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14
제214화. 1황자였던 자
“저하?”
퀸타나가 고개를 숙여 진의 주의를 돌렸다.
처형식이 일어나는 야외 오페라 극장으로 가는 정원길.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황궁의 잔디밭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부채와 모자 따위로 햇빛을 가리는 척했으나, 그들의 시선은 진에게 힐끔힐끔 닿아댔다.
“아. 그래.”
“괜찮으십니까? 마차를 대령할까요?”
“얼마 안 걸리는 거리이지 않나. 날씨도 좋고.”
“…저하가 그러시다면요.”
아무래도 이안 없이 귀족들과 대면하려고 하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닌 듯싶었다. 진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의 귀족들을 사사로이 만난 적 없었으며, 대부분 저보다 나이가 많은지라 관심사 역시 겹치지 않았다. 중간다리 역할을 해줄 이안이 없으니, 괜히 더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퀸타나와 대신들은 진의 안색을 살피며 걸음을 맞춰 걸었다.
“그런데 저하. 뒤의 저자는 누굽니까?”
“시아오시?”
“이안 경이 붙여준 자입니까?”
이안의 부하로는 붉은 머리칼의 마검사가 유명하지 않나. 시아오시라 불리는 오드아이 사내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태가 멀쩡한 것이, 아마 로만드로를 통해 외부에서 들여온 기사 같다.
퀸타나는 그를 경계하며 진에게 속삭였다.
“혹여 저자가 진 저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은 아니지요?”
“퀸타나. 지난번부터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은 참으로 고마워.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없네. 시아오시는 나를 호위하는 자라. 이안 역시 마찬가지이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퀸타나는 그제야 경계를 조금 풀고 싱긋 웃었다. 아르센이 마력운용자라는 것에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진은 이전과 그다지 다를 바 없이 밝아 보여 다행이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저하, 이쪽입니다.”
오페라 극장에는 이미 귀족들이 절반 이상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마치 유명한 공연을 앞둔 자들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황권과 신권이 반비례하듯, 귀족들 역시 황족의 적당한 몰락을 환영했다. 게다가 오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1황자 마리브. 십수 년 동안 제국을 통치했던 자가 죽어 나가는 날이니, 그만한 공연이 또 어디 있겠는가?
“생각보다 교수형틀이 커.”
“저하는 처음 보시겠군요. 무대 단상 높이가 있어서 더 그래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높으면 높을수록 죄인의 죄질이 깊다는 걸 의미하지요.”
진과 퀸타나 그리고 시아오시를 비롯한 대신들 역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상석 중의 상석, 무대와 제일 가까운 자리였다.
잠시 후, 현장 점검을 마친 이안이 돌아왔다.
“산책은 잘 하셨습니까? 저하.”
“이안! 어서 여기 앉으시게.”
“곧 있으면 시작할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눈을 감으셔도 좋아요.”
자리에 참석한 것 자체가 이미 할 일을 다 하였노라고, 이안은 진을 배려했다.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집행부의 책임자가 판결문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
“원래는 황제 폐하께서 써주셔야 하지만, 건강이 여의치 않으신 관계로 21년 전의 황족 처형 판결문을 차용했습니다.”
이안의 설명과 동시에, 집행부 책임자는 예의 차린 인사를 올렸다. 수군대던 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드디어, 1황자 마리브의 처형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부우우-
물소 뿔 나팔이 시원하고 우렁차게 울어댔다. 책임자는 양피지를 엄숙하게 펼친 다음, 소리를 증폭시켜주는 마도구 앞에 섰다.
“지금부터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죄인 마리브의 죄목을 알리겠다.”
이미 재판장에서 숱하게 반복되었던 부분이다. 누구도 반기는 자가 없었으나, 귀족들은 우아하게 박수를 보냈다.
브라츠령에서 데르가를 처형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그때는 돌과 오물 따위가 날아와 주변을 통제하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정말이지 하나의 공연을 기다리는 듯 차분하다.
‘그래서 그런가. 오히려 기괴하군.’
처형이라 하면 죄인이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는 것이다. 죄라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피해자가 있기 마련인지라, 군중들의 분노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누구도 분노하는 자가 없다.
“…이로 인해, 마리브에게서 황가의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박탈할 것이니. 황제의 명으로, 마리브에게 교수형을 명령한다.”
