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27
제227화. 무언의 응답
“에잇! 지금 장난하나?”
고발장에 도장 찍고 복귀한 로만드로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웃었다. 참으로 발칙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살다 살다, 단어 조합부터가 미친 것 같다. 황자가 마물? 그것도 악마?
“푸하하! 아우, 증말. 밖에서는 그러지 말게. 황실모독죄로 잡혀가! 아무리 장관이라도 안 봐주지. 암암. 그러지 말고, 나 퇴근이나 시켜주게. 밤 되니까 어깨며 무릎이며 안 쑤시는 곳이 없어. 헤일 대장은 먼저 들여보냈고, 이것만 마무리하면 되네!”
짜자잔! 로만드로가 눈을 반짝이며 마무리 보고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안은 결재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차분하게 차만 홀짝이며 싱긋 웃을 뿐. 로만드로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세상에, 설마, 맙소사, 그럴 리가?”
“아르센, 마물 맞습니다.”
로만드로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충격으로 인해 목 뒤까지 뻣뻣해지는 기분이다. 혹여 누군가 들을까 봐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피기도 했다. 집무실에는 이안과 자신, 둘밖에 없었지만.
“정황상 확실합니다. 로버사이드가 마지막으로 처리했다던 악마의 이름이 아르센이더군요. 그자의 이름을 빌려 온 것 같습니다만.”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목소리가 다른 신탁부터 딜라이나의 방문까지 세세하게. 그럴수록 로만드로의 입은 점점 벌어졌고, 나중에는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까지 되었다.
“사, 사실이라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러고 있을 게 아닌데? 당장 달려가서 목을 쳐야 할 사안이네. 악마라니. 바리엘의 쇠퇴를 위하여 악마가 숨어들었다니!”
로만드로는 잇새로 조심스레 호들갑을 떨어댔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대제국 바리엘에 이런 망조라! 그가 난리를 피워대는 것과 달리, 이안은 차분하게 펜촉을 갈아 끼웠다.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없어요. 황궁에서 아르센의 입지가 절정을 내달리지 않습니까? 정황만으로는 그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진이 꾸었다는 로버사이드 꿈? 신관의 십 년 전 기억? 신의 목소리가 다르다는 모호한 주장? 모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것들이지 않나. 아르센을 끌어내리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그러면 어, 어째?”
퇴근이 문제가 아니다. 로만드로는 의자를 끌어와 이안 앞에 앉으며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함께 보았다. 황궁에서 보관 중인 신전과 신탁 그리고 마물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생각해 둔 바가 있긴 한데, 실현 가능한 것인지를 확인하려 합니다.”
“이걸 혼자 다 본다고?”
“시간이 많다면 그리해도 되겠지만,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딜라이나 님의 시종들이 마법사들과 출궁했거든요. 이르면 내일, 적어도 모레 안에는 이곳에 도착할 것인지라.”
이안이 웃으며 로만드로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같이 보자는 의미였다. 마법부에는 배신자가 섞여 있었으므로, 함부로 업무 지원을 요청할 수 없었다.
“알겠네. 뭘 보면 되겠는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아르센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것 같다 여겨지는 것들을 추려서 넘겨주시면 됩니다.”
로만드로가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루 더 못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래! 바리엘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희생할 만하다. 어쩐지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그는 군말 없이 이안 곁에 앉아 종이를 넘겨댔다.
사락.
“이안. 이것 좀 들어보시게. 이거, 아르센 저하에게도 해당하는 내용이지?”
-신체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마물이라면 선천적인 능력의 성장 및 후천적인 습득 역시 가능하다.
이안은 로만드로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았다. 위 내용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지금이 적기였다.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 버리는 게 맞으니까. 이안은 종이를 내려놓으려다 ‘후천적인 습득’에 주목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왜?”
“신년회 때 말입니다. 아르센이 제 마력구를 보고 굉장히 신기해했습니다. 만지기도 하였고요.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진 저하의 말씀에 따르면 처소에 가서도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법사의 마력을 그때 만져보고, 기억하여 따라 한 것일까? 이안은 손끝으로 종이를 톡톡 튕겨댔다. 조금씩, 아르센을 위한 무대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만드로 님?”
“그리 부르지 마시게. 난 자네가 그리 부를 때마다 이제 조금 무서워.”
