용은 전달받았고, 이미 써 왔습니다. 이안 님은 따라 쓰시기만 하면 됩니다.”
안도의 한숨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안이 별로 관심 두지 않아 다행이라는 태도다.
어쩌면 저리도 서툴까. 정보원을 교사로 심어두었다기보다, 교사가 알고 보니 먼 방계였다는 가설이 차라리 더 그럴듯해 보였다.
“선생님. 오늘 늦을 것 같은데 댁에 연락을 넣어두라 할까요? 시간이 애매하여 저녁이라도 하고 가시죠.”
이안은 그를 떠보기 위해 물었다. 그러자 교사는 땀을 훔쳐내며 곤란한 티를 냈다.
“괜찮습니다. 딱히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식사는 집에 가서 하겠습니다.”
독신. 나이는 서른 후반인데 홀몸으로 타지에서 고생하는 가난한 귀족이라. 연구에 미쳐 여기까지 달려온 인생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황궁에 있었을 때, 아주 가끔 저런 자들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곤 했지.
‘수업에 의욕 없던 것도 이해가 된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제 연구를 해야 하니까.
이안은 글자를 베껴 쓰면서도 교사를 면밀히 주시했다. 확실히 켕기는 게 있는지, 그 역시 분위기가 묘하게 날 서 있었다.
사각사각.
양피지 긁히는 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방 안. 이안은 가만히 생각했다.
‘눈치가 몰린의 지시로 뭔가를 하려 한 듯싶거늘. 데르가의 집무실에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촉박했을 것이다.’
이안의 방은 별채 3층이었고, 데르가의 집무실은 본채 꼭대기였다. 제자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거길 다녀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분명 별채 어딘가에서 볼일을 봤다는 뜻.
1층은 간이 주방과 하인들이 쓰는 욕실 그리고 창고 따위가 있었고 2층은 집사와 아랫것들의 숙소가 있었다. 3층 이상으로는 다 손님방이요, 빈방이다.
“집사…….”
집사의 방에 들린 건가? 이안은 일부러 말을 흘린 채 교사를 돌아봤다. 그는 소리 없이 대답하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얼굴이 시커멓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집사가 오늘은 간식을 들이지 않는군요. 출출하지 않으십니까?”
“괘, 괜찮습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나머지 서신을 써 내려갔다. 몰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가능성을 여러 개 열어두는 게 안전했다.
이안이 실패라도 한다면, 그것도 데르가에게 들켜서 엎어진다면 뒷감당을 어찌하겠는가? 아마 교사에게도 모종의 지시가 떨어졌을 터.
‘집사한테 볼일이 있나 본데.’
마스터키? 하지만 가주 중 집사에게 인장 접근권을 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차라리 금전 출납권을 맡기는 거라면 또 몰라. 데르가 성정 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이안은 능숙하게 필사하며 교사를 쳐다봤다. 일단은 몰린과 손잡은 걸 모르는 눈치다. 저리 안절부절못하며 땀을 흘려대니.
그렇다면 이안도 딱히 밝힐 이유가 없다. 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에 교사는 안심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