드문드문, 흘겨 듣던 판결문이 끝났다. 그러자 뒤에서 마리브가 걸어 나왔다. 안대를 낀 채, 재갈이 물린 모습이다. 덤덤해 보였으나, 발치의 족쇄가 심하게 잘그락거렸다.
부우우-
다시금 나팔이 울렸다. 교수형의 목적은 마지막까지 수치를 주는 것. 집행부는 마리브의 안대를 벗겼고, 이내 그가 수많은 귀족 앞에 무릎 꿇고 있음을 인지시켰다.
“밧줄을 거시오.”
“밧줄을 걸어라!”
끼이익. 끼익.
옆에 서 있던 집행부가 밧줄을 내렸다. 마리브는 재갈 문 입술을 얌전히 두었다. 쉬이 목을 내놓겠노라 단념한 듯했다. 굵은 로브가 그의 목을 단단히 죄었다.
“어머. 세상에. 잔인해라.”
“저는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이런, 쯧쯧.”
집행부의 손짓에 마리브의 몸이 조금씩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발버둥 치지 않고 의연하게 몸에 힘을 뺐다. 바람으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긴 했으나, 마리브는 저항하지 않았다.
“더 올려라!”
“더 올려라!”
끼이익! 끼익!
마리브는 마지막 순간, 하늘을 올려다봤다. 티끌 하나 없이 푸르른 하늘이었다. 자신의 벽안보다 더 맑고 깨끗한. 자신의 삶이 끝나도 바리엘의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라는 무언의 계시 같았다.
“큭……!”
긴 머리칼이 조금씩 살랑였다. 그리고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흘렀다.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그 누가 보기나 할까?
마리브는 조금씩 흐려지는 시야에 제 어미를 떠올렸다. 죽어서 어머니를 만난다면, 우선은 안기리라. 비록 실패했지만, 바리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하리라.
‘그리고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이리되지 않게 하겠어.’
마지막 다짐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그리하여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질 의지.
마리브는 결국 마지막 한 줌의 숨을 놓아버렸고, 이내 바리엘의 창공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죽었다.”
“마리브 황자가 죽었어.”
“오오, 죽었습니다! 마리브가 죽었어요.”
위쪽으로 들려 있던 고개가 아래로 숙여지자, 귀족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박수 쳤다. 이내 무대 아래에서 기다리던 마법사들은 마리브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지이이잉. 지잉.
촤아악!
“마법입니다!”
“아니, 마법이 어째서?”
“시체를 처리하려고 하나 봅니다.”
“하긴, 아무리 황실에서 퇴출당했다고 하나, 마지막 예우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요. 이안 장관, 그리 안 봤는데 배려가 있습니다.”
“배려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마법에 이안 쪽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이안은 시선을 계속 마리브의 시체에 고정하여, 그의 마지막을 지켜볼 뿐이었다.
“신분이 모호하지 않습니까. 황족이 아니니 법도대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작위를 받은 귀족입니까, 아니면 평민입니까? 애매하니 없애버리는 게 낫지요.”
“그것도 그렇지만, 궁 밖에 묘를 세우면 사정을 모르는 제국민들이 애도할 것입니다. 죄인에게 애도라, 당치도 않아요. 예상외로 애도가 거세진다면 차기 후계자인 저하께 부담이라. 그 싹을 잘라내는 것이지요.”
귀족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덧붙이며 속닥거렸다. 겉으로는 예우를 다하는 처세이긴 하나, 속셈을 들여다보면 또 의도가 확실하다.
“…역시, 흥미로운 자입니다.”
“변경에서 올라온 지 반 년도 안 되었어요. 그 사이 저자가 서 있는 자리를 보십시오. 무섭지 않습니까?”
“듣자 하니 하이만 공작님을 견제하려 한다는데요.”
“하이만 가가 꺾이면 그 뒤로는 불 보듯 빤합니다. 우리 중앙 귀족 전체에 위협이 될 거라고요.”
“쉬이. 잠시 말을 삼갑시다. 마법사들은 마력을 쓸 때 오감이 예민해진다는 소문이 있어요.”
개미 하품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귀족들은 괜히 헛기침하며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뒤통수만 보이니 뭐 살피고 말 것도 없지마는.
촤아악!
오로라처럼 아름다운 일렁임이 무대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이미 싸늘해진 마리브의 시체를 발끝부터 감싸 오르더니, 이내 완전히 덮어버렸다.
