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1
제231화. 정체가 뭐야
황궁의 거대한 정문이 평소보다 더욱 높고 넓게 열렸다. 사람과 마차 따위가 지나갈 때는 첫 번째 개폐 장치만 해제하면 되었지만, 신탁의 빛처럼 크고 예민한 물건을 들일 때는 두 번째 장치까지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앞에 비키십시오. 다칩니다!”
“말을 천천히. 더 천천히 움직이세요.”
“어이구, 카르보 신전 거는 다른 데보다 훨씬 크네.”
“신년회 때는 이것보다 작았지?”
“카르보 아닙니까. 카르보. 건국부터 함께한 신전인데요. 이름에 걸맞지요. 그대로 계속 미시면 됩니다! 마법사님, 왼쪽이 치우칩니다. 힘을 균등히 넣어주십시오.”
스르륵!
두꺼운 천을 몇 겹이나 뒤집어쓰고, 밧줄로 고정한 것이 기어가듯 궁으로 들어섰다. 그 주위를 에워싸며 보호하는 백색의 신관들. 험난한 여정이었음에도 불구, 먼지 하나 묻은 것 없이 깨끗했다. 베일 아래 사람이 있는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일정하게 움직였다.
“신관들인가 봐. 카르보라는데?”
“카르보 신전이면 저기, 딜라이나 님 친정이잖아?”
“기도 부탁드리고 싶다. 중앙에서 오래 계시려나?”
“운이 좋군. 신관 행렬도 보고.”
옆으로 물러난 제국민들이 들떠서 속닥거렸다. 실로 흔치 않은 광경 아닌가. 신전은 대부분 외지에 있었고, 전쟁이나 재해 따위의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접근 자체가 불가한 신성한 곳이었으니.
끼이익.
“자자, 입궁 대기자들은 뒤로 물러나서 기다리시오.”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기다려 주십시오!”
“어이고, 운 좋다는 거 취소네. 텄구먼, 텄어!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오는 건데.”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마법부가 신탁의 빛을 인계받을 때까지. 곧 올 것이니 걱정 마시오. 오래 걸리지 않아.”
쿠우웅! 끼익!
문지기들은 그리 일러두고, 정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그리고 신관들의 신원을 하나씩 확인하여 출입 목록을 작성해 갔다.
딜라이나의 부하들과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 고된 손짓으로 신분증을 내주며 복귀를 알렸다.
타닥타닥!
그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마법부의 깃발이다. 맨 앞을 내달리는 금발의 소년이 능숙하게 고삐를 잡아당기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타앗!
“이안 님.”
“…죄송합니다.”
가까이 다가온 마법사들이 작게 속닥거렸다. 최대한 늦게, 그러니까 대회의 이후에나 들어오게끔 하려 했는데, 실패한 것이었다.
마차 바퀴를 망가트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러다가 신탁의 빛이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낭패 아닌가. 딜라이나의 부하들이 이를 꽉 문 탓도 있었다.
“되었다. 고생했어. 돌산에서 여기까지 힘들었을 것이라. 지원 나갔던 마법사들은 모두 들어가 쉬어라. 이제부터는 우리가 옮기마.”
이안은 문제없다는 투로 그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3센티미터 정도 공중에 떠올라있던 수레가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마차 끄는 것을 편히 하고, 흔들림과 충격 방지를 위한 조치였다.
“이안 님. 얼마 정도 올리면 될까요? 그대로 3센티미터 갈까요?”
“그래. 너무 높게 띄우면 위험하다. 네 사람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동시에 힘을 넣어.”
지이잉. 지잉.
이안의 지시에 마법사들이 일사불란 움직여댔다.
그런 그 앞으로 다가오는 한 신관. 아비드엘과 마카엘처럼 손끝 하나 보이지 않았으나, 굽은 등으로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카르보 신전의 대신관 릴리입니다. 이리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반갑소. 나는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일세. 먼 걸음 하느라 고생했겠군. 신의 축복이 있기를.”
이안이 가슴팍에 손을 올리자, 대신관은 머리를 가볍게 조아렸다. 그와 동시에 뒤에 서 있던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로 인사했다.
“그런데 신탁의 빛 수레는 그렇다 쳐도, 어찌 그대들은 마차가 없는가?”
“돌산에서 기다리던 중, 마차로 움직여 볼까 하다가 그것들까지 바퀴가 죄 나갔습니다. 딜라이나 님과 마법부의 빠른 도움이 아니었다면 참으로 곤란할 뻔하였지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우리가 요청한 것이니 당연히 할 일이지. 먼저 도착한 아비드엘과 마카엘은 현재 마법부에서 대기하고 있소. 그 전에, 여기서 신탁을 받았다는 신관이 누구인가?”
아비드엘과 마카엘 사이에 있었다던 두 번의 신탁. 개중 한 명은 신전을 지키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함께 왔다 하였으니 이 중에 있을 것이라.
대신관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건 어찌 하문하십니까?”
“아비드엘과 마카엘 그리고 그자와 함께 확인할 것이 있다. 대신관. 그대 역시 함께해야 할 것이라. 나머지 신관들은 준비한 처소에서 여독을 풀게.”
…의아하지만 굳이 숨길 것 없다. 대신관이 뒤를 슬쩍 돌아보자, 가운데 서 있던 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랑코입니다. 제가 마카엘 신관 전에 신탁을 받았습니다. 인근 마을의 지진 관련한 말씀이셨지요.”
“반갑네. 자, 시간이 없으니 움직이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어째서 아비드엘과 마카엘은 그들을 마중 나오지 않았나? 물을 것이 많았으나, 대신관과 랑코는 우선 이안을 따르기로 하였다.
