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24
제224화. D-3
“마법부랑 사법부랑 한바탕했다면서?”
“한바탕? 무슨 한바탕?”
일몰이 내려앉는 게일의 처소. 대쪽같이 앞만 바라보던 병사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교대 시간이 다 와 간다는 걸 깨닫자, 참을 수 없이 지루해진 탓이었다. 그는 멀리서 들리는 인기척을 느끼며 대꾸했다.
“난리가 났대. 마법사들 난투하는 건 처음 본다고, 다들 말릴 생각도 못 했다 하더라. 도장인가 뭔가, 그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문제없는 거래?”
“그러니까 사법부 직원들이 업무 시간 지나자마자 퇴근했겠지? 진짜 가만 보면 황궁도 참 웃겨. 너 죽네 나 죽네 싸우다가 시간 됐다고 가는 건 또 뭐람.”
병사들은 킬킬거리다가 저 멀리서 들어오는 마차를 발견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깃대가 마법부의 것이다. 그리고 보통, 게일의 처소에 들어오는 마법사는 치유 마법사 아니면 이안이었으니.
끼이익!
히이이잉!
“이안 님. 어서 오십시오.”
“수고가 많네. 문제없나?”
“네. 이상 없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까딱이고서 홀로 계단을 올랐다. 대부분 로만드로를 대동하곤 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다.
이안은 가죽 장갑을 가슴팍에 걸쳐 넣은 다음, 익숙하게 궁을 가로질렀다.
타닥타닥.
해가 점점 기운다. 짙게 늘어졌던 노을은 주황빛을 넘어 붉은 기운을 담아내고 있었다. 따스한 바람. 아득한 그림자. 통창으로 쏟아지는 어둠의 시작. 이안과 그를 따르는 마법사들의 발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렸다.
“아, 이안 님.”
“이안 님이네. 어쩐 일이십니까?”
정원 잔디밭에 누워있던 천려의 전사들이 이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하나같이 풀 잎사귀를 질겅이며 푸르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이안은 그저 작은 웃음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스윽.
“무슨 일 있으신가? 로만드로 님은 어딜 가고?”
“그러게. 근데, 보면 볼수록 필리아 님 닮았지? 이래서 핏줄이 중요하다니까. 네르사른 님 아이가 생긴다면 무조건 필리아 님 닮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어.”
전사들은 별일 아니라 치부하고 다시 잔디에 벌러덩 누웠다. 언제 사막으로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만한 호사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끼이익.
“이안 님. 안녕하십니까.”
“안에 게일 저하 계시는가?”
“예. 지금 식사 중이십니다.”
“문을 열어라.”
이안의 명령에 침실로 통하는 중문이 천천히 젖혀졌다.
침대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게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놀랍게도, 그의 곁에는 필리아와 네르사른이 함께였다.
“어머, 이안!”
“어머니도 함께셨군요.”
“아, 이건, 그게…….”
필리아가 난색을 보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혹여 주제넘은 짓이었다고 책잡힐까 봐 당황한 것이다.
게일은 그런 필리아를 힐끔 본 다음, 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타악.
“혼자 하는 식사가 지루하여 내 동석을 요청했다. 그런데 앞을 지키고 선 병사가 영 서툴고 무례하군. 식사 중인 걸 알리지도 않고 손님을 들이다니.”
하지만 말과 달리, 게일의 나이프는 이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식사 중인 걸 알고 들어온 너의 행동이 참으로 무례하다는 항의였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눈짓으로 가볍게 무시한 다음, 필리아에게 부탁했다.
“잠시 게일 저하와 둘만 있게 해주십시오.”
“아, 응응. 그래.”
필리아가 허둥지둥 자리를 정리하여 네르사른과 함께 옆 방으로 사라졌다. 게일은 그런 이안을 위아래로 훑은 다음, 아무렇지 않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대가 내 식사 시중을 쫓아냈으니, 대신하여 앉든가. 참고로 나는 떠먹여 주는 것을 좋아하네.”
능글맞게 장난치는 꼴을 보아, 좀 살 만한가 싶다.
