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0
제200화. 내게도 상처를
쪼르르.
네르사른은 필리아의 찻잔에 홍차를 따라주었다. 황궁에 떨어진 지 벌써 며칠째이거늘,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당최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변방의 빈민촌에서 평생을 살아온 자였다. 처음 히엘로 저택에 들어섰을 때도 호화로워 몸 둘 바를 몰랐는데, 이곳은 그 정도가 차원이 다른 황궁이었다.
“필리아, 우리밖에 없으니 편히 앉으시오.”
“제가 불편해 보이시나요?”
“꽤나.”
필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길을 따라 드레스의 소매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안이 편히 입으라 준비해 준 것이었는데, 어찌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영 불편했다.
“아무래도 저는 밖에서 일하는 체질인가 봐요. 고작 하루 이러고 있었는데, 몸이 가만있질 못하네요.”
“성문이 열린다고 하지 않았소. 우리의 일은 일단락되었으니, 잠시 호사를 누려도 좋아. 무엇보다 그대는 그럴 자격이 있지.”
네르사른은 그리 말하며 따뜻한 홍차를 건네주었다.
초반, 돌덩이를 치우고 건물 잔해를 미는 등 물리적인 수습에서는 천려의 존재가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이내 행정적인 수습이 주를 이루자, 로만드로는 전사들의 거처를 게일의 황궁으로 잡아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자 저하의 처소에서 묵고 지내다니요. 호사의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특히 황궁의 예법은 귀족의 것을 넘어선다고 들었다. 천민 출신인 자신이 괜히 실수했다가 이안에게 부담되지 않을까, 필리아는 최선을 다하여 꼿꼿한 자세를 유지할 뿐이었다. 반면, 네르사른은 편히 등받이에 기대곤 필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필리아, 우리는 객으로 온 게 아니라 이안의 도움 요청을 받고 온 것이네. 그리고 아무리 로만드로가 우리에게 호의적이라고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이곳을 거처로 삼게 하지는 않아.”
여러 가지 연유가 있었다. 우선은 게일을 지키는 것. 아무래도 알력 다툼으로 인해 게일 황자의 신병이 정세를 가를 것 같으니, 그를 지키는 게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숨는 것. 변방족이 황궁을 버젓이 돌아다닌다면, 제국민들의 혼란이 가중될 터. 거기에 게일의 처소에는 접근 금지가 걸려있지 않나. 몸을 숨기기에 알맞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실 로만드로의 호의임은 틀림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자의 처소라. 전사들은 신세계에 떨어진 기분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네르사른 님. 저희, 어찌 돌아가면 좋을까요?”
필리아는 찻잔 끄트머리를 매만지며 넌지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저가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닌 듯싶다. 히엘로의 저택으로, 온기가 가득한 그 저택이 그리웠다. 고작 며칠인데.
“마법부에서 다시 검은 달을 띄워주면 편하겠지만, 무리일 듯하오. 그건 이목을 너무 끄는 데다, 마법사들이 마지막에 쓸 수 있는 수단 격인 것 같아. 그것은 곧 불안정하다는 뜻이니.”
“그렇겠지요? 그러면 마차를 타야 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여기서 히엘로까지 보름 정도 걸린대요. 저는 괜찮지만, 전사들이 불편할까 봐 마음 쓰입니다.”
“필리아, 저놈들은 사막의 새벽과 정오를 모두 견디는 자들이라. 나는 그대가 더 걱정되는데. 그리고 급할 것 없지 않나? 이안 경을 오랜만에 보았으니 회포를 넉넉히 풀고 가지.”
“제가, 방해될까 봐요. 이안은, 지금 너무 큰일을 하고 있잖아요. 무사히 잘 지내는 걸 보았으니, 저는 만족합니다.”
필리아가 더듬더듬,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웃었다.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볼 정도지 않나. 그녀는 아들이 잠잘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리 옷가지를 챙겨준 것만 해도 고맙다.
“아니면…….”
네르사른이 턱을 괴고 필리아를 천천히 바라봤다. 한 곳도 빠짐없이 찍어 누르는, 다정하여 뜨거운 시선이었다.
“여기서 간단히 결혼식을 올릴까?”
“네?”
“이안 경과 함께할 기회가 많지 않아. 그대의 아들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고, 히엘로로 돌아가서는 영원을 맹세하지. 그 여정이 우리가 함께할 나날의 첫 번째 추억이 될 것이야.”