“게일 저하를 이용한 소문 말입니다. 그걸 조금 세게 밀어봅시다. 아르센 저하의 정체가 알려지면 제가 예측한 정세에 균열이 생깁니다. 특히 하이만 측에서 어찌 나올지 당장 확신할 수 없지요. 그러니, 가능하다면 그 전에 가려내는 게 좋겠어요.”
“쉽지 않겠지만, 해보겠네.”
“좋습니다.”
둘은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로만드로는 이를 깍 깨물고 잠을 쫓아냈다. 황자 중 한 명이 악마다. 그것도 바리엘을 집어삼키기 위해 내려온! 절대 잠들 수는 없지. 사실 아직도 실감은 잘 안 나지만, 이안이 그렇다고 하니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지금껏 그의 선택이 틀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똑똑.
“비비안나입니다. 차가 식었을까 봐 다시 가져왔어요.”
“드시게.”
하지만 로만드로는 이미 전날에도 밤을 새웠다. 그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뒤로 훅, 넘어갈 때쯤이었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놀란 그가 몸을 크게 휘청이며 정자세를 찾았다.
끼이익.
비비안나가 쟁반을 들고 걱정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런 그녀의 옆구리에 딱 붙어서 함께 쳐다보는 진. 이안은 놀라서 펜을 내려놓았다. 새벽을 가르는 시각이거늘, 아직 안 잤단 말인가?
“저하?”
“혹여 방해일까 계속 앞에 계셨더라고요. 잠이 안 오시는 것 같아요. 저하는 숙면에 좋은 차를 함께 마시고… 로만드로 님! 얼굴이 어찌 그러십니까?”
“비비! 흐윽, 나 오늘 사법부 애들이랑 싸웠어.”
“어머머. 세상에.”
로만드로가 이때다 하고 달려가 비비의 품에 안기었다. 온갖 설움을 한번에 씻어내는 연인의 토닥임을 받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그리 부둥켜안고 있는 동안, 진은 우물쭈물하며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 경.”
이안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눈 밑이 벌겋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시아오시를 힐끗거리자,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최 잠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저하.”
“그것이, 조금…….”
“이리 오십시오.”
이안은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옆을 툭툭 두드렸다. 형제가 마물이라는 충격에 그런 것이겠지. 그것도 저와 똑 닮은 모습을 하고서 악마라.
이안의 부름에 진이 쪼르르 달려와 소파 옆에 앉았다. 가지런하던 손끝이 죄다 뜯겨있었다. 얼마나 불안한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이 저하의 심기를 어지럽힙니까?”
“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 하필이면 악마가 저하의 쌍둥이 형제인지?”
로만드로를 위로하던 비비안나가 멈칫거렸다. 저게 대체 무슨 말씀들일까? 그녀와 마찬가지로 시아오시 역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저가 들어도 될 일이 아니라 판단한 것이었다.
“되었다. 당장은 극비이긴 하다만, 며칠 내로 밝혀질 사실. 아르센 저하가 마물이다.”
“…예? 제가 지금 제대로, 예?”
“비비. 놀랐지? 나도 그래. 내가 설명해 줄게.”
로만드로는 둘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비비안나와 함께 창가로 다가갔다. 로만드로가 뭔가를 속닥일 때마다, 비비안나는 경악으로 몸서리를 떨어댔다. 그런 그녀를 대신하여, 시아오시가 찻잔에 물을 대신 따랐다.
쪼르륵.
향긋한 꽃차다. 진은 두 손으로 차를 받치더니,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저하. 악마가 어찌하여 저하의 쌍둥이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말입니다. 아주 명확합니다.”
“내게 카르보의 핏줄이 흐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저주받은 피와 또 다를 게 무엇 있나? 진이 울먹이자, 이안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리브도 아닌, 게일도 아닌, 저하께서 미래의 황제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은 차를 입에 댔다가 멈칫거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신께서 그러하듯 악마 역시 적재적소를 가늠하였을 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황자들보다 당연히 미래의 황제이신 저하와 가까이 있는 게 그 사악한 목적을 달성하기에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간 네가 힘들었던 것은 다가올 미래가 찬란할 것이라는 방증이라.
괴롭고, 억울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것들 모두, 완벽하게 정해진 미래를 가리키는 이정표와 같았다. 이안은 진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저하의 운명은 바리엘과 함께하고 있어요. 악마가 파고들어도 좋다 판단할 정도로, 아주 가까이.”
진이 눈물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찌 차오르는 감정을 막을 수 있겠는가. 아이가 눈물을 터트리자, 이안은 웃음을 터트리며 닦아주었다.