마법사들은 이안의 앞에 작은 유리병을 놓아주고, 마찬가지로 자리를 떠났다. 게일이 연신 식사를 이으며 그걸 내려다봤다. 이안이 말하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감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디저트는 안 먹는데.”
죽음을 가져다주는 물약이다. 마법의 힘으로, 이안에게 온전히 제 숨을 내어주게 될 터. 이제 정말 자신의 인생 마지막 장이 올라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곧 있으면 소문이 돌 것입니다.”
“소문. 소문이라.”
달그락달그락.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게일은 침묵하며 머리를 굴렸고, 이내 정답에 가까운 답을 내놓았다.
“내가 망명이라도 한다는 소문인가?”
“…그렇습니다.”
“어이없군. 대체 누구 허락으로 황자의 이름을 갖다 쓰는 건가? 그리 안 봤는데 경솔한 면이 있어.”
이안은 내심 놀랐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그 역시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기에.
“저하는 그저 지금처럼만 계시면 됩니다.”
“아하. 그렇겠지. 지금처럼 가만히 있다가, 재판에 서서 하이만의 부정을 증명하고, 마리브의 뒤를 따르면 되는 것이라. 중간에 수틀리면 문제없이 숨을 거두면 되고.”
콰앙!
게일은 테이블을 세차게 내려치더니, 나이프로 이안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마음 같아서는 스테이크 썰 듯 저 흰 목덜미를 갈라 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죽음을 기다리는 몸. 이깟 물약 먹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무어라? 망명? 내가 바리엘을 버리고 외국으로 간다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런 모욕이 또 어디 있나? 자신은 고국을 버리면서까지 목숨을 구걸하는 비겁자가 아니었다. 게일이 이를 바득거렸으나,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약을 들이밀었다.
“그저 소문일 뿐입니다. 언제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소문이요.”
“내 명예도 함께 사라지겠군.”
“송구하오나, 저하. 내란이 일어나면서부터 저하의 명예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와장창! 째앵!
게일이 테이블의 그릇을 죄다 엎어버렸다.
믿고 싶지 않았으나, 현실이었다. 그는 궁 밖에 한 걸음도 못 나가는 신세요, 나간다 한들 하이만의 암살로 인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터.
두 사람은 싸늘한 시선으로 서로 노려봤다.
“가만히 계시어 소란 피우지 마십시오. 그리한다면 적어도 마리브처럼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황가의 성을 박탈당하고, 역사에서 지워지며, 귀족들의 박수를 받으며 대롱대롱 매달리는 최후. 이안은 달래듯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의 나무 또한 제 이름을 걸고 지켜드리지요. 이 모든 것은 제 배려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게일에게 약속했던 걸 다시금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안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물약 따위 쥐도 새도 모르게 먹일 수 있었으리라.
게일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약을 낚아챘다.
“하. 배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물약을 단숨에 들이 삼켰다. 혀끝을 감싸는 뭉근하고 알싸한 맛. 이것이 바로 죽음이로다, 게일은 입가를 거칠게 닦으며 유리병을 벽에 내던졌다.
째앵!
“그래. 그대가 원하는 내 배려는 이것이겠군.”
“서로 간의 이해가 극에 달하니, 이만한 협치가 또 없습니다.”
“네놈도 천국 가기는 글렀다.”
“바리엘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어디든.”
이안이 우아하게 대꾸하자, 게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뜨거운 기운이 몸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제 숨은 온전히 저놈에게 달린 것이라. 가슴이 뻐근해지는 와중, 밖에서 병사들이 기별했다.
“이안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모두 물러나라.”
“아, 예예. 알겠습니다.”
요란한 소란에 혹여 문제가 있는가 싶은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저를 걱정해 주는 자는 아무도 없구나. 게일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자,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하면 볼일은 다 보았다.
“잠시 열 오르는 것 외에는 일상생활에 문제없습니다. 그저 마셨다는 사실 자체를 잊으셔도 좋아요.”
“나는 언제 죽나?”
“…신께서 보시기에 가장 완벽한 때가 있을 겁니다.”
