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
제23화. 전사
“중앙 출신들은 끈기가 부족하단 말이지.”
데르가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집무실 계단에 올라섰다. 꽤 오랜 시간, 그것도 성실히 해온 건 기억 속에서 지워졌나 보다. 집사 역시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그만둔다니요.”
“브라츠에 바리엘 대학 출신 학자가 있나?”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아니면 다른 곳에서라도 모셔와야지요.”
괜히 귀찮게 되었다. 바리엘 대학 출신 중에서 저만치 싼 값에 교사로 부릴 수 있는 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괜히 몇 년간 급여를 동결했나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올려주면서 꾀는 것인데. 뭐, 연구 때문에 타국으로 간다니 돈 문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비싸겠지?”
“아무래도요. 지금까지 나갔던 수업료의 열 배 이상은 주셔야 할 듯합니다. 그래도 한다고 할지가 문제지만…….”
젠장! 데르가는 짜증을 잔뜩 담아 발을 굴렀다. 집무실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그는 문득 여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보좌관을 떠올렸다.
“보좌관은 아직까지 자고 있는 것인가?”
“어제 새벽에 잠드셨으니 고단하실 겁니다.”
“팔자 한번 끝장나는군. 깨워서 집으로 돌려보내.”
끼익.
문을 여는 순간, 데르가가 멈칫거렸다. 집사의 의아한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 그림처럼 똑같던 모습이 뭔가 묘하게 변해 있었으니.
“…뭐야?”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보좌관과 살짝 흐트러진 서류 더미. 데르가의 뒤로 쫓아 들어온 집사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이게! 괜찮으십니까?”
바로 보좌관의 상태를 살피는 집사와 달리, 데르가는 곧장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안쪽 비밀 금고를 확인하여 인장과 각종 귀물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주인님! 의사를 부를까요?”
“…죽었나?”
데르가의 음성이 한껏 날카로웠다. 책상 앞에서 널브러졌다면 딱 하나의 가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전 집사처럼 쥐덫에 걸린 것이다.
“숨이 붙어 있습니다.”
“의사를 불러라. 그리고 눈뜨는 즉시 나한테 보고하고.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사람을 붙여놔.”
“네. 알겠습니다. 밖에! 누구 있느냐!”
“무슨 일이신가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사용인들이 달려와 보좌관을 옮기는 동안 데르가는 샅샅이 집무실 물건을 점검했다. 다행히 뭔가 사라지거나 바뀐 것은 없었다.
피해가 없다는 걸 알아서일까. 머리가 차분해지자 이번에는 울컥, 배신감이 치솟았다.
“…괘씸한!”
“아이고,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거뒀는데! 이런 식으로!”
퍼억!
데르가는 기절한 보좌관의 얼굴을 후려치며 짜증 섞인 분노를 터트렸다.
한편, 별채로 돌아온 베릭이 사과를 베어 물며 물었다.
“시끄럽네. 들킨 거 아니야?”
느긋하게 휴식하던 하인들이 죄다 소집되어 본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마차. 분명 의사가 타고 있겠지. 이안은 창문에 몸을 기대고 그걸 흥미롭게 지켜봤다.
“들켰지. 안에 보좌관이 있었거든.”
“조졌네. 이제 목 떨어지겠어.”
“무섭나 봐?”
“이대로 죽으면 나만 등골 빨린 거니까.”
영 틀린 말은 아니군. 베릭의 말에 이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안은 나무 열쇠를 부러트린 다음, 베릭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안쪽에는 밀고용 종이가 잘 말려있었다.
“열쇠는 나가서 아무도 모르게 태워버려. 그리고 이건 몰린 경에게 전달. 무조건 직접 전달해야 한다. 주소는 알려줬지?”
마지막 마무리였다. 베릭은 그것을 품에 끼워 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몰린 경에게 전해주고 금화 얻어오기.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집에 들러서 필리아에게 말 전하기.”
“훌륭해.”
이안의 생모인 필리아에게 전언하는 것이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다고. 몸 숨길 준비가 되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라고. 그녀의 거처는 베릭을 통해 이안만이 알게 될 터. 이제 국경을 넘어간다 한들 걸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일부터는 제대로 대련하자.”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면.”
“그래? 좋아. 나중에 딴말하지 마.”
걸리는 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완수할 표정이었다. 이안은 그에게 사과를 하나 던져주며 웃었다.
“내일 보자고.”
끼익.
이제 말은 떠났다.
남은 것은 저쪽 말이 어떻게 나올지 관찰하는 것. 가만 생각해 보니 보좌관에게 들킨 게 영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갈무리했다고는 하나 급한 상황이라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어. 데르가라면 분명 그걸 알아챘겠지. 보좌관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을 거다.’
보좌관이 일어나서 증언하면 또 다른 국면에 들어서겠지만, 그 말을 데르가가 믿을지부터가 문제였다. 아마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사이, 백작은 백작 나름대로 결론을 지을 것이고, 그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똑똑.
노크 소리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이안 님. 들어가겠습니다.”
“오. 선생님.”
교사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문으로 들어섰다. 데르가와 얘기하면서 기가 쭉쭉 빨린 듯싶다.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고용인과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용인 간의 대화가 눈에 훤했다.
“아버지와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예에…….”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 하시니 아쉽습니다. 그간 훌륭한 가르침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 뜻으로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는데요.”
이안은 능청을 떨며 그의 앞에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브라츠의 인장이 찍힌 통행증이었다. 교사는 안도의 한숨을 뱉어내며 연거푸 마른세수를 해댔다.
