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4
제204화. 비 오는 날
황궁에 완연한 일몰이 들어섰다. 곳곳에 불이 들어왔고, 바삐 움직이던 자들의 발걸음 역시 차분해졌다.
하지만 절대 멈추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당분간 낮과 밤의 구분은 무의미했으며, 성문 개방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 중의 하나였기에. 이제 겨우 하나의 관문을 넘어선 것이라.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락.
“다음은요?”
“하이만 가를 규제할 정책 방안 목록입니다. 행정부의 퀸타나 부장관이랑 그쪽 하위 부서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재조정했습니다. 세금 더 뜯어, 아니지. 더 부과하는 게 많다 보니 거기서는 아주 쌍수 들고 환영하더라고요.”
“다른 부서는?”
“음, 의외로 문화부에서도 의지가 뚜렷합니다. 하이만 가에서 소유한 유물들이 꽤 된다고 해서요.”
“4항과 5항 보완도 되었습니까?”
이안은 콧대를 지그시 누르며 로만드로의 보고서를 넘겨댔다. 거대한 원탁 구석에는 아코렐라가 기절한 것처럼 엎어져 자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헤일 역시 기계적으로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식욕 따위는 없지만 살기 위해 욱여넣는다는 표정이 여실했다.
이안은 그들을 힐끔거린 다음, 습관적으로 가죽 서류철을 두드렸다. 정신 좀 차리자는 의미다.
“아, 아오. 스읍.”
“이거나 먹고 정신 차려라.”
아코렐라가 눈 감은 채 침을 닦아내자, 헤일이 그녀의 입에 샌드위치를 쑤셔 넣어 줬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많이 지친 듯 보였다.
“마리브 황자의 처형 후, 정식으로 대회의에서 발의하도록 하지. 하이만 가의 출석요구서를 준비해서 보내게. 그리고 이번 사태에 가담하지 않은 중앙 귀족 명단은?”
“여기 있습니다.”
하이만 가가 쥐고 있는 자금줄은 바리엘을 관통하여 흐르는 강물이다. 그들을 견제한다고 해서 어찌 강을 메우겠는가. 다만, 주인을 바꿔주는 것이 일차적이며 효과가 제일 빠른 방도였다.
이안은 귀족 명단을 찬찬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세르오…….”
세르오 가문. 이안은 신년회에서 만났던 세르오 가의 영식을 기억해 냈다. 그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던 귀족이었으며, 베릭이 제이럿과 대련하여 터질 때도 함께 했던 자다.
집안 자체가 권세 높은 곳은 아니었으나, 이안이 기억하기로는 백 년 후에도 무탈하게 잡음 없이 자리를 지키는 가문이다.
‘적당히 써먹기 알맞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밀려나는 가문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신뢰를 입증하였다.
정세를 잘 탔거나, 혹은 그 흐름에도 치이지 않을 만큼 중심을 잘 잡거나. 둘 중 하나일 터인데, 이안이 판단하기에 세르오 가문은 전자에 속했다. 중심을 잡기에는 그들의 힘이 영 미비했으니까.
“아코렐라 대장.”
“흡, 예예, 저 안 잤습니다.”
“내일까지 상용화 견본용 실담물약을 준비해 주시오.”
“며, 몇 개나요? 다섯 개가 최대일 것 같은데.”
“그만하면 충분할 듯싶네.”
로만드로는 이안의 지시 사항을 꼼꼼하게 기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하이만에 대적할 임시방패로 세르오를 끌어들일 생각인 듯싶다.
헤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몸빵, 입니까?”
“그리 말할 수도 있겠군.”
이안이 방긋 웃으며 서류철을 덮었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하이만은 귀족이었다. 귀족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와 맞는 위치의 패가 필요했다.
“본질적으로는 진 저하와 아르센 저하의 대결입니다. 하지만 황궁에서 하이만을 직접 압박한다면, 이는 황실 대 귀족 간의 이권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어요. 방관하던 다른 귀족들이 귀족이라는 이름만으로 하이만을 지지하는 걸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아르센과 딜라이나도 버티고 있지만, 현재 황궁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이안임이 자명했다. 귀족을, 그것도 그들 중 압도적인 하이만을 탄압한다는 것은 다른 귀족 역시 그리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시사하지 않나.