“울지 마십시오. 저하.”
“…안 울어.”
“…책이라도 읽어드릴까요? 를 제가 빌려와서, 마땅히 볼 게 없으셨겠군요. 죄송합니다. 침대로 가시지요.”
이안의 제안에 진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아르센은 자신이 악마인 걸 자각하고 있을까? 스스로 각성하였다면, 어머니는? 어머니는 정말 어쩌면 좋을까?
‘로버사이드 님께 물어봐야겠다.’
동화책을 읽고 잠들면, 로버사이드 님이 분명 저를 보러오실 것이라. 어머니를 구하는 방도를 여쭈어야지. 진은 그리 다짐하며 침실로 돌아갔다. 은은한 조명 아래, 이안의 금발이 따뜻하게 빛났다.
“옛날 옛적에…….”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읽어주는 목소리가 유독 다정했다. 동화책이 몇 장 넘어가기도 전, 아이는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 * *
한편, 그 시각.
“신이시여. 운명을 재단하고 삶을 이으시는 신이시여. 지혜와 인도를 원하는 나약한 신자가 여기 있습니다. 부디, 부디 바라옵건대 제 작은 신음이 들리신다면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저는, 저는…….”
아비드엘은 구석에서 머리를 박은 채 연신 신을 불러댔다. 그런 그녀를 뒤에서 불안하게 쳐다보는 마카엘.
두 사람은 이안의 권유에 따라 마법부 응접실을 내어 받았다. 돌산에서 신탁의 빛이 내려올 때까지, 적어도 신탁을 받았던 다른 신관이 올 때까지는 여기서 나갈 수 없으리라.
“아비드엘.”
“제발, 제발…….”
아비드엘은 베일 아래로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머리 한쪽에서는 이안의 추론을 부정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상당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가 들었던 것은 정말 신탁이 아니란 말인가? 신의 뜻을 들었다는 영광이 가슴에 새겨진 채로 십 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마물의 것이라면? 자신은 어찌하면 좋나?
“마카엘. 나는-!”
아비드엘은 아예 엎드려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온몸이 더럽혀진 기분이었다. 마물의 음성을 신의 것이라 여겨 숭배했던 자신이 혐오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마카엘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 침착하고, 우선 다들 도착하면 문제를 논의해 보자.”
네 잘못이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비드엘의 입장이 어떠하든,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젖어가는 베일을 걷어내지도 못한 채 중얼거렸다.
“어째서, 신께서는 내게 알려주지 않으셨을까?”
“아비드엘. 제발 진정해.”
“그건 잘못된 것이라고, 사특한 자의 음성이라고! 나를 조금이라도 가여워하셨다면, 알려주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끼이익.
“알려주셨지 않습니까.”
절규하는 그녀의 뒤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진에게 책을 읽어주고 돌아가던 이안이었다. 워낙에 조용한 밤인지라, 그녀의 기도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오늘날, 내 입을 통해.”
“십 년입니다. 너무 오래 지났어요.”
“십 년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시각. 영원을 관장하는 신께서 보기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니. 긴 흐름 속에서 제일 적당한 시기를 짚으셨고 그것이 지금이라, 그렇게 믿으시오.”
마카엘은 아비드엘의 눈물을 닦아주다 멈칫거렸다. 이안이 문을 아예 활짝 열어버렸기 때문이다. 바깥의 찬 바람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나와 함께 집무실로 가서 진리를 탐구하지 않겠나?”
고대의 악마에 관하여, 로버사이드에 관하여, 신전에 관하여, 또 신탁에 관하여. 무엇이든 좋았다. 심지어는 아르센이 악마가 아니라는 반박 역시도 환영이다. 무엇이 되었든, 지식은 곧 지혜가 될 터이니.
“카르보 신전에서 시작된 비극.”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다. 아르센이 마력확인식을 무사히 넘겨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면, 그만한 난관이 또 없으리라.
“아직 늦지 않았어. 아르센을 저지할 기회는 남아있으니, 수습되면 책임을 졌다는 뜻이고 반대로 반박할 수 있다면 책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니까. 지금으로는 기도보다 효과적이라 여겨지네만.”
차락.
이안은 동화책을 가볍게 흔들며 고갯짓했다.
아비드엘과 마카엘은 문득 저것이 신의 응답이 아닐까 싶었다. 가서, 이안을 돕고 바리엘을 구하라는 무언의 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