“오호!”
“나비입니다.”
마리브의 발끝부터 형체가 흐려지더니, 이내 흰 나비로 변했다. 사락사락, 작게 날갯짓하며 하늘로 오르는 수백 마리의 나비들. 짧은 순간 사방으로 흩어지며 바람 닿는 곳으로 흘러갔다.
이제 그 누구도, 세상에서 마리브의 온전한 시체를 보지 못하리라.
“이안.”
“예. 저하.”
“…….”
저것은 마리브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수놓아주는 이안의 예우일까, 아니면 시체 하나 남기지 않으려는 방도일까. 진은 궁금해져서 그를 돌아봤으나, 묻지는 않았다. 어쩐지 둘 다 정답일 것 같았기에.
사아아악.
오로라가 가시자, 밧줄만 덩그러니 달려 바람에 흔들렸다. 집행부 책임자는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마도구의 수신 범위를 넓혔다. 이제, 바리엘에 공식으로 마리브의 죽음이 전해질 것이다.
“아아. 이는 황궁에서 알리는 전언이다. 제 1황자였던 마리브 베로시온은 내란의 죗값으로 황가의 성을 박탈당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그 누구라도 바리엘에 위협을 가하는 자는 이리될 것이다. 대제국의 제국민들은 이것을 유념하여, 마리브를 역사에서 지워라. 다시 한번 알리겠다. 제 1황자였던 마리브 베로시온은…….”
집행부 관리자가 제국 전체에 알리는 사이, 귀족들은 행사가 모두 끝났음을 축하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결한 박수와 상기된 표정 따위가 참으로 만족스러운 공연이었음을 일러주는 듯했다.
“딜라이나 님, 아르센 저하.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그거 좋습니다. 그 전에 악수를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마력운용자와 악수하면 행운이 깃든다 하지요.”
“물론입니다. 자, 자리를 옮기시지요.”
“날씨가 좋으니 정원에 테이블을 두는 게 좋겠어요.”
아르센 쪽은 소란을 떨어대며 세력을 뭉쳐댔다. 아르센은 보란 듯이 활짝 웃으며 대신들과 극장을 나섰고, 진은 멍하니 빈 무대만 바라봤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그냥, 뭐랄까. 마음이 조금 아프네.”
살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였다. 진은 마리브가 재판장에서 남겼던 마지막 말을, 영원히 기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누구보다 바리엘을 사랑했노라고.
“이안 경, 바로 마법부로 들어가나?”
“아니요. 저는 세르오 가와 잠시 자리를 가지려 합니다. 저하께서도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리해도 되나?”
“당연히 안 될 것 없지요. 모두 저하의 미래를 위한 일들 아닙니까. 다만 회의가 길어질 것이라, 피곤하시다면 편히 말씀하십시오.”
“응응. 그러지. 참, 의사가 그러는데, 베릭이 고기 삼키지만 않으면 된다 해서 조금씩 입에 물려주려고.”
“베릭이 순순히 물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이안은 불신의 뜻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하지만 진은 주먹을 불끈 쥐며 열의를 보였다. 베릭을 서둘러 낫게 하는 것이, 아이의 제일 가까운 목표니까.
“퀸타나, 자네는?”
“저하. 송구하지만, 저는 이안 경과 잠시.”
“아아. 그렇군. 그러면 나는 시아오시와 잠시 꽃을 보고 있겠다. 다들 말들 나누시오.”
진이 시아오시와 함께 뒤로 물러나자, 퀸타나는 자리를 옮기자는 시선을 보냈다. 이안이 그녀를 따라 정원을 돌아가는 동안, 진은 화원에 쪼그려 앉아 시아오시에게 이것저것을 일러주었다.
“이것이 피면 봄이 왔다는 신호라, 다들… 어?”
스윽.
그때, 진의 손끝과 이안의 어깨에 흰 나비가 동시에 내려앉았다. 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말아 속삭였고-
‘잘 가십시오, 형님.’
이안은 가벼운 손짓으로 나비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잘 가라. 마리브.’
황궁에서 피어올랐던 수백 마리의 나비들 뒤로, 마지막 두 마리마저 사라졌다. 어딘가에는 있겠으나, 알 수 없으리라. 마치 마리브의 흔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