“내가 며칠간 고민해 보았거든.”
뜬금없는 서문. 이안은 무시할까 하다가 멈춰서서 게일을 돌아봤다. 듣는 이가 없으면 뱉어진 말은 소리로만 존재하여 흩어진다. 죽음을 앞둔 자의 마지막 한탄이니, 그저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웨슬리의 저주를 처음 받았을 때.”
“웨슬리의 저주요?”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사랑받지 못할 거라니, 뭐니, 이전과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 여겼어.”
계속 그리해 왔으니까. 달콤함을 속삭이지만, 언제나 철저한 이해관계 속에서나 그러했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웨슬리도 게일을 만남으로 인해 얻었던 게 무수히 많았다.
그런 게 과연 진정한 사랑인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은데, 무엇이 저주이고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게일은 분명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내 처지를 곱씹으니 알겠더라고.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란 말. 그건 바리엘까지 포함하는 거였어.”
게일 자신은 바리엘에게 열렬한 구애를 했으나, 결국 선택받지 못했고, 사랑받지 못했다. 이안은 팔짱을 끼고서 그를 내려다봤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마리브와 제법 비슷한 말을 하지 않나.
“기록으로 남겨드릴까요? 게일 저하께서 바리엘에게 실연당하였다고.”
“나가 죽었으면 좋겠군. 이안.”
“죽지는 못해도, 나가는 드리죠. 즐기십시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게일은 키득거리며 가볍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안이 문을 나서자, 앞에 바짝 붙어 있던 필리아와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소란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이, 이안! 괜찮니?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길래.”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바닥 청소는 해야 할 것이에요. 시종을 안으로 들여라.”
“네. 알겠습니다!”
“…볼의 붓기는 많이 가라앉았군요. 다행입니다.”
이안은 슬쩍 어미의 볼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센에게 후려 갈겨진 탓에 생채기가 남아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 보일 정도로 아물어있었다.
“저기, 이안. 시간이 된다면 정원을 잠시 걷지 않을래? 네르사른 님과 함께 의논할 것이 있어.”
“음, 네. 그러시죠.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직 밖에서 로만드로와 헤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제시간에 도장을 찍었으리라 믿고는 있다만,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무언갈 할 수 없지 않나. 시간이 애매하게 조금 남은 참이다.
“궁의 생활은 어떠십니까?”
“내게는 너무, 너무 과분해. 일생에 이런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단다. 하지만 그, 있지. 이제는 우리가 슬슬 돌아갈 날짜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안은 날짜를 가늠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들이 여기 온 지 꽤 많은 나날이 지났다. 주둔지를 둔 소수민족이, 기후도 맞지 않은 곳에서 여간 고생한 게 아니다. 이안은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네르사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원하신다면 마차와 함께 여정을 준비하겠습니다. 천려의 도움으로 황궁이 위기에서 벗어났으니, 이는 제 가슴에 깊이 새길 것입니다.”
“무슨 소리. 우리는 동맹입니다. 기쁨과 어려움, 모두 나눌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진실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이안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들자, 네르사른이 긴장한 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다. 네르사른은 아주 느릿하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 요청했다.
“떠나기 전, 이안 경과 함께 작은 약혼식을 열고 싶습니다. 히엘로로 돌아가면 결혼식을 따로 진행할 것이고요.”
“아.”
필리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졌다. 자식에게 허락을 요청하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이안은 짧게 탄성을 내지르고는 단박에 허락했다.
“물론입니다. 다만 지금은 일이 너무 많으니, 아르센 저하의 마력확인식 및 급한 일만 끝나면 그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준비하도록 하지요.”
“이안이? 준비를?”
“성심성의껏 하겠습니다.”
필리아는 너무 좋아서 발까지 동동 굴릴 참이었다. 네르사른도 한시름 놓았는지,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들이 정원에서 약혼식에 관한 얘기를 나눌 때였다. 마법사 한 명이 급히 달려오더니 이안에게 속삭였다.
“이안 님. 지금 카르보 신전 관련하여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나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