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18
제218화. D-4
게일은 침대 끝에 덩그러니 앉아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손끝에서 궐련이 타들어 갔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미 발치에는 한 모금도 못 마신 꽁초가 잔뜩 쌓여있었으니까.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연신 피어오르는 연기만 바라봤다.
‘마리브가 죽었다.’
그것도 자신이 자는 사이, 창공에 매달려 죽었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그’ 마리브 아니던가. 평생 저를 영원히 옥죌 것 같던 경멸의 대상. 그런 마리브도 결국에는 사람이었고,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 기분이 이상했다. 언제나 저를 앞서가던 마리브. 그가 죽다니.
“하하, 하.”
시원하기도 하고, 울컥 짜증이 솟구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리고 완전한 패배감을 느꼈다. 이안의 말대로, 두 사람은 역사에 새겨지지 못할 것이라는, 완연한 패배감.
똑똑.
“게일 저하, 의사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허락하지 않았으나, 문이 열렸다. 게일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의사가 달려온 것이다. 자다가 호출을 받았는지, 머리 한쪽이 심하게 눌려있다. 그는 방 안을 가득 채운 연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하. 목을 다치셨잖습니까. 어찌 자꾸 궐련을…….”
“왜? 재판에서 증언 못 할까 봐 단단히 단속하라 하던가? 어차피 죽을 거 연기나 실컷 마시다 죽으련다.”
쓸모가 없어지면 당연지사 짓밟힐 목숨. 진이나 아르센이나, 그를 내버려 둘 연유가 하나 없었다. 게일은 그저 들고만 있던 궐련을 보란 듯이 들이마시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의사는 차마 빼앗지 못하고, 진맥하기 위해 가방을 풀어헤쳤다.
“그래서, 이안은 지금 뭘 하고 있지? 마리브가 죽었으니까, 축배라도 들고 있으려나?”
“황궁이 전반적으로 엄숙합니다.”
“음. 그래? 하긴, 이제 본격적으로 쌍둥이들이 맞붙는 시기가 왔지. 그대도 줄 잘 서는 게 좋을 것이다. 나와 마리브 때보다 더 격렬할 수도 있으니.”
의사는 게일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주사기를 준비했다. 탁탁, 그가 바늘 끝을 치면서 중얼거렸다.
“글쎄요. 결과는 이미 나온 것 같습니다만.”
“마리브도 죽었어. 아무도 몰라.”
“아르센 저하가 마력운용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마법부 흡수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전반적으로 입지가 진 저하보다 올라가는 것은 기정사실이지요. 아, 카르보에서 신탁도 새로이 내려왔답니다.”
“신탁이라니?”
“‘저주받은 자여,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니 바리엘을 위해 스스로 죽으라. 그리하면 세상에 영광 깃든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라고 하는데, 쐐기를 박았지요. 진 저하보고 물러나라…….”
주사 놓던 의사가 말끝을 흐렸다. 워낙 황궁의 모두가 쌍둥이에게 집중되어 있던 탓이다. 진짜 저주를 받은 자는 여기 있건만! 그것도 마법사가 영혼을 태워가면서까지 내린, 금기와 영속의 저주.
게일이 웃음을 흘렸다.
“신께서 내게 하신 말씀 같은데.”
“그,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허겁지겁 진료 가방을 챙겨 나가 버렸다. 다시 홀로 남게 된 게일. 그는 벌러덩 누워 신탁을 곱씹었다. 스스로 죽으면, 세상에 영광이 깃든다?
‘…역사에 남을 영광인가?’
1황자였던 마리브조차 한 줌의 재 없이 소멸했다. 자신 역시 그리될 것이 자명한데, 어차피 죽을 거 영광이라도 깃든 죽음이면 좋지 않겠나?
저에게 신이 마지막 기회를 준 것 같았다. 한번 모든 걸 놓았던 몸. 운 좋게 살아났으나, 이미 선을 넘지 않았던가. 두 번은 쉬웠다.
“…누구 있나?”
게일은 조용히,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이 침실에 무언가 조치해 놓은 게 틀림없다. 그러니 사병 없이 홀로 저를 이리 두지. 그걸 증명하듯, 복도가 아닌 왼쪽 벽면의 문이 벌컥 열렸다.
“게일 저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안의 어미라는, 필리아다. 그녀의 뒤를 따라 네르사른 역시 함께했다. 두 사람은 아르센 사태가 있고 난 뒤,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필리아가 소란을 피우며 시종들을 부르려 하자, 게일이 손짓으로 저지했다.