그래서 황궁이라는 주체 대신 세르오를 넣는 것이다.
“세르오에서 거절한다면요?”
“음, 그러면 다음에는 하이스카넨, 데벤 순으로 넘어가지요.”
차선을 세워두긴 했으나, 이안은 세르오가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누군가에 대적한다는 것은 그와 대등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내포했으니까. 황궁의 도움으로 가문을 확장할 기회이거늘, 포기할 리 없다.
그때,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
똑똑.
“이안 님.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의사? 베릭이 일어난 것인가?”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으나, 이내 로만드로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 쌍둥이 저하의 출산을 담당했던 의사일 겁니다. 밖에서 들어온 의사가 맞지?”
“네. 맞습니다.”
“출궁한 뒤 작게 개원하여 지내고 있다 합니다. 입궁 명을 듣자마자 온 것 같군요. 생각보다 빠릅니다.”
“들라 하라.”
끼이익.
이안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의사는 몸이 불편한지, 제자의 부축을 받으려 들어섰다. 이안이 마중하듯 일어서자, 그가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의사, 가비드입니다.”
“어서 오시오. 걸음 해주어 고맙군.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일세. 앉으시지.”
“이안 님, 그럼 저희는 이만.”
“서류 다시 검토하고 있겠습니다. 부르십시오.”
손님의 등장에 헤일과 아코렐라는 눈치껏 서류를 정리하며 밖으로 나갔다. 마침 누워서 자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는 듯.
이안은 문을 단단히 닫으라 눈짓하고, 의사를 쳐다봤다.
“가비드?”
“예. 장관님.”
“그대가 딜라이나 님의 출산을 담당한 것이 맞는가? 진과 아르센 저하를 태어나게 한 의사가 맞는지를 묻는 것이라. 이는 중대한 사안이니, 혹여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실담물약을 쓸 것이다. 이를 인지하고 답하라.”
이안은 일부러 조금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째서인지, 의사가 너무 의연했기 때문이다. 십 년이나 지난 일을 다시 꺼내는 것도, 그리하여 그를 다시 입궁케 한 것도, 다 예견한 것처럼 말이다.
이안은 그리 말하면서 의사의 안색을 찬찬히 살폈다.
“예. 성심성의껏 답하겠습니다. 실담물약을 쓰셔도 좋습니다. 제 기억은 하나이니, 말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이지요. 제가 아르센과 진 저하를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하문하소서.”
“신탁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물론, 언제나 그것이 맞는 것은 아니나, 어느 정도의 가능성은 지니고 있지. 한데, 요즘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상해서 말일세. 아르센 저하가 먼저 밖으로 나온 게 맞는가? 그대가 꺼내어 형이라 명명한 자가 아르센이 맞는지를 묻는 것이라.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대로 고하라.”
그는 잠시 침묵하여 기억을 헤아렸다. 그러곤 천천히, 그날의 얘기를 시작했다. 벌써 십 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의사는 당시의 날씨와 분위기 그리고 사소한 흐름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밤중에 갑자기 호출을 받았습니다. 산파가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이상하게 아이가 나오질 않는다고.”
비가 내렸다. 흙탕물을 가르는 바퀴,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 소란스럽게 침실 앞을 오가는 시종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딜라이나의 비명…….
이안은 차를 홀짝이며 하나하나의 이미지를 그렸다.
“직접 가서 보니 상태가 심각한지라, 딜라이나 님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고, 점차 힘을 못 내어 혼절까지 갔습니다. 그대로 두면 산모와 아이 둘 다 위험한지라 결국에는 칼을 들기로 하였지요. 그때, 한 신관이 말했습니다.”
“신관?”
“딜라이나 님을 보필하기 위해 카르보 신전에서 파견되어 온 신관이었습니다. 신탁이 내려왔다고요. 동생이 형을 죽일 것이니, 서둘러 아이를 꺼내자는 말을 하더군요.”
