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94
제194화. 믿음
끼이익.
이안이 별탑 심문실을 열었을 때, 마리브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내리쬐는 단 하나의 빛줄기. 마법사들이 서류 더미를 옮기는 동안에도 그는 꼼짝없이 바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지 않았던 미래가 왔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저하, 앉으십시오. 심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목덜미가 찢긴 게일과 달리, 그는 큰 상처 하나 없이 온전했다. 흙먼지가 간간이 묻어있다만, 황궁을 혼란으로 몰아간 주범치곤 고상한 모습이다. 그의 보좌관을 비롯한 주축 세력 대부분은 사지가 너덜거린 채 죽었으니까.
“그대가 직접?”
마리브가 뒤를 돌아봤다. 웃는 듯 낙망한 눈빛이 담담했다. 이안은 그걸 어디서 봤나 싶었고, 이내 침대에 누워있던 게일의 눈빛이 저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서로 못 죽여 안달이지만 핏줄 하나만큼은 확실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예우를 차릴 것이니 협조해 주십시오.”
“심문이라, 쓸데없는 걸 공들이는 편이로다. 나 같으면 이런 귀찮은 짓 절대 안 하지.”
승기는 이미 꺾였다. 아비인 황제를 찔렀고, 직인을 강탈하였으며, 형제를 죽이려 했다. 황가의 성까지 박탈당한다고 하니, 그 끝은 참수이리라. 재판 없이도 그 결과를 가늠할 수 있거늘, 어찌 심문 따위의 시간 낭비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안은 무심히 서류만 넘길 뿐이다.
“저하라면 그러시겠지만, 저는 아닙니다.”
재판을 위한 모든 절차는 적확하고 정확하게 진행될 예정이다. 그것만이 두 황자가 어지럽힌 황궁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이며, 다음 황제인 진의 정당성과 중앙집권의 기틀을 세우는 일이다.
“먼저 황제 폐하 시해 시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몇 달 전부터 폐하께서 수면 중 호흡곤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아. 잠자리를 불편해하시긴 했지. 죽은 사람까지 보고.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타악.
이안은 게일이 넘겨주었던 자료를 내놓았다. 웨슬리 저주를 눈감아주고, 실담물약을 무력화해 주어 대가로 받았던 그것.
읽어보라는 눈짓에 마리브가 천천히 종이를 넘겼다. 헛웃음 실실 흘리는 것으로 보아, 뭔가 깨달은 것 같다.
“게일이랑 붙어먹은 연유가 이거였군.”
어째서 자신과 게일 사이에서 노선을 확실히 정하지 않았는지 알았다. 모든 상황적 중심이 이안의 손아귀에 있었음을, 마리브는 부정할 수 없었다.
“변방의 천출 서자에게 이따위로, 하하. 하.”
“변론할 거리가 있다면 하십시오.”
그리 말하는 이안은 여유로운 손길로 다른 자료 종이를 훑었다. 변론을 반박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재판에 그대로 올라갈 증거물이니, 하실 수 있는 만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마리브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이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황자로 태어나 황제로 죽을 것이라, 매 순간 다짐하였고 그리 믿어왔다.
끝인가? 이것이 정녕 끝인가? 마리브는 제 앞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중얼거렸다. 승기는 꺾였으나, 아직 제 목은 꺾이지 않았다.
“다 이안 경 자네가 시킨 것 아닌가.”
멈칫. 구석에서 심문을 기록하던 마법사가 움찔거렸다. 참관하던 자들도 마찬가지다. 느닷없는 마리브의 발언에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요?”
“그래. 이안 경 자네가 종용하였지.”
“저하, 그때 저는 히엘로 령에 있었습니다.”
“그대는 마법사라, 방도가 있었다.”
이안은 마리브의 의도를 알아채고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심문 과정에서 얼토당토않은 증언을 내세워 재판 과정을 길게 끌려는 수작이었고, 혹여 황궁에 이안과 대적하는 반대 세력이 있다면 꼬투리를 잡을 수 있게끔 자리를 터준 것이라.
서기가 펜을 내려놓자 마리브가 일갈했다.
“역사에 쓰일 기록을 어디 입맛 따라 재단하는가. 토씨 하나도 빼놓지 마라.”
그랬다간 재판에서 패악을 부리겠노라, 하찮은 협박이었다.
