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
제20화. 문
“이안의 몸이 안 좋다고?”
“네. 백작님. 아침부터 배가 아프다 하시어 계속 침대에 누워계십니다.”
브라츠 백작은 커프스단추를 잠그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침부터 식당 분위기가 미묘하다고는 생각했다. 아랫것들이 이상하게 먹는 것을 계속 힐끔거리지 않나.
백작은 하인들이 보고를 망설였다고 오인했다. 실상은 이안이 식사를 거름으로써 굶주린 상태라 그런 것이거늘.
“의사는?”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기보다, 화친 제물에 흠이 생길까 봐 우려하는 말투였다. 집사는 안도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진찰을 마쳤는데,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 합니다. 스트레스성 같다고 하더군요. 오늘내일 경과를 지켜보고 약을 짓겠다 했습니다.”
“꾀병을 부리는 건가?”
“글쎄요. 요즘 들어 무리하신 건 사실이니까요. 원체 허약하시지 않습니까.”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뚱이로 이리저리 어찌나 쏘다니던지. 처음 저택에 온 아이와 동일인물이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데르가는 킁, 하고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어제 정문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하던데.”
“네. 백작님. 체벌을 준비할까요?”
“체벌은 무슨. 의사나 계속 붙여주면서 몸 관리 잘 해주거라. 곧 국경 넘을 놈이 미련 쌓아봤자 짐이라는 걸 아직도 몰라. 쯧쯧.”
지금 저에게 얽히는 모든 것이 족쇄가 됨을 모르는 걸까?
마침 잘 되었다. 어미 하나로 아이를 잡아두기에는 슬슬 신경 쓰이던 참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어미 필리아가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아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난리 치는 일도 없었고, 이안도 필리아의 안부를 묻는 게 예전 같지 않다.
‘초반에 어미가 보고 싶다며 자지러지던 때와 비교하면 확실하지. 감정이 서서히 무뎌지고 있는 게야.’
게다가 이안은 주에 두세 번씩 몰린과 따로 만나고 있었다. 노인의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하거늘 브로치는 언제나 깨끗했다.
이쯤 하니 슬슬 뭔가 수작질에 걸려들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본능적으로 날선 감각 같은 것이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에릭?”
“베릭입니다. 백작님.”
“이안이 만나고 싶다 하면 만나게 해주고, 최대한 형편을 들어주어라. 고아라고 했지?”
그는 어젯밤 교사가 가져온 필체 확인용 서신을 들어보았다. 지나가던 개가 봐도 까막눈의 글씨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반듯해지긴 하다만….
데르가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이 있지. 연인을 잃으면 심장을 잃은 것과 같고, 친구를 잃으면 폐를 잃은 것과 같다고.”
발은 어미라는 밧줄로 묶었으니, 이제는 친우라는 이름으로 손목을 묶어봐야겠다. 앞으로 남은 한 달 반간, 저놈이 국경을 넘어서도 브라츠 가문을 위해 한 몸 희생하게끔 모든 걸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이안에게 숨 쉬는 법을 알려줘. 친구가 얼마나 큰 힘이 될지 궁금하군.”
그래야 나중에 숨통을 조이면 그 고통과 공포가 배로 돌아올 것이다. 데르가의 지시에 집사가 허리를 꾸벅 숙임으로 대답했다.
“저택 관리에 있어서 문제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집사. 나는 자네를 참 신뢰해.”
“믿음에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대하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타악.
집사가 나갔다. 데르가는 왁스 거치대에 불을 붙였다. 안쪽의 붉은색 왁스가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그는 익숙하게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둥근 홈이 느껴진다. 검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돌려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달깍.
그러자 명쾌한 소리와 함께 비밀 서랍이 하나 더 열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닌 장치였지만, 사실 안쪽으로는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무턱대고 아무거나 쑤셔댔다가는 그 자리에서 전기 통구이가 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데르가가 집사에게 준 가짜 키 같은.
‘이번 집사는 그래도 꽤 오래 가는군.’
예전에, 아주 예전에 집사 한 명이 데르가 집무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적이 있었다. 몇 대째 내려오던 브라츠 가문의 쥐덫이 제대로 발동한 게다. 천려족과 내통한 것으로 의심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예전 집사보단 눈치 빠른 자이니 알고 있을 수도.’
데르가는 인장 보관 장소라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은근히 이곳에 귀한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 알려댔다. 이안의 앞에서도 브로치를 대놓고 꺼내지 않았는가.
스윽.
데르가는 서신 봉투 위에 왁스를 부은 다음, 브라츠 가문 인장을 가볍게 찍어 눌렀다. 가문을 대표하는 범의 모습이 생생하게 새겨졌다.
* * *
이안은 포근한 침대에 반쯤 누워있었다. 별채에 혼자 남으려고 수작을 부린 것인데, 예상외로 집안 사람들이 더욱 지극정성이다. 의사가 다녀간 뒤로 하인들이 온갖 먹을 것을 줄줄이 대령하는 탓에, 평소보다 더 복작복작하게 오전을 보낸 것 같다.
“해나? 밖에 있는가?”
“네. 도련님.”
이안은 웃옷을 챙겨입으며 해나의 존재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3시. 저택 하인들이 늦은 점심을 끝내고 본채 청소를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아직 아래층에 몇몇이 남아있지만, 그나마 제일 인기척이 드물 때가 지금이다.
“가자.”
“네. 도련님.”
이안은 해나의 도움으로 집사 방을 뒤지기로 했다. 망을 보고, 혹여 누군가 다가온다면 시선을 잡아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은화를 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위험 부담이 큰일이기에, 먹을 것 외 보상을 주기로 했다. 한배 탄 중앙처 귀족이 셋이나 있는데 은화 좀 못 얻을까.