“하아. 세상에.”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아까 눈 마주쳤을 때 좀 웃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무슨 문제 있는 줄 알고 어찌나 간 졸였던지.”
교사는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통행증을 가슴에 품었다.
“블라스터로 건너가셔서 좋은 연구 계속하세요. 다들 관심 두지는 않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선생님 같은 분들이니까요.”
이안은 진심으로 그를 격려했다. 평생을 바쳐서 일구어낸 학문은 바리엘의 근본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이안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교사는 무슨 말로 화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이거, 그때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대사막의 지도와 예상기후였다. 오아시스 표기를 비롯한 모래 산의 고도까지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말씀하신 날짜를 계산해 보니 북동쪽, 이쯤 하여 모래폭풍이 생성될 확률이 높습니다. 천려족의 동선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재수있으면 잘 비켜 갈 것입니다.”
그 외 일교차는 불지옥과 냉지옥이라 불릴 만큼 엄청났다. 이안은 숫자로 가늠할 수 있는 고생길에 한숨을 내 삼켰다.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네요.”
“그래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아까 한 위로의 화답인가? 이안은 종이를 고이 접어서 서랍에 넣었다.
“당장 오늘 떠나십니까?”
“네. 한시라도 기다릴 수 없어서요.”
이안은 마지막 만남을 장식하듯 손을 내밀었고, 교사는 머뭇거리다 붙잡았다.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는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아차. 가기 전에.”
“네?”
또 뭐가 남았냐는 표정이었다.
이안은 어제 데르가의 집무실에서 베껴낸 천려족 서신을 꺼냈다. 문장이 아닌 드문드문 단어 위주의 필사였다.
“이거 해석 좀 해주시겠습니까?”
교사는 가만히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후 여 족장 다음으로 올 자가 누구인가?”
읽으라고 해서 읽었다만, 교사는 영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이게 비밀 금고에 들어있었던 만큼 굉장히 중요한 서신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 * *
“얘기 들었어?”
“보좌관님 말이지? 어후. 세상 참 무섭다니까.”
“그러게. 듣자 하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대.”
“사람 속 알 길 없다지만, 정말 놀랍다.”
저택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집사가 단속을 열심히 해댔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사용인들은 둘 이상 모였다 하면 보좌관 사건을 입에 올렸다.
“…그래서, 아직 안 깨어났다고?”
“네. 도련님.”
이안은 멀어져 가는 사용인들의 수다를 뒤로하고 해나에게 물었다. 아이는 옆에서 겉옷을 든 채로 따라붙었다. 저 뒤로는 모래주머니를 잔뜩 인 베릭이 기다시피 따라왔다.
“백작님이 집에 돌려보내지도 않으시고 집무실 안쪽 사무실에 자물쇠를 걸었어요. 경비도 복도에 둘, 문 앞에 하나 세워두었고요. 사용인들은 절대 접근 금지랍니다.”
해나는 속삭이며 주워들은 것들을 풀어놓았다. 마력을 있는 대로 때려 박았으니, 쉽게 일어나지 못할 건 당연했다. 해나는 참으로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뭘 어떻게 했기에 보좌관을 저리 쓰러트렸나 묻는 것이다. 해나는 이안이 마력운용자인 것을 모르기에, 궁금해서 몸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자. 이걸 받거라.”
“헉! 금화!”
이안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금화를 건넸다. 베릭이 가져온 것인데, 이안이 전한 밀고장이 몰린에게 잘 전달되었다는 증표였다.
“네 수고비와 목수의 몫이니 잘 전달하거라.”
“너무 많은데요. 우와.”
“그래? 그럼 거슬러 주렴.”
“아닙니다. 헤헤. 무슨 섭한 말씀이셔요.”
많다는 인사치레가 곧 거절은 아니다. 해나는 배시시 웃으며 금화를 앞니로 씹어댔다. 그리고 재빨리 안주머니에 넣고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뒤로 물러섰다.
“베릭. 빨리 와.”
“아니, 제대로 된 훈련 한다며…….”
“그게 제대로 된 게 아니면? 무게를 더 올릴까?”
“…닥치겠다.”
“너는 성격이 급하니 이런 방식이 딱이다. 한계치를 조금씩 늘리는 거지. 두 바퀴만 더 돌고서 검을 잡아보자.”
“주인 한번 잘 만났네!”
“칭찬 고맙군. 나도 쓸만한 수족을 만났어.”
베릭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안을 쏘아본 다음, 힘겹게 한 발 내디뎠다. 이제는 가정교사 수업도 없는지라, 온종일 베릭과 운동에만 전념하면 된다. 데르가 역시 어제 사건 때문에 집무실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그때.
타닥타닥-!
정문 쪽에서 발굽 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다시 들어온 건가 싶지만, 이상하게 소란스럽다. 이안은 나무 아래 멀뚱히 서서 시선을 고정했다.
“아.”
흑마(黑馬)인가 싶었지만, 아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데 있어 필수인 이동수단, 쿠실레였다. 말과 낙타의 중간쯤 되는 동물인 쿠실레는 천려족의 대표적인 반려동물이었다. 그 말인즉-
“누구지요?”
해나의 물음에 이안이 뜸을 들였다.
안장 위에 올라탄 늠름한 전사들. 붉은색 안료를 얼굴에 바르고, 금빛 장신구로 존재감을 알리는 저들은 바로…….
“천려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