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17
제217화. 새로운 신탁
“저하, 괜찮으십니까?”
쪽지를 읽어내린 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로만드로는 걱정스레 그를 불렀으나, 아이는 연신 쪽지만 내려다본 채 대꾸하지 않았다. 혹여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닐까, 계속 다시 읽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로만드로가 이안을 돌아봤다.
“…….”
하지만 이안은 무덤덤하게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완전히 상반되는 두 사람의 반응에, 로만드로는 무엄을 무릅쓰고 요청했다.
“저하, 괜찮으시면 저도 좀 보겠습니다.”
“아, 응응. 그러시게.”
“…헉.”
로만드로는 황급히 쪽지를 가져온 다음, 저도 모르게 숨 쉬는 걸 멈추었다. 진의 반응으로 보아 별로 좋은 신탁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은…….
-저주받은 자여, 운명을 거스르진 못할 것이니. 바리엘을 위해 스스로 죽으라. 그리하면 세상에 영광이 깃들 것이다.
누가 보아도, 진과 아르센의 상황에 부합하는 신탁이었다. 저주받은 아이, 진.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예견된 운명.
로만드로는 쪽지를 꾸깃거리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시종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대기 중이다.
“신전의 전언이 우리에게만 온 것인가?”
혹여, 그리한다면 여기서 묻어버리는 게 낫겠다. 안 그래도 아르센 쪽으로 정세가 기우는데, 이런 신탁이 내려진 것이 알려진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되지 않나. 신탁의 신뢰도에 왈가왈부 말이 많지마는, 일맥상통하는 것이 두 번이나 내려진다면 없던 믿음도 생길 것이라.
“행정부에도 전달되었습니다. 특별히 구분되는 것 없이 부서명만 적혀있었으니, 아마 같은 내용이라 짐작됩니다.”
“어허! 이런, 이런!”
타악!
로만드로는 제 이마를 거칠게 내려치며 탄식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행정부? 반나절 안으로 황궁의 모두가 새로운 신탁을 알게 될 터. 그는 머리를 쥐어 싸며 테이블에 엎드리다시피 쓰러졌다.
“…….”
다시금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 조용한 것이 이상하여, 로만드로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진은 뭔갈 생각하듯, 지그시 온실 한쪽 구석을 노려보고 있었고, 이안은 차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한쪽은 결사요, 한쪽은 평온이라. 로만드로는 의아함을 느낀 채 이안의 팔을 툭툭 쳐댔다.
“이안.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시게.”
하지만 이안은 눈만 찡긋거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영문 모를 태도에 로만드로가 눈썹을 까딱거리는 순간. 진이 입을 뗐다.
“…황궁에 저주받은 자가 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
“그렇지요. 저하.”
“이것은 내게 내려진 게 아니라, 게일 형님에게 내려진 것으로 여길 것이다.”
게일 역시 저주를 받은 몸이다. 따지고 본다면,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진의 신탁보다 확실하지 않나? 그의 저주는 누가, 어떻게, 왜 내렸는지가 명확한 ‘사실’이었다.
게일의 존재를 까먹고 있던 로만드로가 탄성을 내질렀다.
“맞네요. 맞습니다. 이것은 진 저하가 아니라 게일 저하께 내려온 것입니다. 예예. 맞아요.”
“그래. 나는 그리 믿을 것이요.”
신탁이 정확히 누굴 가리키는지는 모르겠으나, 진은 그리 믿을 생각이었다. 믿음으로부터 파생된 운명이 얼마나 잔인하고 고단했는지 잘 알기에. 그리하여 믿음은 실제화된 운명을 만들어낸다는 걸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이제부터, 그릇된 말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아이는 어둠을 노려보며 그리 생각을 다잡았다.
“훌륭하신 처사입니다.”
이안은 아낌없이 진을 칭찬했다. 사실, 이안은 진이 황제가 될 걸 알고 있었으니 ‘저주받은 자’라는 대목을 보자마자 게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진이 스스로 깨닫고, 행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진은 자신이 귀한 자라는 걸, 완벽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하이만은 어찌하나? 하이만에서 이를 알게 되면, 아니지. 하이만까지 갈 것도 없네. 아르센의 권신들이 알게 되면 이때다 싶어 다시 게일 형님을 죽이려들 것일세.”
