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13
제213화. 판결
진의 목소리가 유독 청명하게 울려서 그런 것일까. 재판장에는 적막이 깊게 감돌았다. 어찌나 조용한지, 2층에서 누군가 기침하는 것이 도드라지게 들릴 정도다.
회장의 모두가 진을 쳐다봤다. 개중에는 마리브의 시선 역시 섞여 있었는데, 눈빛이 상당히 묘했다.
“이, 이안 경.”
이게 맞나? 이안이 괜찮다 하여 표를 던졌건만, 어찌 뒤따르는 말들이 없다. 진이 눈을 데굴 굴려 이안을 쳐다봤으나,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잘 하셨어요. 지금 여기서 먼저 나설 자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이안은 아주 작게 속닥거리며 마리브와 시선을 나누었다. 그는 아예 턱을 치켜들고 어이없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정권이 교체되는 시점이다. 황자의 처단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의지를 보임으로, 차기 경합 때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은 얼마 전까지 딜라이나의 보호 아래 있던 자 아닌가?’
아직 어린 황자라 정치적인 꼬투리가 없는 것도 그러하지만, 진에게 공격이 퍼부어진다 한들 그것은 곧 딜라이나를 향하는 것과 같았다. 누구도 쉽게 건들지 못하리라.
“이안 히엘로, 마법부 장관인 저 역시 진 저하의 뜻에 함께합니다.”
방어이자 공격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안은 마리브를 향해 웃으며 진의 의지에 지지를 뜻했다. 어디 한번, 폭로할 것이 있으면 해 달라고. 그것은 진이 아니라 딜라이나에게 넘어갈 것이니, 손 안 대고 상대를 한 방 먹일 수 있는 수 아니던가.
‘게다가 마법부 역시 최근에 정권이 바뀌었다. 웨슬리가 현직에 있었다면 또 모르지.’
마법부와 연관된 것 역시 이안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장관이었다. 지난 과오는 모두 죽은 웨슬리에게 떠넘기면 될 일.
마리브는 이안의 간계를 알아챘는지, 연신 어이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런.”
그것은 아르센 역시 마찬가지다. 반대편에서 지켜보던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중얼거렸다. 당장 마리브의 자폭에서 한 걸음 물러설 생각만 했지, 진의 위치를 간과한 것이었다.
“아르센, 왜 그러니?”
“됐습니다. 어머니. 가만계세요.”
진에 대한 과거 폭로는 결국 딜라이나의 약점이 될 것이니. 이안은 마리브를 도발하여 그걸 끌어내는 것이 이득이지 않나. 무엇보다, 내란을 일으킨 황자를 주도하여 끌어내렸다는 정치적 입지까지 얻게 되리라.
거기에 문제는 또 따로 있다. 바로, 아르센이 대응하여 뭔가를 할 수 없다는 것.
“행정부의 퀸타나입니다. 저 역시 마리브 황자에게 내려진 처벌이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스윽.
이어서 행정부 쪽에 앉아있던 퀸타나가 발언했다. 이안은 보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 보는 자들을 살폈다.
“의도치 않게 마리브가 판을 깔아주었군요. 로만드로 님. 지금부터 발언하는 자들의 순서를 잘 기억해 두십시오.”
이안의 속삭임에 로만드로는 재빨리 수첩을 꺼냈다. 여기서 심하게 주저하는 자들은 기본적인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지 않겠나?
그것이 아니라면 골수까지 마리브의 사람이라는 뜻이니, 당연히 내쳐서 정리할 1순위 대상이 될 것이라.
“…진.”
마리브는 팔짱을 낀 채 진을 불렀다. 감히 재판 중에 보일 죄인의 태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아무도 그를 지적하는 자가 없었다. 황자였고, 곧 죽을 이였으니. 진이 주먹을 꽉 쥐며 대거리했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어떤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없어 무서웠다. 또 어미를 걸고넘어져서 모욕을 줄까? 그것도 아니라면 기억 안 나는 옛날 일을 꾸며 낼까? 하지만 마리브는 뜻밖의 말을 내놓았다.
“너, 목소리가 상당히 좋구나?”
“예?”
“네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게 처음인 것 같아서.”
시답잖은 대꾸 같았지만, 이안은 그것이 마리브의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진에 대한 어떤 트집도 잡지 않았으니까. 폭로는 곧 딜라이나와 아르센에 대한 공격이 될 것이요, 이어서 진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저도 찬성합니다!”
“크흠. 저는 저기, 외교부의 에쉬버스터입니다!”
