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15
제215화. 온실에서
투명한 유리 천장을 통해 햇빛이 쏟아졌다. 같은 줄기에서 난 이파리이건만, 제각각의 색이 뚜렷했다.
이안은 황궁 정원 안쪽, 온실로 들어서서 뒤를 돌아봤다. 그를 따라온 퀸타나와 몇몇 관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날씨가 참으로 좋습니다. 역사에 새겨질 만큼요.”
“그렇게 말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안 경.”
“제가 무얼 했다고요. 모두 황제 폐하의 뜻이지요.”
이안은 잡담하면서도 그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아무런 용건 없이 저를 보자고 하지는 않았을 터. 서둘러 말해보라는 눈짓에 다들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먼저 나선 것은 퀸타나였다.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그, 그리하시오. 퀸타나 부장관.”
분명 양해를 구하는 언사였음에도 불구, 아무도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퀸타나는 제 시종을 불러 종이 한 장을 가져오게 했다. 숫자가 어지럽고 빼곡하게 적혀 있는, 예산기획서였다.
“아르센 저하가 마력운용자라는 게, 사실입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관료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퀸타나의 성정상, 제일 먼저 나올 물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세의 흐름과 무관하게 제 갈 길 가는 자이거늘.
이안 역시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앞에 예산기획서 두고 할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건 어찌 물으시오? 퀸타나 부장관.”
“저하께서 마법부 소속으로 들어가시면 품위 유지비가 이중으로 부과됩니다. 게다가 딜라이나 님 앞으로 아르센 저하의 예산금이 배당되는데, 이는 황자께서 미성년이거나 별다른 경제 소득이 없을 시에만 내려지는 것이지요. 마법부 소속이 된다면 수당을 받으니, 전면적으로 다시 계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흐음.”
“아시다시피, 현재 재정이 넉넉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나라에 부담을 덜기 위함이니, 아르센 저하를 대하는 마법부의 입장을 일러주십시오.”
그럴듯한 명분이었으나, 그럴듯하기만 했다. 이안은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웃었다. 예산을 명분 삼아 사실 여부를 헤아리기 위한 것 아닌가?
“마법부의 입장이 큰 의미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절차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아르센이 정녕 마력운용자가 맞나? 그렇다면 마법부의 수장인 이안의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안이 밀어주고 있는 진은? 퀸타나의 혀끝에서 의문이 맴돌았으나, 그녀는 참을성 있게 삼켜 버렸다.
“곧 있으면 카르보 신전에서 신탁의 빛이 옵니다. 그때, 마력확인식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마법부의 공식 입장은 그 후에 알리지요. 얼마 걸리지 않으니, 그 정도는 기다려 주실 수 있겠지요? 퀸타나 부장관.”
관료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확실히 알 수 있다’라는 의미가 참으로 묘하지 않나? 이안은 아르센이 마력운용자라 하기에는 의문이 있다는 걸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들었겠지만, 체투르 구역에서 압수품이 있습니다. 현재 마법부에서 성분을 분석 중인데, 그것 역시 마력석이라 하면 재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 체투르라 하면 친위대와 함께 가셨던 그곳 말이지요? 저기, 들리는 소문으로는 하이만 가와 연관이 있다고…….”
따악!
이안은 말 잘 꺼냈다는 뜻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마법인지 아니면 유리창으로 떨어지는 햇빛인지 모르겠으나, 허공에서 빛이 반짝였다.
“맞습니다. 내란에서 게일 황자가 끌어들였던 흑갑옷과 연관 있어 보이더군요. 현재 현장에서 체포한 자들을 치료하고 있으며, 정신이 돌아오는 대로 심문 후 채증할 예정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이만 가에 정식으로 고발장을 제기할 것이고요.”
관료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래서 일은 휘몰아친다고들 하는 것인가? 마리브와 게일의 내란으로 인해, 다음 갈등이 예견되었다. 이번에는 하이만까지 끼어서, 그 승자는 차기 황좌를 거머쥘 것이라.
“고발장이 제시되면, 대회의에서 정식으로 안건을 처리할 것입니다. 하이만 가는 그릇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어요. 그것이 깨지면 하이만 뿐만 아니라 바리엘에도 가뭄이니, 그 전에 조금씩 물꼬를 터 여기저기 분산시킬 생각입니다.”
“본격적인 하이만 가 규제를 시작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역시 세금이 제일이긴 합니다만.”
