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19
제219화. 일보후퇴
전날, 마리브의 처형식이 거행되었던 저녁.
딜라이나는 드레스 단장을 새로이 하고 응접실 문에 섰다. 평소보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장신구가 그녀의 위축된 기세를 조금이나마 가려주는 듯했다.
시종들은 문 앞에 선 딜라이나를 힐끔거렸다.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대신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딜라이나는 결연하게 문만 바라봤다. 어찌 들지 않으시는지, 아랫것들은 알 도리가 없다.
‘이제부터 진짜로다.’
마리브의 죽음은 하나의 시사가 아니었다. 아군과 적, 가릴 것 없이 황궁의 모두가 목적하는 교차점이었다. 그걸 지나왔으니, 이제는 각자 갈 길을 떠날 수밖에.
목적지는 단 하나, 황좌.
먼저 도착하는 자가 승리하기에, 조금의 틈과 방심은 치명적일 것이라.
“어머니.”
그녀의 곁에 함께하는 아르센. 어미가 긴장한 것을 알아채고 나지막이 달래주었다. 딜라이나는 이내 마음을 추스른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기별하라.”
“딜라이나 님 드십니다!”
“딜라이나 님 드십니다!”
끼이익.
상대적으로 어두운 복도, 문이 조금씩 열리자 대신들의 잡담 소리는 잦아들었으며, 대신 조명만이 환하게 새어 나왔다. 딜라이나는 한껏 딱딱한 표정으로 한 걸음 나섰다.
“딜라이나 님.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르센 저하도 함께이시군요. 영광입니다.”
정장 입은 자들이 응접실 곳곳에 자유로이 흩어 앉아있었다. 사위를 어우르던 시선이 모두 딜라이나와 아르센에게 쏟아졌다. 차기 황제이시라, 미래 바리엘의 주인을 만난 것 같이 충성스러운 눈빛들이다.
딜라이나는 턱을 빳빳이 들고 그들 가운데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두툼한 드레스가 풀럭이며 아름다운 실루엣을 만들었다.
“아까 뵈었던 분들도 있고, 아닌 분들도 있네요.”
딜라이나는 대신들을 쭉 돌아보았다. 그러자 가까이 앉아있던 하이만 공작이 몇몇을 가까이 다가오게 하여 소개했다.
“이자는 하이만 가에서 사업을 돕고 있습니다. 딜라이나 님과 아르센 저하께 도움이 될 것 같아 입궁을 명하였지요.”
하이만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중추 귀족들, 각 부서의 고위 관료, 그리고 알아준다는 세간의 재력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딜라이나를, 정확히는 아르센을 위하여.
“이안 경이 하이만에 고발장을 제시할 거란 소문이 있습니다. 건너 들어보니, 이미 준비는 다 끝났고 마리브 전 황자의 재판만 기다리고 있었다더군요.”
건너 들었다고는 하나, 누구도 믿는 자가 없었다. 하이만의 재화는 어디에나 스며드는 물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또한, 인식하지 못하고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은 것이었으니까. 마법부에도 분명 사람을 심어두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짐작이 가능했다.
“고발장 내용은요?”
“아시다시피, 게일 저하와의 결탁으로 인한 내란죄 혐의가 중심이겠지요. 그 밖에도 자잘한 것들이 있겠으나,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공작님. 체투르 구역의 소란도 포함됩니까?”
“음, 이안 경은 내가 거기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조그만 것이라도 걸고넘어지려 할 것이오.”
하이만은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며, 직접 시인하지는 않았다. 욕심으로 얽힌 자들의 결속은 항시 경계해야 하는 법. 그가 사람을 심어두었듯, 이안 역시 그리했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사법부에는 인재가 별로 없어서…….”
누군가 그리 중얼거렸다. 사법부 중에 아르센의 세력이 별로 없다는 뜻이었다. 여기 모인 자 중 사법부 소속이 몇 있긴 하지만, 고발장을 끊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 있는 자는 없었다. 법만큼은 공명정대의 영역이라, 황궁에서도 심사숙고하여 담당자를 임명하곤 했다.
