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2
제22화. 교사
“부탁드릴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안의 말에 교사가 멈칫거렸다. 자신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다. 서자라고는 하나 볼모 신분인 이안보다 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리라.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대체 뭘 기대할 수 있나?
“어떤……?”
“다음 주중으로 아버님과 면담하세요. 어떤 내용이든지 상관없지만, 장소는 집무실이 아닌 정원에서. 그리고 시간은 30분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그사이 몰래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아주 넉넉하게 말이다. 인장을 찍어내야 했으니 왁스 녹이는 시간까지 포함이었다.
교사는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몰라도 됩니다. 자세한 사정은.”
“그, 그것만 하면 몰린 경과의 관계를 비밀로 해주시는 겁니까?”
“물론. 집사의 방을 털려고 한 것까지.”
“아닙니다! 저, 정말 오해입니다!”
교사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이미 들킬 대로 들킨 상황에서,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속내가 따로 있었나 보다.
“그럼?”
“귀물을 훔치려 한 것이 아니라-”
교사가 입을 벙긋거렸다. 목구멍까지 고백이 올라왔지만, 차마 못 뱉는 듯싶었다. 이안이 채근하는 눈빛을 보내자 어쩔 수 없이 한숨과 함께 토했다.
“통행증이 필요했습니다.”
“통행증?”
“브라츠 영지 최전선은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저로선 대사막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인지라 꼭 필요했습니다. 특히 3번 탑과 4번 탑 사이의 관측이 필요한데, 백작님은 안전상의 이유로 허가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사가 가진 통행증이라면?
데르가가 직접 찍어낸 것이라 제한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작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집사가 대리인 역까지 해내야 하니까. 교사는 연구의 완성도를 위해 집사의 통행증을 훔치려 한 것이다.
“그래요?”
이안은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했다. 이토록 한 가지 주제에 미친 인간들을 많이 봐왔다. 삶이 꺾이는 한이 있어도 연구 의지가 꺾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
“연구는 어디까지 되었습니까?”
“이곳에 온 지 벌써 오랜 시간 지났습니다. 브라츠 쪽의 기후 변화는 거의 다 측정하였고, 이제 블라스터로 떠나서 다시금 연구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논문 주제가 였다. 당연히 그쪽으로 가서 또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요? 그러면 하나만 물읍시다.”
“어떤 것을…….”
“늦봄에는 내가 이곳을 떠나 대사막, 천려족의 주둔지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의 기후를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사막이라고 해서 사시사철 밤낮으로 덥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극한으로 치닫는 기온 가운데 모래 폭풍은 또 얼마나 불어대는가.
이안의 물음에 교사가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정밀하게는 어렵습니다. 시간도 좀 걸리고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떠나기까지만 알면 됩니다. 사막 지도도 있을 것 같은데.”
“10년 전 것이지만 있긴 있습니다.”
“따로 준비해 주었으면 싶네요. 그렇다면 통행증을 구해다 드리지요.”
“네? 통행증을요?”
통행증에는 인장이 필수적이었으니 몰린 경 것을 찍어주는 김에 하나 더 찍으면 될 일이다.
이안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교사가 눈을 끔벅였다. 듣기로는 들었는데, 이해가 잘 안 되나 보다.
“어떻습니까? 사막의 모든 것을 내게 알려주면 나 또한 선생님께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그렇게만 해주시면 감사하지요.”
이안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그럼 거래를 맺읍시다.”
교사는 아이의 손을 빤히 쳐다봤다.
잡아도 될까? 또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이안의 목숨은 데르가의 손아귀 안에 있는데, 괜히 이쪽에 협력하였다간 추방형을 참수형으로 갚게 되는 게 아닐까? 학자인지라 이런 쪽으로는 영 알 길이 없었다.
“저는 저대로 살려는 것이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통행증을 쓰는 즉시 국경을 넘으실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다. 문제가 생긴다고 한들, 대사막을 횡단하고 있을 테니까.
교사는 결연에 찬 눈빛으로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중년과 아이의 거래가 이토록 비장할 줄이야. 이안은 방싯 웃으며 책상 쪽을 가리켰다.