이안은 가벼운 손짓으로 기록을 계속하라 명했다. 어차피 앞뒤 안 맞는 것들은 소명할 가치 없이 쳐내면 그만이라.
“차라리 지금 이 사달 난 게 다행입니다. 저하께서 황좌에 오르셨다면, 그때는 황궁이 아니라 바리엘이 망가졌을 것 같거든요.”
자질이 없는 것을 넘어서서 추하기 짝이 없다고, 이안은 그리 말했다.
마리브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지만, 그는 연신 웃기만 했다. 기회를 위한 수모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살 수만 있다면, 신께 자신이 처한 위기를 알릴 수만 있다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에게 검을 휘두른 것은 삼대장인 베올스가 목격하였고, 증언하였습니다. 이에는 심문할 거리가 없습니다. 강탈한 직인이 아직 행방불명인데, 어찌하셨습니까?”
“마법부와 내통하여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나를 이리 살려준 것 아닌가?”
콰앙!
“이안 님.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듣다 못한 마법사가 거칠게 항의하며 소리쳤다. 마리브가 씨익 웃었고, 이안은 자중하라는 뜻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보잘것없는 수작에 그리 화낼 것 없다는 듯이.
“러더포드를 아시지요?”
“아아, 상단?”
“그곳과 어찌 거래를 트게 되었습니까?”
“언제였더라? 좀 되었는데, 그랜드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하완 왕국을 넘어선 적이 있다. 그때 러더포드를 만났지. 이안 그대도 함께이지 않았나? 브라츠 령이었을 때니까, 이만했겠군.”
그랜드 투어(Grand Tour), 특권계급층의 자제가 떠나는 여행이었다. 인접한 국가를 돌며 문화와 경제, 사회 따위를 익히고 식견을 넓히는 몇 달간의 짧은 여행. 수십에 달하는 마차를 끌고 다니는 터라, 여행이라기보다는 행렬에 가까운 것이지만 말이다.
마리브는 손날로 어린아이의 키를 능청스럽게 가늠했다.
“흐음. 아닌가? 이만했나?”
“연기가 일품이십니다.”
마리브는 진실로 그랜드 투어를 떠난 적이 있으나, 심문실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저런 것도 황자랍시고 지금까지 떠받들었구나, 서기는 한숨을 삼키며 글자 하나하나를 눌러 적었다.
스윽.
그때였다.
마리브는 이안이 등지고 앉은 문 창문으로 은색의 머리칼이 지나가는걸 보았다. 저 정도 높이라면 아이라는 것인데, 은발에 심문실까지 들어설 수 있는 아이가 황궁에 몇이나 있을까?
‘아르센?’
아니다. 진일 것이다. 그때, 딜라이나의 궁에서 진이 이안에게 안기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진을 죽이러 간 마법부에서도 두 사람의 유대를 확인했다.
이안이라면, 자신과 게일을 갖고 놀았던 이안이라면, 분명 진을 통한 중앙 통제를 노리리라.
“그런데 이상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이안, 네가 왜 아르센이 아니라 진에게 붙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다른 건 다 이해가 되어도 그것 하나만큼은 모르겠어.”
가만 서 있던 마법사가 움찔거렸다.
오호라, 진이 옷깃을 잡아당겼구나. 아이가 가진 의구심을 정곡으로 찌른 듯하다. 어째서 아르센이 아니라 진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모두가 같은 걸 떠올릴 것이다.
‘딜라이나가 거둔 아르센이라는 패와 그나마 견줄 수 있는, 남은 패.’
“알 것 없습니다.”
이안은 서서히 치솟는 짜증을 누르며 대꾸했다. 시답잖은 것이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수습할 거리가 산더미인데, 의미 없는 시비로 방해라니.
낮아진 음성에 마법사들이 힐끗, 눈치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좀 닥쳐주시오, 저하.’
‘이안 님 화내기 일보 직전인 것 같은데.’
“진을 지지하는 게 겉으로만 그런 것이라면, 그래. 이유가 없을 수도 있겠군. 나와 게일 사이를 농락했던 자이니, 그런 애 하나 구슬리는 것쯤은 문제 될 것 없지. 내가 네놈 속을 모를 줄 아는가?”
타악!
결국, 끝을 봤다. 이안은 거칠게 서류를 덮고서 팔짱을 꼈다. 같잖게 자꾸…….