“하이만 가에서 가만있지 않을 터인데요. 중앙 귀족들끼리 결집하여 맞설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걱정스러운 우려가 새어 나왔다. 퀸타나는 테이블만 가볍게 두드리며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이만이 힘을 잃으면, 거기서 퍼 올리는 세금으로 국고를 채울 수 있다.
‘그리고 분명 아르센 저하도…….’
아. 퀸타나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진이나 아르센이나 그닥 다를 것 없는 황자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왜, 대체 무엇 때문에! 예전부터 아르센보다 진에게 더 마음이 가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하이만 가와 아르센의 견제를 떠올렸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중앙 귀족의 결집을 해소할 방안은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동참할 뜻이 있다면, 대회의에서 내 뒤를 받쳐주길 바라오.”
앞서서 이끄는 것은 마법부가 할 터이니, 그저 힘만 보태라는 뜻이었다. 그만하면 하는 일에 비해 돌아갈 영광이 가히 클 것이라.
“이안 경. 정확히 어떤 내용입니까?”
“저희도 나름 준비를 하면 좋으니, 알아두는 게…….”
“황궁에는 그림에도 귀가 있다 하지요. 규제 내용을 여기서 다 밝힐 수 없음은 이해해 주시오. 다만, 이리 말을 꺼낸 것은 이전부터 봐온 그대들의 성심 때문이니.”
진과 아르센의 구도가 정해진 이후, 이들은 단 한 번도 한눈팔지 않은 자들이었다. 아까 재판장에서 퀸타나 다음으로 줄줄이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아르센이 마력운용자라 하여 박쥐처럼 날아다니는 것들과 비교하여, 실속 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을 터.
‘속으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보여주는 것이 이만하니, 이 정도 정보는 괜찮다.’
그리고 어차피 하이만에서도 이안의 공격을 예상할 것이었다. 이들이 온실에 모여 앉아 의논하고 있듯, 저쪽 역시 둘러앉아 대책을 논의하고 있겠지.
스윽.
“이안 님. 말론 호프 세르오가 진 저하와 함께 이쪽으로 왔습니다.”
그때, 로만드로가 조심스럽게 속삭이며 전언했다. 이안이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그는 조용히 회중시계를 열어 보여줬다. 간단한 담화라 여겼는데, 벌써 삼십 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진과 세르오가 앞에서 만난 게 분명했다.
“하이만 가에서 어찌 나올지가 걱정되는데요. 혼란을 틈타 다시 한번 내란을 일으키진 않을지…….”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결탁한 딜라이나 님과 아르센 저하가 허락하지 않아요. 황제의 자질에 정당성만큼이나 중요한 게 또 있습니까? 하이만이 궁지에 몰렸다는 연유로 날뛰면 바로 버리겠지요. 공작은 그걸 잘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게다가 아르센 저하가 하이만을 찾은 연유는, 솔직히 이안 경의 견제 때문 아닙니까? 그, 외람되지만 내란을 수습한 공이 크고, 마법부 전체가 진 저하를 지지하니 그 대체재로 찾은 게 하이만이에요.”
“하지만 아르센 저하가 마력운용자라 하니, 하이만에 대한 의존도가 확 낮아집니다. 균형이 무너져, 이제는 하이만 측에서 좀 아쉬워지지요. 차기 실세를 잡지 못하면 당장 내란죄에 처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아무래도 국내 자금을 해외로 돌리는 게 유력합니다. 루스웨나 왕국이 그쪽 외가 맞죠?”
“예. 그러면 은행 쪽 사업 동향을 주시합시다.”
“잘 됐군요. 퀸타나 부장관이 그쪽과 거래를 트고 있으니, 맞춤입니다!”
이안이 로만드로에게 보고를 받는 동안, 관료들은 저들끼리 하이만의 수를 짐작하며 회의했다. 머릿수는 적어도,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이었다. 업무를 나누는 것 또한 신속하고 정확하다.
“실례합니다. 제가 선약이 있어서.”
이안은 그들의 열띤 토론을 중재했다. 별안간 정신없이 떠들어 대던 관료들이 멈칫거렸다. 안 그래도 뜨끈한 온실, 열기로 인해 얼굴들이 벌겋다.
“오오. 그러시군요. 하긴, 갑작스러운 모임이었으니.”
“급하게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가요? 아니라면 저녁에 다시 모이도록 하지요.”