“그러면 선생님. 자세한 얘기는 공부하면서 해볼까요?”
* * *
교사가 데르가를 불러낼 구실은 정해졌다.
갑작스럽게 가정교사를 관두게 되었다는 것. 어차피 통행증을 받는 즉시 브라츠를 떠날 것이기에, 영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안은 젖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잘 챙겨 넣으며 해나를 돌아봤다. 두꺼운 가죽 장갑 역시 필수다.
“해나. 부탁한 것은?”
“여기 있습니다.”
속닥속닥, 베릭 뿐이었으나 굉장히 조심하는 목소리였다. 해나는 손에 쏙 들어가는 나무 열쇠를 꺼냈다. 하나는 집무실용이었으며 하나는 서랍금고용이었다.
“목수 아저씨께는 다음 주 중으로 값을 치른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늦어져도 술 한 병이면 좋다 하고 넘어가시겠지만요.”
해나는 그날 이후, 다시금 집사의 방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진흙을 이용해 열쇠 본을 땄고, 부도체인 나무로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겉면에는 고무액까지 발려있었다.
“수고 많았어.”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끼익.
해나가 나가고, 이안은 시계를 확인했다. 교사와 약속한 시각이 거의 다 되었다. 데르가의 집무실이 비어있는 동안, 신속하게 빠르게 인장 두 개를 찍어야 했다.
“준비되었지?”
“하아.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타닥타닥!
베릭은 툴툴대면서도 이안의 뒤로 따라붙었다. 기척 줄이는 솜씨가 제법이다. 둘은 별채를 벗어나 본채 위층까지 들어서는 동안,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돌아 돌아온 것도 있지만 해나가 사용인들 일정을 알려준 덕이었다.
“저기 있다.”
창문 너머로 익숙한 남자 뒤통수가 보였다. 앞장서서 걷는 데르가와 그 옆의 교사. 집사까지 아주 훌륭하게 모여있었다. 교사가 쩔쩔대며 뭔가를 말하자, 데르가는 단번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이제 넌 여기서 단단히 지켜. 내가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올려보내면 안 돼.”
지이잉-
그리고 그에게 흘려보내는 마력. 이안의 금빛 눈동자가 빛남과 동시에 머리칼이 휘날렸다. 베릭은 빠르게 도는 피를 느끼며 웃음을 흘렸다.
“누가 오면 좋겠다는 표정이군.”
“그렇게 보여? 잘 봤네.”
“중요한 일이다. 베릭. 사고 치면 감당할 수 없어.”
“어차피 들통나면 나 잘라먹을 거잖아. 말은.”
베릭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이 틀어져서 누군가가 접근한다면, 그는 소란을 일으켜 시선을 집중시키는 역할이었다. 예상 시나리오로는 아래층 첼의 방에서 금화를 훔치려 했다는 게 자연스럽겠지.
“금방 나오겠다.”
그러한 이유로, 이안은 베릭의 몸에 한계치의 마력을 밀어 넣었다. 쉽게 도망갈 수 있게, 혹은 채찍을 맞더라도 이전보다 회복이 빠르게끔.
타닥타닥!
끼익.
이안은 준비한 열쇠로 집무실을 따고 들어갔다. 최근 거의 오지 못했건만, 달라진 게 없다.
타악!
그는 망설임 없이 데르가의 책상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제일 큰 서랍을 열어 안쪽을 살폈다.
‘있다.’
틈에 난 홈. 손만 뻗으면 바로 다이아몬드를 밀어 넣을 수 있는 위치에 구멍이 나 있었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준비한 나무 열쇠를 꺼냈다.
지이잉-
그리고 혹시 몰라 몸속 마력을 죄 끌어모았다. 고무를 바른 나무라도 전압이 높으면 위험할 수 있지 않은가. 손끝으로 다른 에너지가 들어온다면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칠 요령이었다. 서자의 몸으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달깍-
구멍 안쪽으로 열쇠가 들어가는 느낌이 깔끔했다. 쭉 밀어 넣자 비밀 서랍이 하나 더 나타났다.
“아.”
안쪽에는 인장과 마력 브로치 그리고 금괴 두 개와 낡은 편지들 따위가 놓여있었다. 이안은 무릎을 꿇고서 안쪽을 살폈다.