히엘로로 돌아가면 영지를 비울 수 없다. 그러니 신혼여행 삼아 느긋하게 돌아가자는 제안이었다. 필리아는 너무 놀라서 입을 가리고 말았다.
“응? 어때?”
“저는-”
쾅!
감격에 찬 수락이 떨어지기 직전.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게일 황자의 안정이 우선인 곳에서 저런 소란이라니.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일까요?”
“걱정하지 마시오. 전사들이 워낙에 거칠지 않소.”
혈기왕성한 전사 몇몇이 사고 친 게 틀림없으리라. 네르사른은 미소를 유지하면서도 속으로는 욕을 퍼부어댔다. 누군지 몰라도, 타이밍이 영 안 좋았다. 감히 연인의 대답을 잘라먹어? 그것도 혼약에 관한 대답인데?
“필리아.”
“아, 네네. 저는-”
콰앙! 쾅!
네르사른이 대답을 갈구하였으나, 이번에도 소란이 터져 나왔다. 필리아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문 쪽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나가봐야겠어요.”
“내가, 나가지. 그대는 앉아서 쉬어.”
스윽.
네르사른은 싱긋 웃으며 필리아를 도로 앉혔다. 분명 웃고 있는 듯한데, 어찌 살벌하다.
혼자 남게 된 필리아는 귀를 연신 쫑긋거리며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희미하지만 굉음이 끊이질 않았다.
‘게일 저하께서도 깨시겠어.’
필리아는 그리 생각하며 네르사른이 나갔던 문과 마주 보는 문을 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침실과 응접실 사이의 간이 응접실이었다. 마법사들이나 의사들이 휴식하며 대기하던 공간인데, 여러 곳으로 접근이 용이하여 편했다.
달깍.
게일의 침실이 보였다. 필리아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했다. 황자는 여전히 기절한 것처럼 숙면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맡에서 게일을 내려다보는 한 아이.
“진 저하?”
은발에 익숙한 옷차림새였다. 필리아는 아르센을 본 적이 없었기에, 당연히 진이라 여겼다. 아이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저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송구하오나, 그…….”
감히 황자에게 먼저 말을 건네도 되나? 이안이 장관이긴 하나, 황자가 더 귀하신 분 아닌가? 이안이 내린 접근 금지 명령에 황자도 포함되는 것일까? 진 저하와 이안은 친분이 특별하다 하던데, 상관없나?
필리아는 당최 알 수가 없어 곤란했다.
“저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르사른 님을 불러와야겠다. 필리아는 그리 판단하여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멈춰.”
“예?”
스윽.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필리아가 당황한 것도 잠시, 아르센은 생긋 웃으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듯이 말이다. 필리아는 최대한 자세를 낮추어 예를 표하고 다가갔다.
“아…….”
“그대가 이안의 어미인가?”
“네, 맞습니다. 필리아라고 합니다.”
아이의 얼굴에 상처가 없다. 또한, 마리브의 공격에 맞서 서로 부둥켜안았던 시간이 있건만, 저를 처음 보는 것처럼 대했다. 필리아는 아이가 진의 쌍둥이 형제임을 알아챘다.
“아르센 저하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짜증 나는군.”
“예?”
“아니, 예전에는 나를 두고 진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자들이 많았거든. 그런데 이제는 얼굴만 보아도 구분하지 않나? 재미없게.”
아르센은 게일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중얼거렸다.
뭔가,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만 틀어 게일을 살폈다. 작게 오르내리는 가슴으로 보아, 문제는 없는 듯했다.
“배 아파 낳은 어미도 못 알아본 적이 종종 있었는데, 이제는 처음 보는 자들도 거리낌 없이 구분하니. 이것 참 낭패로다. 그렇지?”
“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음? 왜?”
필리아가 긴장한 채 겨우 대답했다.
“진 저하는 진 저하이옵고, 아르센 저하는 아르센 저하 아니옵니까? 아무리 닮았다고 한들 한 분일 수는 없지요. 구분되는 것이 당연하고,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생글생글 웃던 아르센이 입매를 딱 굳혔다.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게 분명했다. 아르센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필리아의 볼을 내려쳤다.
짜악!
“무엄하다.”
“…소, 송구하옵니다.”
“이안의 어미라 그런가? 하는 짓이 똑 닮았구나. 사람 신경 긁어대는 꼴이 누가 보아도 모자지간이라.”