“그래. 걱정하지 마라.”
“걱정이 아니라, 은화를 받으면 무얼 사 먹을까 고민되어서 그렇습니다.”
해나가 민첩하게 움직이며 복도 좌우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 이안 역시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복도를 꺾고 사람이 드문 뒤쪽 계단을 이용하려고 할 때였다.
“아니. 그게 말이나 되니?”
“안 되지. 얘. 너 사기 당했어. 아하하!”
인기척이 들렸다. 하인 숙소 방문이 닫히고, 점점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잠시 들린 것 같다. 해나가 먼저 내려가서는 문제없다는 듯 동그라미를 그렸다.
“저는 아래쪽 계단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큰소리를 낼 터이니 조심하세요.”
“그래. 고맙-”
덜컥.
이안이 손잡이를 돌리다가 멈칫거렸다. 저택 안에서 잠긴 방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심지어 백작의 침실조차 언제나 열려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을 지키는 자들이 서 있긴 하지만.
“잠겼습니까?”
“…열리지 않아.”
교사도 이러했나? 그날 눈치로 봐서 실패했을 거라 짐작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들어가지도 못했을 줄이야. 이안이 마력을 쓸까 말까 고민하자, 해나가 비키라는 듯 손짓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실핀으로 이리저리 문구멍을 들쑤시는 게 아닌가. 이안은 의구심 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해서 문이 어떻게…….
달깍.
“열려?”
“열렸습니다.”
해나는 간단한 일이었다는 듯 손을 탈탈 털었다. 이안이 굉장히 놀란 눈치로 돌아보자, 아이는 실핀을 다시금 머리에 꽂으며 웃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 형제가 많다고.”
“…그런데?”
“형제가 많은 집은요, 시도 때도 없이 문이 잠기고 열립니다. 불만이나 장난을 그렇게 표현하거든요. 이런 간단한 손잡이는 포크로도 열지요.”
“내가 보았을 때는 재능인 것 같다만.”
“이런 것도 재능이라 하면 동네 꼬맹이들 다 자지러집니다. 어서 일보세요.”
해나는 자신이 사창가 근처에 산다는 건 인지하고 있어도, 그로 인해 영향받았다는 건 인지하지 못했다. 이렇게 문을 따거나, 몰래 전언하거나, 술과 물 따위를 바꿔 치는 건 평민들에게는 낯선 행위였다.
끼익.
이안은 일단 해나를 뒤로하고 집사의 방에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 하나가 다인 조촐한 방이었다. 단정하다 못해 남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뭐가 없다.
“흐음.”
이안은 방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며 둘러봤다.
뭘까. 교사가 집사에게서 뭘 얻고자 했을까.
옷장 문을 확 열자, 벽면에 열쇠 꾸러미가 달려있었다. 어림잡아 수십 개씩 열 묶음 이상. 아무래도 저택의 모든 열쇠가 여기 있는 것 같았다.
짤랑-
열쇠마다 용도가 적혀있었다. 1층 왼쪽 첫 번째 다용도실, 두 번째 다용도실…. 이안은 슥슥 넘기며 본채 집무실 묶음을 찾았다.
‘여기 있군. 집무실, 집무관 간이침실.’
그리고 문득 그사이에 끼어있는 이상한 열쇠. 끄트머리에 구슬이라도 달린 듯 뭉툭했다.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적혀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꽤 무거운 것이 일반 열쇠와 재질이 다른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해나가 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누군가 이 층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안은 옷장 아래 상자를 열었다. 잡다한 서류와 신분증 그리고 영지 내 자유통행증이 들어있었다.
똑똑-!
한층 더 급해진 노크. 이안은 어쩔 수 없이 옷장을 정리하고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계단을 올라온 하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안 님? 해나?”
“어쩐 일로 나와 계세요? 몸은 좀 어떠시구요?”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해나. 이안은 자연스럽게 시선 방향 그대로 걸으며 대답했다.
“종일 누워 있으려니 불편해서. 간단히 산책 좀 하려 한다.”
“안 됩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절대 움직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인들은 부산을 떨며 이안의 등을 떠밀었고, 해나가 그 뒤를 총총 따랐다. 그들은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원하는 걸 찾으셨습니까?’
‘잘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거라고는 낯선 모양새의 열쇠와 영지 내 자유통행증뿐이다. 책 한 권 없었으니, 교사가 뭔가를 얻고자 했다면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안 님이 얼른 낫지 않으시면 저희가 혼나요.”
“해나. 이안 님 귀찮게 하지 말고 나와.”
“엇, 저기, 언니들! 잠시만-”
쾅!
하인들은 당부하고서 해나를 끌고 나갔다. 다시 조용해진 공간. 이안은 창가에 앉아 화분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뭉툭한 열쇠와 통행증 그리고 교사. 아무래도 그가 원한 게 무엇인지는 다음 수업 때 넌지시 찔러보아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열쇠 자체가 없는 걸 수도.’
데르가는 분명 브로치를 꺼낼 때 별다른 행동 없이 손만 넣었다. 지문 인식 같은 마력 기기가 있긴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 데르가가 가질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때 문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데르가인가? 꾀병을 부렸다고 성질내러 오는 걸 수도 있겠다.
쿵!
문 앞에 멈춘 인기척. 이내 주먹으로 문을 때려 부술 듯이 내리쳐댔다.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냐?”
“들어가도 된다는 뜻이겠지?”
익숙한 목소리임을 알아채기 무섭게, 문이 활짝 열렸다. 틈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와 눈동자.
“안녕허냐?”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의 베릭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