초 위에 왁스 거치대를 올렸다. 숟가락이 달구어지는 동안, 이안은 편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이건 천려족과 주고받은 서신인가?’
젠장맞게도 모두 천려족 언어로 쓰여 있어 해독이 불가했다. 띄엄띄엄 아는 단어가 있긴 하지만 너무 단편적이다.
‘다음… 여자 왕… 이후에?’
대체 무슨 소리인지 원! 다른 외국어라면 몰라도 변방의 야만족 언어까지는 이안의 능력 밖이었다. 대신 그는 나중에라도 알아볼 셈으로 양피지에 단어를 옮겨 적었다.
스윽스윽!
숟가락이 달구어졌는지, 왁스 덩어리가 액체로 녹아내렸다. 이안은 왁스를 붓고서 인장을 찍었다.
콰앙! 쾅!
중앙으로 보낼 서신에 한 번, 그리고 교사에게 줄 통행허가서에 한 번. 그렇게 다 찍고 나서는 능숙하게 왁스 뒤처리를 진행했다. 굳기 전에 젖은 면으로 닦아내는 게 포인트였다.
치이익.
달구어진 쇠숟가락이 희미한 연기를 내며 급속도로 식어갔다. 돌아온 데르가가 열감을 느끼면 안 됐기에, 이안은 입김을 불어가며 쇠를 식혔다.
“됐다.”
모든 정리가 순조로웠다. 물건들을 원위치시키고, 인장이 잘 찍혔는지까지 확인을 마쳤다. 이제 자리를 뜨면 되는데…….
덜컹-
어디선가 들리는 인기척.
이안의 몸이 저절로 굳어버렸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좀 더 시끄럽고 경박해야 했을 것이다. 베릭이 소란을 일으켰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장소는 한 곳…….
“백작님. 계십니까?”
집무실에 달린 보좌관의 사무실이다. 이안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커튼 뒤로 숨어들었다. 어째서 저자가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데르가 없이 혼자 방에 남는 경우가 없을 것인데?
“백작님?”
끼익.
안쪽 작은 사무실 문이 열리며 부스스한 보좌관의 모습이 보였다. 암막 커튼이라 다행이었다. 아마 쉬폰이었으면 바로 들켰을지 모른다.
“이상하다. 방금 소리가 들렸는데…….”
방금 일어난 것 같이 퉁퉁 부은 눈. 어제 야근 후 여기서 곯아떨어졌나 보군, 하필이면.
“……?”
보좌관은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꼈는지, 이안이 숨어있는 커튼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고 다가왔다.
바스락.
이안의 손에 쥔 양피지 종이는 너무 얇아서, 숨 쉬는 행동에도 소리를 내버렸다. 이는 보좌관을 더욱 긴장하게 했고, 이안을 곤란하게 했다.
“거기 누구 있소?”
이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쨍한 하늘. 햇빛이 화사하게 쏟아졌다. 이상하게 모든 게 고요했다. 그의 습관이자 태도였다.
긴장 대신에 평정을. 걱정 대신에 행동을.
실수는 수습할 수 있지만, 실패는 수습할 수 없다.
지이잉-
“으어어억!”
이안은 보좌관이 커튼을 잡자마자, 마력을 때려 박았다. 응축되었던 바람이 터지듯 주위로 에너지가 휘날렸다.
동시에 보좌관은 코피를 터트리며 뒤로 쓰러졌고, 놓친 커튼이 뒤로 흩날렸지만, 그곳에 누가 서 있는지 보지 못했다.
쿠웅!
뒤로 엎어진 그는 흰자만 보이며 널브러졌다. 이안은 커튼을 잘 갈무리하고,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끝?”
계단에 앉아 있던 베릭이 이안을 보고서 벌떡 일어섰다. 이안은 고개만 짧게 주억거리고 앞장서서 계단을 뛰쳐 내려갔다. 창문으로는 여전히 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힐끗, 교사가 위를 쳐다보고서 이안과 눈을 맞췄다.
담담한 아이의 표정이, 모든 게 잘 되었음을 알려주는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