“웰링어 마베입니다. 찬성합니다.”
“와이번도 이름 올리겠습니다.”
퀸타나가 선두를 끊었음에도 마리브가 잠잠하자, 이어서 봇물 터지듯 저마다 찬성한다는 의견이 던져졌다. 선언한 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바리엘에 명예를 바쳤다.
스윽.
물줄기가 일어나듯 자연스러운 흐름이 이어졌다. 개개인이 눈에 띄면 마리브의 표적이 되지만, 모두가 뭉친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이제는 오히려 앉아있는 자가 이안과 딜라이나의 눈에 들어올 것이라. 마리브를 난감해하여 물러선다면, 차기 실세들로 인해 진짜 난감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타앙! 탕탕!
권한이 없는 2층의 귀족들까지 모두 일어나서 마리브를 처단하는 데 동의했다. 이는 진과 아르센, 둘 중 한 명에게 보내는 정치적 지지다. 마리브는 저를 죽이기 위해 일어선 자들을 둘러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브 베로시온, 마지막 항변이 있다면 허락하겠네.”
항변이 끝나면, 판결의 결론을 매듭짓는 주문이 내려질 것이다. 이는 교수형대 아래에서 그가 공식적으로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유언이었다.
마리브는 입술을 들썩이다가, 단념한 듯 정색했다. 이제는 정말,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담담하게, 하지만 조금은 억울하게. 마리브는 짧게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저 바리엘을 사랑했다. 그래서 내가,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곧 바리엘과 그대들에게 맞는 길이니까. 이날은 바리엘에 있어 평생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그대들의 실수가 미래를 어찌 바꾸는지 보라.”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말이 이어지지 않자, 판사가 봉을 높이 쳐들었다. 찬성과 반대를 헤아릴 필요가 없는 사안이었다.
“1황자 마리브 베로시온, 황가의 성(姓)을 박탈하고 교수형에 처할 것을 대제국 바리엘의 이름으로 명한다.”
타아앙!
짝짝짝!
“집행부는 처형식을 준비하시오.”
“집행부는 처형식을 준비하라!”
주문과 함께, 모두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들 고고하게 허리를 세우고, 마리브의 죽음을 축하하고 있었다. 진은 그 모습이 어쩐지 기이하게 느껴져 이안을 올려다봤다.
“이안.”
개개인의 인격을 떠나, 정치하는 자들의 습성이 이런 거라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며, 오늘의 친우가 내일의 원수가 되는 곳.
가장 강한 빛에는 그만큼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깃드는 법이라. 누군가의 죽음을 이득이라는 이름으로 취할 수 있는 곳이 황궁이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이안도 다를 바 없는 자였으나, 이것 하나만은 일러주고 싶었다.
“…저하, 보십시오. 제아무리 마리브 황자라고 하나, 패착 아래 권신들이 덤벼들면 어쩔 방도가 없지요. 이제부터 정신을 단단히 차리시고, 모든 걸 치열하게 하셔야 합니다. 숨결과 눈짓 하나에도 아득바득 달려드는 자들이 천지이니. 특히나 저하께서 손에 잡으시는 것은 바리엘의 미래입니다.”
승자에게는 영광이, 패자에게는 죽음이 주어질 것이다. 진이 살기 위해 발 들여놓은 길은 생각보다 험난할 것이고, 이안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응. 내 단단히 그러겠다.”
진은 표정을 단단히 굳히고 호송되는 마리브의 뒷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절대로 저리되지는 않으리라. 얼굴을 가르는 상처가 났을 때, 아이는 이미 한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두 번은 죽지 않아.”
“…….”
아이의 작은 다짐에 이안은 어깨를 토닥여줬다. 그때, 로만드로가 다가와 바로 다음 일정을 알렸다. 귀족과 관료들이 모두 모인 지금, 바로 교수형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한 시간 정도 뒤에 형을 집행할 것 같은데, 진 저하는 마법부에 모시는 게 어떠하겠나? 아무래도 그게 낫지 않을까 싶어.”
“진 저하께 여쭙지요. 그나저나, 행정부는요?”
“주문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재판장을 나섰네.”
마리브가 황가에서 퇴출당했으니, 후대에 공식으로 전해질 그의 역사 따위는 없는 게 당연했다. 그에 관한 일대기는 한 단계 격하하여 일반기록물로 취급될 것이었고, 황자가 남긴 수많은 발자취 역시 하나하나 빠르게 지워질 것이었다.
“며칠간 그쪽이 제일 바쁠 것입니다.”