“되었다. 문제없어.”
“아, 그러, 그러시군요.”
필리아가 허둥지둥 문고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한참 움직이질 않으니, 게일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할 말 있으면 해도 좋다는 허락의 의미로.
“저하,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 따로 인사드리지 못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필리아는 넙죽 엎드리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아르센의 얼굴에 상처를 낼 뻔하지 않았나. 그것이 이안에게 얼마나 큰 약점으로 돌아갈지, 정신 차릴수록 깨달을 수 있었다. 게일이 운 좋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처절하게 비관했을 것이라.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다.
스윽.
뒤에 함께 서 있던 네르사른도 정갈한 몸짓으로 엎드렸다. 전사의 기개가 뚝뚝 흐르는 자라 그런지, 몸을 낮춰도 낮춘 것 같은 느낌이 안 든다. 게일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번잡하다. 나가라.”
딱히 의도가 있어서 필리아를 도운 건 아니었다. 막 깨어난 그는 정신이 없었고, 아르센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 잡아챘던 것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필리아와 네르사른이 침실을 나서자, 게일은 다시 탁상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 다시금 궐련이 들렸다. 흰 연기가 방안을 잠식하듯 흐트러졌고, 게일은 신탁을 곱씹으며 잠들었다.
* * *
쿵!
“허억, 허억, 꾸에에엑…….”
로만드로는 두 팔로 책상을 짚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순간 훅, 하고 올라오는 헛구역질. 해가 뜨면 고발장을 보내겠노라고 말해두었는데, 이안의 첨삭과 아코렐라의 보고서가 새로이 들어오지 않았나. 로만드로는 충혈된 눈을 비비며 울먹였다.
“됐다. 아이고, 끝났다.”
“으, 어…. 다 하셨어요?”
“아코렐라 대장도 여기서 잘 게 아니라, 내려가시게. 나도 고발장 내기 전에 조금 자야겠어.”
집무실 구석 소파에 몸을 말고 있던 아코렐라가 눈을 겨우 떴다. 혹여 로만드로가 보고서를 취합하고, 파악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생기면 즉시 해소해 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깥을 보니 이미 아침 해가 훤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럼 저 내려갈게요. 문제 있으면 연락 주세요.”
“응. 그래. 고맙네.”
“수고용.”
아코렐라가 손을 휘휘 흔들며 나가는 동안에도, 로만드로는 서류 정리에 여념 없었다. 해냈다, 해냈어!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는데, 이게 되는구나. 역시 사람은 하면 된다니까. 이만한 황궁도 사람이 지었는데, 암, 고발장 정도는 뭐!
끼이익.
“어머. 일어나셨어요?”
“비비. 일찍 일어났군. 몸은 좀 어떤가?”
“저는 언제나 좋지요. 로만드로 님은요?”
그때, 비비안나가 쟁반에 아침 식사를 챙겨 들어왔다. 재난 현장에서도 쉬이 지치지 않던 로만드로인데, 어찌 황궁에 난리가 거듭될수록 수척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도 일반인과 비하면 풍채가 있는 편이지만은.
“스프만 주어. 다른 거 먹으면 토할 것 같아. 밖에, 손 남는 마법사 없나?!”
로만드로의 부름에 마법사 둘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들 역시 당직이었으므로, 피곤함에 절어있는 낯빛이다. 로만드로가 안타깝게 혀를 차며 지시했다.
“채비하시게. 고발장을 제출하러 갈 것이니, 호위를 부탁함세. 다녀오면 반차를 주지.”
두 마법사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종이 뭉치를 힐끔거렸다.
“손이 따로 필요하지는 않으시고요?”
“괜찮아. 무겁긴 해도, 마차 타고 갈 것인데 뭘.”
“예. 알겠습니다. 두 시간 뒤에 출발하는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응. 그래그래.”
큰일을 끝냈다는 생각에, 로만드로는 수프를 떠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댔다. 접수 자체가 시작이건만, 그래도 이리 작은 여유를 누리는 게 어디란 말인가? 대회의 일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비비안나와 함께 지낼 수도 있겠다.
“고발장은 사법부에 내는 거지요? 하필이면 마법부에서 제일 먼 곳이네요.”
“접수하고 형식적인 심사 과정만 보고 올 터이니, 아마 오후 세 시쯤이면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그럼 그때 맞춰 식사를 준비해 놓을게요.”
“응. 고마워.”