“예예. 알겠습니다. 마법부의 입장을 알았으니, 당장은 충분합니다. 그러면 일단 저희는 저희끼리 물러나 있겠습니다. 저녁에 뵙지요.”
스윽.
관료들은 고갯짓을 남기며 온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다 진을 만났는지, 작게 오고 가는 인사가 들려왔다.
“이안!”
“저하, 오래 기다리셨군요. 송구합니다.”
“아니. 시아랑 걷다 보니 내 자연스럽게 이리 들었네. 앞에서 세르오 경도 만났어.”
진이 활짝 웃으며 타닥타닥 달려왔다. 그의 뒤로 천천히 모습을 보이는 말론 호프 세르오. 그는 모자를 벗으며 이안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안 경.”
“예.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입니다. 요즘 바쁘신 줄로 알고 있는데, 이리 뵙게 되어 영광이로군요.”
세르오는 머리칼이 조금 긴 것 외에, 여전했다. 서글서글하니 전형적인 귀족 자제의 품을 그대로 갖춘 모습이다.
이안의 손짓에 세르오가 코트를 벗어 시종에게 넘겨주었다. 진까지 합세하여, 세 남자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아버지께서 직접 오시길 간절히 바라셨으나, 거동이 여의치 않아 저만 오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런. 어서 쾌차하셔야 할 터인데요.”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하하.”
말론은 세르오 가의 장남이다. 가문의 명운을 좌지우지할 만남에 동행자가 없다는 것은, 그가 유력한 차기 가주라는 뜻이었다.
이안은 그를 훑어보며 싱긋 웃었다. 옆에 앉아 있던 진이 그런 이안을 보며 따라 했다. 깊게 파인 보조개에 햇살이 내려앉았다.
“사업은 좀 잘 되시고요?”
“바리엘의 가호 덕분에, 예, 무리는 없습니다.”
“이런, 저는 세르오 가의 명망에 비해서는 언제나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요. 중앙에서 출범하여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문이 몇 안 되지 않습니까.”
세르오는 살짝 쓰게 웃었다. 확실히, 이안의 말이 맞았으니까. 유서 깊은 것에 비해 그들의 영향력은 중앙에서 그리 깊지 않았다. 귀족이 힘을 뻗치려면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거나, 황궁 관료로 들어서 권력을 잡거나, 아니면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세르오 가는 임대업 외, 딱히 두각을 드러내는 게 없었다.
“제 부하를 통하여 언질을 들으셨다 알고 있습니다.”
이안은 차를 홀짝였다. 서로 목적과 의도가 뚜렷하니, 의미 없이 말 돌릴 필요는 없다.
“황궁에서 하이만 가에 대한 제재가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을 세르오가 도맡아서 해주었으면 해요. 그리해 준다면, 아마 세르오 가문 역사상 제일 황금기가 될 것입니다.”
하이만에서 굴리고 있는 금융업에 대한 지분 일부, 공작으로 승격, 세금 감면, 거기에 차기 황제의 가호까지.
이안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당장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야망이 있다면, 넘길 수 없는 기회임이 분명했다.
“…하이만이 아니라 중앙 귀족 모두와 싸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들 뒤에는 황궁이 있지요. 이겨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가치, 예. 알지요. 저 또한 이를 놓칠 수 없고, 제안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십시오.”
“왜 저희 가문입니까?”
중앙에 귀족 가문이 한둘이던가? 굳이 세르오가 아니더라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세르오는 이것이 더더욱 중요했다. 그들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 그래야 제안을 납득할 수 있었으니.
“세르오는 내란에 참여하지 않은 가문 중 하나입니다.”
“게일 저하께서 선택하지 않을 만큼 눈에 띄는 게 없다는 반증이지요.”
부정적이군. 이안은 눈썹을 까딱거리며 차를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한들, 이유를 꼬집어 낼 것이라. 이럴 때는 오히려 흘리는 게 낫다.
“신년회에서 제일 처음 제게 말 걸어준 분이 세르오 경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
그리 말하니 할 말이 없나 보다. 세르오는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안할 게 있습니다.”
“들어보지요.”
“세르오 가문에도 믿음을 바탕으로 한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이안은 멈칫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기에.
“이안 경, 제 동생과 약혼하여 주십시오.”
“무어라?”
“푸흡-!”
놀라서 되물은 건 눈이 토끼만큼 커진 진이었고, 차를 뿜은 것은 뒤에서 대기하던 로만드로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쳤다.
“말도 안 되네!”
“아니, 그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