산모의 상태가 위급하여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수술은 바로 진행되었고, 의사는 처음 보이는 아기의 머리를 꺼낼 때를 잊지 못하였다.
“쌍둥이 한쪽이 다른 쪽의 목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이는 기록에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보았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저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단일 양막 주머니 출산이라 하더군요. 흔하지는 않고, 외국에서도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해도 놀라운 경험이었건만, 의사는 더더욱 기함할 만한 일을 겪었다.
“목이 잡혀 있던 아이가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이틀 정도 지난 뒤 눈을 뜨는 게 일반적이거늘, 아기는 또랑또랑하게 눈을 뜨고서 의사를 쳐다봤다. 무표정의 그 눈길이 어찌나 섬뜩하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울지도 않고, 그저 계속, 그렇게 저를 쳐다봤어요. 나중에 두 번째 아이를 꺼내고 나니 그제야 울더이다. 자신 좀 봐달라는 듯이. 아주 자지러지게 울어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는 말이 의사의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그는 자중하며 말을 이었다.
“모두 기록에 남겨져 있는 그대로입니다. 생명이 위급하였으나, 두 분 다 무사히 태어나셨고, 딜라이나 님도 회복이 빠르셨죠.”
“신탁을 전했던 카르보 신전의 신관 이름을 기억하는가?”
“이름은 모릅니다만, 주근깨가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의사가 신관의 이름 따위를 알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아쉽긴 하다만, 일단 외관에 대한 말을 들었으니 혹여 카르보에서 다른 자를 보내더라도 알아챌 수 있으리라.
이안이 차를 드는 순간, 의사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날은, 제가… 큰 실수를 할 뻔하였습니다.”
“무슨?”
“첫 번째 아이를 꺼내고 두 번째 아이를 꺼내려 하는데, 너무 어지러웠어요. 그날이 좀 습하고 덥긴 했으나, 이상 반응이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실수로, 두 번째 아이의 얼굴을 그을 뻔했습니다.”
“……!”
의사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안에게 털어놓았다.
다행히 옆에서 보조하던 자가 손을 잡아주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하였다고.
조용하다 터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칼을 잘못 쓸 뻔하였다고.
상처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그것은 곧 아이에게 죽음을 선사했을 것이라고.
‘혹시, 진의 운명인가?’
황제의 표식을 지닐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
아르센의 울음으로 인해 벗어난 듯 보였으나, 다시금 상처를 새길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 말이다.
이안은 탁상을 톡톡 두드렸다.
‘이상 반응이라…….’
혹, 그때부터 아르센이? 필리아 역시 현기증을 느끼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 않았나.
의사는 두 손을 꽉 쥔 채 한숨을 늘어놓았다.
“그때의 일이 조금 충격적이라, 저는 출궁하여 다른 치료를 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출산을 보지 않지요.”
그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감돌았다.
톡톡, 이안은 어디선가 들리는 작은 소음을 알아챘다. 비가 오고 있는 것이었다. 진과 아르센이 태어났다던 그날처럼.
쿵쿵! 쿠웅!
“이안 님!”
복도를 내달리는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 안으로 들여달라는 노크에 로만드로가 문을 열어주었다. 황궁친위대에서 온 자 같았다. 그의 허망한 표정이 젖어있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그, 중앙 외곽에서 시, 시체가 하나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시체?”
“신원 확인을 해달라고 하는데, 일단 제이럿 대장이 먼저 갔습니다. 혹시 모르니 우선 이안 님께 알리라 하셔서…….”
제이럿이 갔다니? 그렇다면 그 말은…….
“바르사베가 죽었다는 말인가?”
“바, 바르사베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시체가 너무 훼손되어 있어서요. 어쩌시겠습니까? 듣기로는 그, 검은 갑옷에 관한 증거를 찾으신다 하여…….”
“당장 가지.”
이안은 옷가지를 챙기며 일어섰다.
바르사베가 죽었다? 어쩐지 믿기지 않았으니, 눈으로 직접 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