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
제2화. 브라츠 백작가의 사생아
‘브라츠 백작가는 귀족치고 천박하다.’
사교계에 떠도는 브라츠 가문의 평가였다. 아마 수많은 변경백 중에서도 야만족과 접경을 맞대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먼 과거만 해도 전쟁 나팔소리가 끊이질 않았지만, 최근 표면적인 화친을 맺고 나서는 이런저런 교류가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안 님. 식사 예절이 아주 우수하십니다.”
서둘러 고기를 씹던 이안이 노인의 칭찬에 정신을 차렸다. 반어법인가? 굶주려서 저도 모르게 게걸스러웠나? 이안은 저도 모르게 찔려서 목을 가다듬었으나, 노인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자제분이 훌륭한 기품을 갖추셨습니다. 역시 데르가 백작님의 훌륭한 가르침 덕이겠지요.”
“별말씀을요. 몰린 경.”
브라츠 가문의 수장, 데르가 백작은 단 몇 초 사이에 바뀐 자식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의례적인 표정을 잃지 않았다. 데르가는 이안을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어쨌거나 브라츠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당연하지요. 부디 황제께 말씀 잘 부탁합니다.”
“물론입니다. 백작님.”
둘의 의미 모를 말에 이안이 우물우물 씹던 것을 멈추었다.
황제? 나 말인가?
아니지. 잠깐만. 방금 브라츠라고 하였나?
‘그러고 보니…….’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있는 제 손이 너무 작고 말랐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야 역시 낮다.
이안은 영문 모를 상황에 음식물을 삼킨 후 포도주잔을 찾았다.
“아.”
잔에 든 것은 술이 아니라 음료였다. 게다가 둥근 글라스로 비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웬 낯선 이의 얼굴. 이안은 순간 체통도 잊고 그대로 뿜을 뻔했다.
“콜록!”
기침과 함께 냅킨을 집어 들자, 맞은편 남자아이가 비아냥거렸다.
“쯧쯧. 저것 보십시오. 어찌 잘한다 싶더라.”
“첼. 동생이 실수하면 돌보아 주어야지.”
첼이라 불린 아이는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비죽거렸다. 백작 부인 메리는 식탁보 아래로 첼의 손을 꽉 붙잡으며 아들을 단속했다.
지금 이 자리는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었기에.
몰린 경은 중앙 황궁에서 내려온 공무원이었으며, 이안이 브라츠 백작가에 입적할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몰린은 첼에게 인자한 웃음을 보이곤 다시 이안에게 집중했다.
“이안 님. 요즘 철학을 배우신다고요.”
몰린의 갑작스런 질문에 데르가 백작과 부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제 이름조차 쓸 수 없었으니까. 백작이 저택 밖 평민을 겁탈하여 얻은 자식이었으므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불과 식사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핑거볼 물을 꿀꺽꿀꺽 마시던 아이 아닌가.
“아직 어디서 말 꺼낼 수준이 안 됩니다.”
백작이 재빨리 끼어들며 이안을 두둔하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알게 모르게 날카로웠다.
‘멍청한 놈. 그렇게 외우라 했건만.’
몰린의 질문에 대비하여 벼락치기식으로 교육한 것이 있었으나, 미천한 게 그새 죄다 까먹은 모양이다. 노인은 물러서지 않고 웃음으로 밀어붙였다.
“학식이란 것이 다 그렇지요. 서로 의견을 부딪치면서 단단해지는 것이랍니다. 이안 님. 최근에는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열여섯이나, 학교는 가지 않으셨다 하니…….”
여든이 다 된 노인은 다정하면서도 강건했다. 하루가 멀다고 인재가 갈려 나가는 중앙 행정부에서 평생을 버틴 노인이니 어련할까.
이렇게 된 이상 백작도 두둔할 수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음.”
이안은 목을 가다듬으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백작가 사람들의 예상대로 이안은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몰린의 질문 때문이 아니라, 이곳이 변경 백작저의 뒤뜰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브라츠 백작저에?
처음 보는 소년의 몸으로?