“접수되면 대회의가 소집되고, 바로 재판 일정이 잡히지 않습니까? 며칠 있으면 아르센 저하의 마력확인식이 있는데, 그때까지 좀 막아보는 게 어떨까요?”
“동의합니다. 마법부가 저하의 마력을 공식으로 인정하면, 거리낄 게 없지요. 사법부 측에 압박을 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재판까지 갈 것도 없어요. 과반수만 달하면 대회의에서 잘라 버릴 수 있습니다.”
아르센이 마법사로 거듭나기만 한다면, 차기 황제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진의 곁에 붙어있는 미련한 종자들도 떨어져 나갈 것이요, 사법부 장관은 내년 연임을 위하여 아르센 쪽으로 고개를 기울 것이리라.
귀족들이 아르센을 돌아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하, 몸 상태는 좀 괜찮으시지요?”
“게일 황자에게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걱정했습니다.”
사실, 소문으로는 무성하게 들었으나 직접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마법부가 마력확인식을 준비한다는 것만이, 뜬구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였다.
참으로 기이하지 않나? 아르센과 대립하는 자들이 아르센의 입지를 받치고 있다는 게.
“저하, 혹 실례가 안 된다면 마력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황가의 첫 축복입니다. 그만한 영광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한 귀족이 혓바닥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간청해 댔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저리 나서주니 반색하는 기색들이다.
직접 본다면, 더더욱 확신하여 아르센의 편에 설 수 있을 터. 그들은 은근히 침묵하며 아르센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 역시 영광을 허락하고 싶으나, 아시다시피 마력확인식은 그 힘에 따라 신탁의 빛이 아름답게 빛나오. 인생에 있어서 한 번뿐인 그날을 위하여, 내 몸가짐을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해해 주게.”
“…물론입니다. 저하.”
명백한 거절이다. 하지만 어쩔 방도가 없는 것도 사실인지라, 귀족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숙여댔다. 그러자 행정부 소속의 관료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참,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카르보 신전에서 연락이 왔다 하는데요. 신탁의 빛이 무사히 출발하였고, 새로운 신탁 역시 내려왔다 합니다.”
새로운 신탁!
처음 듣는 자들은 놀라서 술렁거렸고, 아르센의 동공 역시 커졌다. 아이가 딜라이나를 쳐다보자, 그녀 역시 몰랐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간이 친정이건만 그걸 어찌 몰랐나?’
아이의 미간이 짜증으로 인해 찌푸려졌다. 그가 진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신탁 덕분이지 않나. 그 말은, 진 역시 신탁으로 인해 정세를 끌어당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르센이 우려하는 것도 모르고, 행정부 직원은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 저하보고 운명을 거스를 순 없으니, 스스로 죽으라 하였답니다. 하하하!”
“오호라! 사실이오? 그것참 오랜만에 희소식이로군.”
“제가 직접 쪽지를 읽고 왔습니다. 역시 건국부터 함께한 카르보예요. 핏줄에 연연하지 않고, 진리만을 전하지 않습니까?”
하늘이 돕고, 땅이 돕는 거사다. 응접실 모두가 안도의 탄성을 토해내는 동안, 딜라이나와 아르센만이 침묵을 지켜냈다.
“딜라이나 님?”
하이만 공작의 부름에 딜라이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를 떠나긴 했지만, 이제 고작 열 살 난 아이에게 대체 그 무슨 신탁이란 말인가!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딜라이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정반대의 살벌한 축복이었다.
“신께서 바리엘을 지켜보고 계시나 봅니다.”
반면 아르센은 표정을 풀지 않고 팔짱 낀 손을 까딱거리기만 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여, 하이만은 조용히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진에게 내려온 게 맞는가?”
“예? 아, 예예. 저주받은 자에게 온 것이고, 운명에 관한 언급이 있는 터라 모두가 진이라 여겼습니다.”
“그래?”
“왜 그러시는지요?”
“아니다. 진이라 여기는 게 맞지. 그리해야 하고.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고발장 문제를 논의하는 게 좋겠는데. 내 생각에는, 아까 제안한 대로 조금이나마 시간을 끌어 마력확인식 이후에 대회의가 소집되도록 하는 게 나을 것 같소. 나흘 정도이니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네만.”