안 그래도 이미 한차례, 아르센을 공격한 것 때문에 사방에서 게일의 즉결심판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탁의 해석을 그쪽으로 틀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덤벼들 터. 진의 걱정에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사실, 게일 저하의 채증은 모두 끝났어요. 하이만과 결탁하여 내란을 일으켰고, 그에 대한 모종의 거래 내용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재판 시일입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일사천리 처리되었던 마리브의 재판과 달리, 게일은 좀 복잡했다. 이안 측은 최대한 빠르게 재판을 열고 싶어 하지만, 하이만, 정확히 하이만 쪽은 게일을 처리하기 전에 재판에 응할 수 없다는 태도일 것이라. 계속해서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 재판이 연기되겠지. 언젠가 한계에 부딪혀 재판이 열리긴 하겠다만, 시간이 끌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우선 대회의를 지켜본 다음, 다시 일정을 세우는 게 좋겠습니다.”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눈짓했다. 고발장에 대한 건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묻는 것이다. 그러자 로만드로는 저만 믿으라는 듯 자신 있게 가슴팍을 쳐댔다.
“응. 알겠네.”
진은 꾸깃꾸깃해진 쪽지를 슬쩍 펼치며 중얼거렸다. 저주받은 자가 자신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하려는 듯이. 그러자 이안이 손을 튕기며 마력을 개방했다. 그의 손끝에서 작은 불씨가 태어났다.
지이잉. 지잉.
“저하. 원하신다면.”
원하신다면, 태워 버리세요. 저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라면 세상에 존재할 연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없애 버리십시오.
“고맙네.”
진은 이안의 속뜻을 알아채고 싱긋 웃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그의 손끝에서 쪽지를 태워 버렸다.
화한 잿가루가 잠시 휘날렸으나, 가소로울 정도로 미약하다. 진을 누르고 억압하던 신탁의 무게는 저리도 가벼운 것이다.
“저하. 해가 곧 집니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전에 돌아가심이 좋겠습니다.”
“이안 경은?”
“물론, 저도지요.”
마법부가 그들의 일터였고, 쉼터였다. 진은 손을 탁탁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은 모르겠으나, 온실 안은 여전히 따스했다.
* * *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여, 제 형제의 죽음까지 목격한 날이어서 그럴까. 진은 마차에서 까무룩 잠들어 시아오시에게 업혀 들어갔다. 이안과 로만드로도 그처럼 누울 수 있다면 좋겠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사락.
“다음은요?”
“에서 특간 관련 인터뷰를 신청했는데 말이지. 그때, 기억하나? 호외 찍어준 대가로 비비안나가 독점을 주기로 했다던데.”
“기억합니다. 남는 시간에 잡아주세요. 마력확인식 진행되면 더더욱 바빠질 것이니, 그 전이 좋겠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가 이안과 로만드로를 반겼다. 분명 아침에 나갈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아마 퀸타나를 비롯한 대신들의 보고서가 섞여들어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여기, 제출할 고발장.”
로만드로는 두툼한 종이뭉치를 내려놓았다. 한 뼘 정도 되는 것들이 모두 하이만 가의 내란 및 중죄에 관한 혐의 고발 목록이었다. 생각보다 방대하자, 이안의 눈썹이 호를 그렸다.
“양보다 질입니다. 괜한 것까지 섞여 있으면 사법부에서 가려내는 데 시간 소모가 크니, 저희에게 불리합니다.”
“모두 사실에 기반한 것들이네. 아니면 흑갑옷 내란 죄만 올릴까? 그러면 여기서 여기까지, 도합 스무 장 정도면 될 것인데.”
“잠시만요.”
황궁에 정식으로 접수되기 전, 이안이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절차였다. 마법부의 이름으로 올라간 것은 결국에 이안의 이름으로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그는 천천히 살피며 첨삭 부분을 지적했다.
“여기, 수정. 목록 위치 바꾸세요. 하이만이 체투르에 지분을 갖고 있긴 하지만, 아직 밝혀진 게 없잖습니까. 뒤로 빼는 게 맞습니다.”
“음, 잠시만. 그래. 알겠네.”
로만드로의 깃펜이 열심히 움직였다. 한참이나 그렇게 서로 업무를 보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똑! 또도똑!