나움의 시공간 마법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시공간 마법은 시점과 시점을 이어주는 통로를 여는 것인지라, 필수적으로 장소 제약이 걸려있었다.
즉,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
하지만 이안의 마지막 기억은 지하 감옥 아니었던가. 게다가 남의 몸을 빌려 이동한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안 님?”
“아. 실례했습니다.”
몰린의 재촉에 이안이 반사적으로 기품 있게 답했다. 황궁에서 익힌 습관이었다.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의도를 전하는 웃음. 변경백과 그 가족들은 이안이 저리 웃는 것도 처음 봤다.
“철학이요. 철학…….”
이안은 고민하는 듯 몇 번 중얼거렸다.
“제가 대신 대답해도 될까요? 몰린 행정관님.”
그사이를 못 참고 이복형제인 첼이 나섰다.
바깥에서 들어온 이안이 귀한 식사 자리의 주인공이라는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천한 핏줄로 백작가에 입적까지 한다니. 부아가 치미는 것도 당연했다.
어른들의 시선을 이안에게서 저로 뺏고 싶은, 어리석다 못해 한심한 치기였다. 메리 부인의 매서운 눈짓에 말끄트머리가 흐려졌지만.
“첼. 몰린 경은 이안에게 물어보셨단다.”
그녀는 소리 없이 애원하고 있었다.
아들아. 제발 입 좀 다물어주렴.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란다. 저 천한 소생의 아이를 백작가에 입적해야만 네가 살아.
“저는 퓔른 선생을 좋아합니다.”
“퓔른?”
소란 속에서 이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입맛이 뚝 떨어졌는지, 식기는 가지런히 옆으로 치워둔 상태였다.
데르가 백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하든가! 어디서 개뼈다귀 같은 헛소리를……!
“예. 물론 교황청에서는 반기지 않지만, 퓔른 선생이 추구하는 인본주의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지 않습니까.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진리가 무엇인지 곱씹다 보면 진정한 군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으니까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었다.
이안에겐 철학이니 인문이니 하는 것보다 당장 굶어 죽지 않는 백성의 하루가 중요했다. 어느 정도 형식만 유지한 철학 공부였으니, 소위 ‘잘나가는’ 지식인 중 기억나는 자를 읊은 것이다.
데르가 백작이 눈을 또르르 굴려 몰린의 눈치를 봤다. 노인은 자못 놀란 듯이 멈칫거리더만, 이안에게 상체를 가까이 숙였다.
“퓔른 경을 어찌 아시옵니까?”
“예?”
하지만 대답한 것은 이안이 아닌 데르가 백작이었다. 몰린이 허허 웃으며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아무래도 변경이다 보니 중앙 소식이 늦을 거라, 오만한 생각을 품었나 봅니다. 데르가 백작님과 이안 님께 사과드립니다.”
“아니, 아니요.”
몰린은 백작이 퓔른을 모른다는 걸 눈치챘다. 알았더라면 저 성정에 저 얼빠진 표정 대신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으리라.
“퓔른 경은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호크먼 자작가의 막내아들이랍니다. 연식이 어리지만, 바리엘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 중의 수재지요. 얼마 전에 황궁에서 열린 학식 토론에서 인본주의를 거론하여 세간을 뒤집어 놓았답니다.”
변경이라 소식 늦는 거, 맞다.
수도에서 데르가 변경지까지 마차로 꼬박 보름은 달려야 했으니까. 백작을 비롯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다들 놀라서 이안을 돌아보는 동안, 이안 역시 속으로 기함했다.
‘퓔른 선생이 막 성인식을 치렀다니? 그분 연세가 백이 넘었던 것 같은데?’
낯선 몸인 것도 모자라, 시간을 100여 년 가깝게 거슬러 올라온 모양이다. 굉장히, 아주 굉장히 놀라운 상황이지만 겉으로는 어떤 티도 나지 않았다. 황제로서 갈무리된 몸가짐 덕분이었다.
“그래요. 퓔른 경의 철학을 좋아하신다고요. 그런데 방금 교황청에선 반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요. 그게 무슨 뜻인지요?”