마력확인식이 문제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었다. 아르센의 의견에 몇몇이 동조하여 덧붙였다.
“솔직히, 고발장 접수 도장만 안 찍히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인장을 찍거나, 봉을 치기 전까지는 의결된 것이 아니니 몸을 던져가며 막아서는 것이다. 무력투쟁보다는 시위에 가깝다 보는 게 맞겠다.
“그렇긴 한데, 예전과는 다릅니다. 현재 황궁 분위기도 좀 날카롭고요.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책잡히지 않는 선에서 넘겨야 합니다.”
“내란죄에 관한 고발장 아닙니까. 혹여 꼬투리로 잡혔다간 연루되어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거기 담당자가 에릭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흐음. 에릭세라. 어디 사는 자이지요?”
“아아, 그러면 제가 맡겠습니다. 제 사촌 중에 적당한 자가 있어요. 사람 구하는 것쯤은 쉽지요.”
대의를 이루는데 대로와 샛길의 구분이 무엇 필요한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아설 수 있다면 막아서는 게 중요했다. 귀족 사회에서 구르고, 사업하며 구르고, 정치질에서 구르는 자들인지라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좋습니다. 그러면 내일부터, 아니지. 자정이 지나면서부터 바로 시작하지요.”
“딜라이나 님.”
시곗바늘이 곧 있으면 다음 날을 알릴 것이다. 하이만은 얼추 정리되는 상황을 수습하며, 딜라이나를 불렀다. 그녀는 와인 잔을 들어 올렸고, 이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따라서 잔을 집었다.
“바리엘의 영광을 위하여.”
“바리엘의 영광을 위하여.”
데엥- 뎅!
그들은 동시에 와인을 머금었다. 번들거리는 입가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 * *
“왜 그러십니까?”
“신분증을 보여달라, 내 요청하지 않았소?”
로만드로는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시중의 이름 모를 전당포도 아니건만, 어찌 이리 위화감이 드나? 여기는 황궁이었다. 황제의 존엄한 명이 깃드는, 바리엘의 법이 집행되는 사법부!
다들 이상한 눈치로 로만드로를 빤히 쳐다봤다. 개중에는 동행한 마법사 둘도 섞여 있었다.
“신분증, 여기 있습니다.”
직원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주었다. 이리저리 보아도 틀림없는 황궁 직원 신분증이다. 그녀는 허리춤에 팔짱을 끼며 불쾌하다는 듯 로만드로를 나무랐다.
“바쁜 거 안 보이십니까? 마법부에서 오셨다 하여 편의를 봐 드리려 한 것인데, 너무 하십니다.”
“…….”
로만드로는 속으로 앓으며 직원에게 신분증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걸 되받고도 손을 내리지 않았다.
“고발장, 접수 안 하세요?”
“로만드로 님. 왜 그러십니까?”
“피곤한데 어서 처리하고 가시지요.”
옆에서 가만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들이 로만드로를 재촉했다. 하품까지 쩌억 해대는 것이, 지금 이 상황을 예민하게 느끼는 건 그밖에 없다고 돌려 말하는 것 같다. 로만드로는 쏟아지는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로 주춤거렸다.
“에릭세는 언제 오나?”
“아침에 마차 사고를 당했다고 연락 왔습니다.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그래? 그러면 내가 나중에 다시 옴세.”
“로만드로 님!”
마법사 한 명이 그를 잡자, 시아오시가 반사적으로 쳐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 역시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어이없어하는 마법사를 무시하며, 시아오시가 로만드로에게 속삭였다.
“검, 꺼낼까요?”
“미쳤나? 절대, 절대 안 되네.”
그저 수상함만 느꼈을 뿐, 사실 위협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시아오시가 검을 꺼내 들면 오히려 이쪽만 이상해질 것이라.
로만드로는 미친 듯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시아오시를 말렸다. 다행히, 그는 말귀 못 알아 처먹는 베릭과 다른 자였다.
“그러면 어찌할까요?”
로만드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문고리를 잡았다. 이안이 시아오시를 붙여주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짐작한 것 아닐까? 무엇이 되었든, 다시 마법부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이다.
로만드로는 이를 꽉 깨물며 복화술 하듯 속닥거렸다.
“튀튀, 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