이안은 시계를 힐끔거렸다. 곧 있으면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다. 노크 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것 같았으니, 그는 가볍게 허락의 뜻을 전했다.
“아코렐라 대장인가? 들어오라.”
“오오?! 어찌 아셨어요?!”
“문을 그리 두드리는 건 베릭 아니면 그대뿐이다.”
“하하하. 이거 원. 다름 아니라요, 내일 하이만 쪽으로 고발장 넣는다는 걸 들어서요.”
그녀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한 손으로 흔들며 웃었다. 이제 흰 종이만 보면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수준이라, 로만드로는 입을 가리며 경악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추가 자료인가? 우웁.”
“어라라. 어찌 비비안나 님의 입덧을 대신하십니까?”
“입덧이 아니라, 그, 이제는 새 종이만 보면 신물이 나네. 진심으로.”
“체투르 구역에서 입수한 검은 원석이요. 그거 연구 결과예요.”
이안은 아코렐라의 보고서를 받으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구 결과라니? 벌써? 물리적인 시간상 절대 이해할 수 없지 않나. 이안은 지끈거린다는 듯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아코렐라 대장. 오해 말고 들으시게. 혹여 고발장에 첨부할 것을 염려한 것이라면 정중히 거절하지.”
“졸속으로 한 거 아닙니다. 물론 아직 진행 중이긴 합니다만, 고발장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일 수도 있어서 이리 올리는 것입니다.”
반드시 들어갈 내용?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보고서를 읽어갔다. 그럴수록 덤덤한 그의 표정에 균열이 생기니, 이는 명백히 ‘놀라움’이었다.
“지금 내가 이해한 바로는…….”
로만드로는 아코렐라가 말했던 유기체의 결합 어쩌고저쩌고를 떠올리며 이안의 물음을 기다렸다. 이안, 이해할 수 있겠나?
“이게 드래곤의 각린이란 말이지?”
댕그랑. 로만드로는 잠 좀 깰 겸 커피를 들었다가 그대로 놓쳐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드래곤의 이빨을 비롯해 각종 뼈대는 흔하지 않게 볼 수 있었으나, 각린의 경우에는 경우가 달라진다.
“가, 각린이라니? 각린? 내가 아는 그 비늘?”
‘문제의 소지가 확실히 있군.’
이안은 한숨 쉬며 턱을 괴었다.
드래곤은 세계에서 정의하는 신성불가침의 신수였다. 개체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들에게 얽힌 신화가 그들을 그리 만들었다.
로만드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이안을 돌아봤다.
“이안, 혹여 ‘드래곤의 희생’을 아는가?”
혼란스러운 태초. 강인한 드래곤은 인간들의 무기가 되어 전장을 누볐다. 그들이 뿜는 불길로 대륙이 갈라지고, 그 틈을 다시 그들의 눈물로 채웠으며, 그것을 수백 년 반복하여 지금의 지각이 생겼다는 설화였다.
신께서 보시기에 그 광경이 너무도 참혹하여라, 드래곤의 능력을 앗고 전쟁을 멈추게 하였으니.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드래곤이 힘을 잃었다는 내용 아닙니까. 스스로 나라라 칭한 곳치고, 신성불가침 협약에 서명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바리엘은 그 협약에 대표로 서명한 곳이기도 하고요.”
“자, 잘 아네?”
한마디로, 전 세계가 드래곤은 잡지 말자는 동맹을 맺은 것이라. 다만 예외적으로 ‘자연사한’ 드래곤의 사체는 사용 가능하여, 이빨이나 뼈대 따위가 검으로 만들어지곤 했다.
아코렐라는 보고서를 툭툭 두드리며 덧붙였다.
“이러니까 조금 헷갈렸어요. 분명 마력과 비슷한 게 있긴 한데, 결정이 달랐거든요. 아, 그리고 드래곤은 자연사할 경우 각린이 제일 먼저 썩어 없어진다 합니다. 얻기 굉장히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 말은, 살아있을 때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보급 공장이 따로 있다는 쪽으로 대응할 것 같아요. 실제로 바리엘 인근에 큰 곳이 몇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 날까지, 백 년이라는 시간을 사육하며 시체를 기다리는 국가 인증 공장이 몇 있다.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아코렐라의 보고서를 넘겨주며 지시했다.
“이것도 첨부해서 올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