“…인본주의라는 것이 인간보다 중요하다는 건 없다는 견해라, 신을 모시는 교황청에서 달가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허허.”
완벽한 대답이었다.
몰린은 보름 동안 뭉친 피로가 풀리는 걸 느꼈다.
“여기까지 달려온 보람이 있습니다. 브라츠 백작가의 새 아드님이 이리 총명하신 줄을 몰랐으니. 분명 황제께서도 기꺼워하실 겁니다.”
사실 귀족이 서자를 입적하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귀하고 잘나신 귀족들인지라 아랫도리 간수 못 해 사생아 데려오는 게 어디 가십거리라도 되겠는가. 여자고 남자고 따분한 사교계에서 잊을 만하면 떠도는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몰린의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리고 천려족 역시 반기겠지요.”
‘천려족?’
이안은 기억을 더듬어 익숙한 이름을 되새겼다. 천려족은 국경 동쪽의 야만족을 칭한다. 자신의 총명함을 천려족이 반긴다?
…그렇다면.
‘볼모인 듯 싶은데.’
국경을 접한 천려족에게 화친 유지의 대가로 보내질 서자.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백작이 사악하게 웃으며 이안의 손등에 제 손을 덮었다. 상황을 알고 나니 인자한 아버지의 탈을 쓴 악마와 같다.
“이안. 나는 네가 평화의 상징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화친은 공식적인 협약이다.
본래는 각 수장의 친자를 보내는 게 관례지만, 변경 밖 야만족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놈들.
실제로 데르가 백작의 둘째 형 역시 어렸을 때 화친을 위해 국경을 넘다가 죽었다. 말로는 사고사라 하지만, 진위를 가릴 수 없다.
이러하니 어떻게 하나뿐인 제 본적, 첼을 보낼 수 있겠는가. 부랴부랴 거들떠도 안 보던 이안을 데리고 와 입적시키려는 거다.
‘당연히 황궁에서도 눈치챘겠지.’
다만 아무리 그래도 개나 소나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몰린을 통해 이안의 총명함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보내질 아이가 총명할수록 외교적인 억제력이 생길 것이고 그럼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테니.
물론 변경에서 브라츠 가문의 자치권이 우선이었으므로 반쯤은 형식적인 절차였다. 하지만 또 반쯤은 황궁에서 하는 지방 귀족 견제라 볼 수 있다.
“아아.”
이안은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이 죽기 전에도 브라츠 가문은 이렇게 몇 번이고 볼모를 주고받으며 화친을 이어갔었다.
결국, 훗날엔 천려족에게 처참히 멸문당했지만.
중앙에 파발이 닿기까지 보름씩이나 걸린 게 낭패였다. 다른 영주들과 당대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증조 할아버지였나?’
그것이 바로 이안의 증조부 대 일이었다.
황제는 천려족을 몰아내고 함께 전쟁했던 귀족과 기사들에게 영지를 쪼개준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안?”
메리 부인이 이안을 불렀다.
백작의 말에 대답하라는 듯.
본 소임을 스스로 되새기게 하는 재촉이었다.
이안은 방싯 웃으며 다시금 물로 입을 축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하나는 인정하자. 이안은 죽지 않았다. 영문 모를 어떤 아이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네. 아버지.”
이안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데르가 백작이 만족한 듯 웃었다. 첼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하호호 웃으며 이안의 존재가 가져올 평화를 축복했다.
“자. 드시지요.”
그제야 마음 놓고 식사를 이어가는 데르가.
이안은 잠시 현실감을 느끼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무엇보다, 쿵쿵 울리는 심장 고동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일깨웠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만약 이것이 나움의 마법이라면 확인할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황궁 별채로 가보는 것. 그리하여 나움의 마법 흔적을 찾아 조사해보는 것.
하지만 변경 브라츠에서 중앙까지는 보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고, 곧 대사막으로 팔려가는 아이에게는 영원처럼 닿을 수 없는 세계였다.
그래. 그런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