아르센이 필리아의 턱을 잡고 흔들어댔다. 미약한 손길이었으나, 정신이 혼탁해지는 듯했다. 감히 저항할 수도 없다. 현기증이 일어나며 눈앞이 핑핑 돌았다.
“흐음.”
아르센은 땅을 겨우 짚으며 쓰러져 있는 필리아를 내려다봤다. 아까부터 밖이 시끄럽다. 천려족이 주둔해 있다면 그들이 내는 소란이리라. 아마 잠복해 있던 수하들이 들킨 모양이지.
‘영 기회가 좋지 않군.’
아르센은 혀를 끌끌거렸다. 이미 한차례 경비를 뚫고 들어오느라, 힘에 부쳤다. 여기서 전사들이 동시에 몰려온다면 아무리 그라고 한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는 단검으로 게일의 심장 부근을 톡톡 두드리더니, 필리아를 돌아봤다.
“필리아?”
“예, 예. 저하.”
“나와 진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런데 고작 상처로 서로가 구분되다니.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지, 원.”
필리아는 어지러운 이마를 짚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센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맞장구를 쳐야만 할 것 같았다.
“그, 그렇지요.”
“그러니 그대가 좀 도와주지 않겠나?”
“무엇을, 무엇을요?”
“진의 상처를 알고 있지?”
왼쪽 이마에서 오른쪽 턱까지 이어지는 선. 손가락으로 긋는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과 똑같았다. 아르센은 필리아에게 단검을 쥐여주며 웃었다.
“잘 보게. 여기서 여기까지.”
“아, 저하…….”
“그대가 만들어주어. 상처가 생긴 이후로 동생이 나를 멀리하니, 내 마음이 너무 아프네. 아마 내게도 같은 상처가 생긴다면, 진이 좋아하지 않을까? 그대가 도와준다면 내가 정말 고마울 것 같아.”
바깥에서 인기척이 점점 커졌다. 전사들이 경비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라. 게일을 죽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다른 의미로는 완벽했다.
“자아, 어서. 그어줘.”
이상했다. 필리아는 머릿속에 뜨끈한 우유가 쏟아진 것처럼 허옇고 축축하게 늘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단검을 잡았으며, 저도 모르게 아르센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저하. 그…….”
“나는 제국의 황제이니, 나를 도우면, 아들 이안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미 된 도리로 망설이지 마라.”
‘이안의 어미가 4황자를 해치려 들었다. 검을 들었고, 기어코 피를 보았다.’
아르센이 원하는 상황이었다. 그리한다면 당장 게일을 처치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유리한 형세를 구축할 수 있다.
아르센의 이마에 검 끝이 닿는 순간이었다.
“이안.”
필리아가 이안의 이름을 되뇌며 중얼거렸다. 크게 뜨이는 동공. 반사적으로 반대쪽 손을 가져와 단검 날을 잡았다.
“아!”
안 된다고, 아르센에게 상처를 내는 것이 이안에게 도움이 될 리 없다고, 누군가 옆에서 소리치는 듯했다. 필리아가 스스로의 손바닥을 베며 뒤로 물러서자, 아르센이 인상을 찌푸렸다.
“명령이거늘.”
“저하, 안 됩니다!”
“닥쳐. 네놈이 안 그래도 나는 지금 굉장히 피곤하단 말이다.”
아르센은 필리아의 손을 쥐어 제 이마를 찌르려고 했다. 아이답지 않게 어찌나 우악스러운지, 필리아는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저하!”
꽈악!
그때였다.
갑자기 뒤로 확 꺾이는 아르센의 고개.
아이는 열이 바짝 오른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서로를 거꾸로 보고 있었으나, 시선이 부딪히는 것은 흐트러짐이 없다.
“…뭐 하나?”
“형님. 생각보다 멀쩡하시군요.”
정신을 차린 게일이었다. 아르센은 동공을 크게 풀며 소리 내 웃었다.
“죽는 것도 제대로 못 하시니, 황궁에서 탄식이 아주 엄청났습니다. 왜요, 먼저 가신 그분께서 오지 말라고 하시더이까?”
콰앙!
아르센의 비아냥에 게일은 그대로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테이블에 처박았다. 그가 힘없이 나뒹굴자, 문이 열렸다.
벌컥!
이안과 로만드로, 그리고 전사들과 경비들까지.
모두 방 안의 의아한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