“알고 있지. 그래서 미리 결재할 것들 죄다 받아놓았네. 그리고 저쪽, 세르오.”
로만드로의 눈짓에 이안이 2층을 올려다봤다. 낯익은 청년이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하이만 가를 견제할 때 쓸 세르오 가의 장남이었다. 이안 역시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았다.
“처형식이 끝나고 마법부에서 보기로 하였네.”
“알겠습니다. 다들 자리를 옮기니, 저희도 가지요. 진 저하. 함께 하시겠습니까? 보지 않으셔도 문제는 없습니다.”
“아니. 가겠네.”
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아르센을 보아하니, 그가 처형식에 참석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 역시 갈 수밖에.
최초의 마력운용자 황족이라는 명성에 맞게, 대신들과 귀족들은 재판이 파했음에도 아르센의 주위를 서성이며 온갖 사탕발림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물론, 진의 곁에도 다가오는 자들이 있었다.
“저하.”
“퀸타나!”
“잘 지내셨나요?”
“물론이지. 그대들은 에쉬버스터, 웰링어, 와이번이로군. 구면인 듯한데.”
“예 저하. 내란이 일어날 때, 마법부에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스치듯 뵈었지요. 대회의에서도 뵈었구요. 저하. 아까 먼저 보여주신 용기가 참으로 대단하셨습니다.”
퀸타나를 비롯하여 몇 번의 위기 끝에 연을 맺은 자들. 아르센이 마력운용자라는 소문이 돌며 수가 급감하였으나, 진은 오히려 괜찮다고 여겼다.
‘어차피 이안은 아르센의 마력을 믿지 않고, 나는 나대로 이리 남은 자들의 소중함을 알 수 있으니까.’
“처형식에 드십니까?”
“그래. 자리를 옮기지.”
“가시지요.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이안 경?”
정확히는 진이 아니라 이안에게 할 말이 많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퀸타나와 추종자들의 물음에 이안은 웃으며 양해를 구했다.
“실례합니다. 저는 마무리할 것이 있어서요. 시아오시, 진 저하를 모시게. 금방 합류하겠습니다. 저하.”
“그래. 어서 오시게나.”
그림자처럼 기척을 숨기고 있던 시아오시가 모습을 보이고 진의 곁에 따라붙었다. 다름 아닌 황족, 그것도 1황자의 처형식이었다. 그저 밧줄에 목을 다는 것에서 그칠 게 아닌지라,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특히 마법부에서만 할 수 있는 극적인 효과 연출 따위가 그러했다.
타닥타닥!
“집행부 담당자가 어딜 갔지? 밧줄을 갈아두라고 했을 터인데 아직도 그대로잖아?”
“마법사님, 집행부 담당자 좀 불러주십시오.”
“비키세요! 지나갑니다!”
“귀족들이 앉을 자리입니다. 자리를 더 띄우세요.”
“혹여 피나 오물이 튀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그건 마법부에서 처리해 줄 겁니다. 아, 이안 님!”
처형식이 열리는 곳은 황궁의 중앙 1정원, 야외 오페라 극장이었다. 관중석이 마련되어 있고, 판결문을 읽을 단상도 준비되어 있었으며, 주인공인 마리브가 설 자리 또한 완벽했다.
이안은 그들을 도와 현장을 마무리하다가, 마리브가 있다는 대기실로 들어섰다.
끼이익.
그는 재갈이 물린 채 결박되어 있었다. 처형식을 앞두고 자결한다면 황궁의 명예에 문제가 생기니 당연한 조치다. 이제는 황족도 아닌 자의 입장까지 봐줄 필요가 없는 것이라.
“문제없군. 계속해서 잘 지켜라.”
“예. 알겠습니다.”
그저 대상자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이안이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자, 마리브가 신음을 흘리며 그를 붙잡았다.
“…마리브, 그대에게 주어진 발언권은 끝났다.”
뱀의 혀를 가진 자다. 재갈을 풀어줄 이유가 없다.
“읍읍!”
“아까 그랬지? 이날이 바리엘에 있어 평생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실수가 미래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라고.”
이안은 허리 숙여 그와 눈을 맞춘 다음, 웃어 보였다.
“그대야말로 하늘에서 지켜보라. 이날이 바리엘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 제 궤도를 찾아가는 첫 발걸음이라, 미안하지만-”
“…….”
마리브가 반항을 멈췄다. 진실로 죽음이 성큼 다가온 것을 느낀 것이다. 이안은 조용히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만큼이나, 바리엘을 사랑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