“마리브 저하. 좀, 닥쳐주시면 좋겠습니다.”
쿠웅!
그와 동시에 문에 뭔가 받혔다.
이안이 뒤를 돌아보자, 진이 이마를 문지르며 쪼그려 앉아 있었다. 긴장하여 문고리를 너무 세게 당긴 탓이다. 시아오시는 사색이 되어 진의 이마를 살폈다.
“저하?”
“그, 에고, 그러니까 인기척을 낸다는 것이.”
이안은 바로 일어나 마법사들에게 눈짓했다. 저를 대신하여 마리브의 심문을 계속 이어가라는 지시였다.
“저하, 이마는 괜찮으십니까?”
“그러하네만…….”
“진, 상처가 깊구나.”
마리브는 턱을 괴며 배다른 아우를 불렀다. 저가 낸 상처가 올곧게 얼굴을 가르고 있었다. 그것이 황제의 표식인지도 모르고.
“눈은 비껴갔으니, 내게 고마워하거라.”
“나가시지요. 이곳은 탁합니다.”
끼이익!
쿵!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닫히는 문. 마치 더러운 것이 있다는 듯 취급하는 작태가 대단하였다. 진은 연신 이마를 문지르며 이안을 올려다봤다.
“이안 경. 일을 방해하여 미안하네.”
“아닙니다. 소득이 없어 그만할까 싶던 참입니다.”
“…그, 있잖은가.”
“예. 저하.”
별탑을 나서던 진이 걸음을 멈췄다.
“나, 확실히 알아두었으면 하네.”
“무엇을요?”
이안은 진과 시선을 맞추며 무릎을 굽혔다. 아까 마리브의 헛소리를 다 들은 게 분명하다. 진이 와 있던 걸 알았던 것이지. 꾸역꾸역 들을 게 아니라 진작 닥치라고 일갈할걸.
“그대가 나를 따르는 이유.”
“음.”
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고 짚을 일이긴 했다. 그것이 지금이 적기인지는 다른 문제였지만, 어쨌거나.
어째서 이안은 자신을 돕는가? 어째서 이안은 자신을 귀하다 여기는가? 정녕 아르센과 대적할 하나의 ‘패’로만 보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찌하지?
“저하.”
이안이 살짝 웃었다. 작은 머리통에 온갖 생각이 어지러이 돌아다니는 게 눈에 훤했다. 그는 조곤조곤 하나씩 일러주었다.
“혼란스러우실 것 잘 압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판세를 읽으시고,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하셔야 합니다.”
영원한 적도, 친우도 없는 곳.
황궁은 그런 곳이다.
“본질 그 자체를 받아들이시고, 시시비비를 가리지 마세요.”
이안이 동정으로 진의 손을 잡았다면 옳은 것이고, 꿍꿍이가 있어서 잡았다면 그른 것인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진에게는 둘 다 이득이고, 옳은 것이다.
“대신 본질을 알고 있으면, 훗날 바뀌는 정세에 대비하기에는 쉽겠지요.”
“그 말은, 이안 경이 어떤 마음을 품었든 우선은 그대를 이용하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하의 권위가 안정되신다면 다시금 숨을 고르시고 저를 보세요. 그러면 다른 시야가 트일 것입니다.”
옆에서 듣던 시아오시가 의아하게 제 주인을 쳐다봤다. 이용하고 버리라는 말을 쉬이 꺼낼 정도의 마음가짐이라. 이안이 진을 대하는 게 진심이라는 걸 알겠는데, 진은 과연 알까?
“…너무 어렵소.”
“괜찮습니다. 몸소 배우게 되실 것입니다.”
“본질, 알아두라 하였지.”
진은 이안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러곤 당차게 눈을 바로 뜨며 이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렇다면 아까 내 물음에 답해보라.”
“저하를 따르는 연유요?”
이안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웃었다.
“거대한 상처를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표식.
신탁의 저주.
그리고 어미에게 버림받았다는 운명.
모든 것이 거대한 상처였다. 이안은 옷자락을 그러쥔 진의 손을 떼어내며 물었다.
“어찌 보십니까?”
“…진실을 말했노라 믿고 싶다.”
“예. 그러면 그리 믿으시면 됩니다. 저하께서는 세상의 중심이시라, 저하의 믿음이 곧 진실이지요.”
데엥-! 뎅!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거대한 시계종. 성문을 개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일러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