로만드로는 비비안나의 볼에 입술을 찍어 눌렀고, 기분 좋게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내 마법사들이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기별을 전하자, 허겁지겁 남은 수프를 긁어먹고 뛰쳐나갔다.
히이잉!
“타시지요.”
“고맙네. 끄응.”
로만드로는 품에 고발장을 꼭 끌어안은 채 마차에 올랐다. 착석한 마법사 역시 출발하라는 듯 창문을 두드렸으나, 어찌 조용하다. 마부가 마부석에서 난감하다는 듯 알려왔다.
“송구합니다. 말고삐가 조금 이상해서요.”
“천천히 하시라!”
기분도 좋은데, 뭐 어떤가! 로만드로는 계단 위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비비안나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그러자 마법사가 넌지시 물었다.
“잠시 주무실 것이라면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오, 괜찮네! 자면 심사 때 정신 못 차릴 것 같아서.”
“…그러십니까?”
“응응. 아이고, 오늘 날씨 참 좋다!”
밖을 구경하며 웃는 로만드로. 그 뒤로 마법사 둘이 모종의 시선을 나누었다. 드디어 마부가 문제를 해결하고 출발하려는 때였다.
톡톡.
어느새 다가온 시아오시가 창문을 두드렸다.
“로만드로 님. 고발장 접수하러 가십니까?”
“시아오시, 무슨 일인가?”
“이안 님이 동행하라 하셨습니다.”
“일어나셨어? 근데 마법사 둘이 같이 가는데.”
“…이안 님이 동행하라 하셨습니다.”
“그, 그려. 주인이 하라면 해야지. 타시게!”
로만드로는 문을 열어주고 좌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덕분에 마법사 둘이 몸을 꾸깃거리며 안쪽까지 밀려났다.
“가는 길에 말동무나 하지. 나 잠들지 않게 계속 떠들어다오. 아니지. 내가 떠드는 게 낫겠어. 이게 어제만 해도 될까 싶었는데, 으하하! 내가 했지 뭔가.”
“…….”
네 명 중에 떠드는 이는 로만드로 밖에 없었다. 시아오시는 두 마법사를 주시하며 그저 간간이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다. 기묘한 분위기였으나, 몽롱한 로만드로가 알아챌 리 없었다.
타닥타닥!
히이힝!
마차는 멈춤 없이 시원하게 내달렸다. 콧노래를 연신 흥얼거리던 로만드로는 저 멀리, 사법부의 건물이 보이는 걸 확인했다. 중앙의 재판을 모두 담당하는 곳이라, 그 위용이 엄청났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네. 대기하시게.”
끼이익!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한산했다. 거대한 계단을 오르내리는 자가 몇 없어서 그런 것일까? 대리석 바닥과 구둣발이 부딪힐 때마다 유독 또각거리는 소리가 컸다. 로만드로는 익숙하게 길을 찾아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
그런데 어찌, 고발장을 접수하는 이곳에는 사람들이 이리 많나? 게다가…….
‘방금 나 오니까 다들 대화 멈춘 거 맞지?’
로만드로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담당 관리인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업무이십니까?”
“마, 마법부에서 왔네. 고발장을 접수하러.”
“아, 그러십니까? 잠시만요. 보시다시피 대기 인원이 많아서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으응. 그러지.”
그는 고발장을 품에 꼭 껴안은 채 소파 구석에 엉덩이를 걸쳤다. 시아오시 역시 그의 옆을 단단히 지켰다. 작게 수군대는 소리가 사위에서 들려왔다. 로만드로는 흰자로 시아오시에게 눈짓하며 속삭였다.
“뭔가, 좀, 그렇지?”
“…….”
“쩝.”
두 마법사 역시 시아오시와 로만드로 옆에 착석했다. 째깍째깍, 로만드로는 회중시계를 꺼내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대기 인원들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아무도 일을 보려 하지 않았으며, 직원 역시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스윽.
참지 못한 로만드로가 항의하기 위해 일어서자, 안쪽에서 새로운 담당 직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마법부에서 오셨다고요?”
“그렇네만.”
“고발장 주시면 됩니다.”
두 손을 내밀며 저에게 달라 요청하는 담당 직원. 로만드로는 고발장을 건네주려다가, 멈칫거리고 다시 회수했다.
“그 전에 자네 신분증 좀 보여주게. 그리고 여기 담당 책임자가 에릭세 아닌가? 에릭세에게 직접 주겠네.”
“에릭세 님은 아직 안 나오셨는데요.”
“어째서?”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재차 재촉하자, 로만드로는 아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