“신관들의 짐은 수레에 실어서 마법부로 옮겨라.”
“마차 안으로 드십시오. 신관님들, 이쪽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신탁의 빛을 담당하는 마법사들 외, 다른 자들이 신관들을 환영했다. 서둘러 자리를 비워줘야만 다시 황궁 정문이 열리고, 제국민들이 오갈 것 아닌가? 다들 어수선하게 현장을 정리하던 차였다.
타닥타닥!
히이잉!
휘황찬란한 마차들이 이쪽으로 신나게 달려오고 있었다. 크게 휘두르는 채찍질로 보아, 마차 안의 주인께서 마부를 다그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딜라이나 님인 것 같은데.”
“그러게요. 저쪽도 참 부지런합니다.”
로만드로가 난감하게 속삭이자, 이안은 그저 웃었다. 마법부는 당연히 황궁의 출입 보안을 담당하니 빠르게 알 수 있었지만, 저들은?
히이잉!
타악!
마차가 멈추자마자, 딜라이나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급하게 내렸다. 신관 모두가 같은 옷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용케도 대신관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릴리!”
“오, 딜라이나 님!”
“반갑네. 오랜만이라. 오느라 수고했어.”
딜라이나는 체통을 잊고 대신관과 가볍게 포옹했다. 릴리는 딜라이나의 산후조리를 직접 해주었던 자였고, 더 나아가서 어린 시절 추억 한 조각을 품고 있는 자 아니던가.
카르보 신전과 가문이 이전 같지 않은 관계라고는 하나, 그 뿌리가 같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신탁의 빛은?”
“마법부에 잘 인계했습니다. 딜라이나 님. 그런데 어찌 이리 야위셨어요?”
“일이 좀 많았네. 아르센!”
“오오, 아르센 저하. 아주 늠름하십니다. 신께서 보시고 흐뭇하실 것이에요. 이리 뵙게 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딜라이나는 아르센을 제 옆으로 끌고 와 대신관에게 인사시켰다. 대신관은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지만, 아르센은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 아르센일세.”
보란 듯이 말이다. 그가 마물이라는 소문이 황궁 끝까지 스며든 지금. 아이는 대신관과 접촉하여 결백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대신들이 속으로 탄성을 내지르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신관의 몸으로는 함부로 타인과 신체를 접촉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만 받아주십시오.”
대신관이 가볍게 거절했지만 말이다.
거리낄 것 없다는 아르센의 태도에 관료들은 다시금 믿음을 견고히 세웠다. 마물이라면, 참으로 위험한 도발 아닌가? 아르센에게는 한 치의 어둠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래? 아쉽군.”
아르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신탁의 빛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청명하게 웃으며 물건에 손을 올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전에서 제일 신성시 되는 물건이니, 마물이라면 응당 이상 반응을 보여야 할 터.
하지만 주위는 고요하기만 하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기까지 하니, 온 세상이 평화롭다.
“이것이 신탁의 빛인가? 생각보다 훨씬 커. 이안 경이 썼던 것은 장난감에 불과하겠어. 안 그래?”
아이는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으나,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시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어쭙잖은 시비에 응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으니까. 정확히는 어쭙잖은 ‘마물의’ 시비가 되겠지만.
“이안.”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딜라이나가 서슬 퍼런 음성으로 호명했다. 안 그래도 허무맹랑한 소문으로 속이 뒤틀린 참이다. 그런데 이제는 대놓고 아르센을 무시해?
“네. 딜라이나 님.”
“황궁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황궁에는 원체 뜬구름 같은 소문이 많지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딜라이나는 하, 하고 헛웃음만 터트릴 뿐 뒷말을 잇지는 않았다. 신관들을 앞에 두고, 아르센이 마물이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기에. 그저 발음하여 입 밖에 내는 것조차 수치요, 모욕 아니겠는가.
그녀는 이안에게 바짝 붙어 속닥거렸다.
“내 당장이라도 그대를 참수하고 싶지만, 먼 거리 달려온 손님을 보아 참겠네. 신탁의 빛이 도착했으니, 더 이상 마력확인식을 미룰 수는 없어. 속히 거행하는 게 좋을 것이라. 하여, 그대가 뱉었던 말에 깔려 죽어라.”
“딜라이나 님께는 감정 없습니다. 오히려 걱정될 뿐이지요. 아르센 저하의 정체를 알고서, 견디실 수 있을지 말입니다.”
“끝까지-!”
대신관은 영문 모르겠다는 듯 침묵하여 주위를 살필 뿐이었다. 이안과 딜라이나뿐만 아니었다. 마법사들과 낯선 대신들까지 모두 날 선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체 왜?’
아르센 저하가 마력운용자라면, 이는 제국의 축복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축제와 같이 꽃가루가 휘날릴 줄 알았거늘.
하나, 얼어 죽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모든 게 차가웠다. 그 살얼음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아르센이었다.
“신탁의 빛이 이리 들어왔으니, 당장이라도 마력확인식을 진행해도 되겠어. 나는 언제든 좋다. 어찌할 것인가?”
아르센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한번 이안에게 말을 붙였다. 이안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벽안의 눈동자가 유독 반들거렸다.
“신탁의 빛 아래 마법진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장 오늘로는 무리고, 속행한다면 내일 아침쯤이면 가능하겠군요. 아르센 ‘저하’?”
저하라는 호칭이 의문으로 끝났다. 네가 정녕 황실의 핏줄이 맞는지 의아하다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아이는 불쾌한 기색 없이, 계속 웃으며 이안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자, 어디…….’
어디 한번, 능력을 써볼까 싶은 참이라. 이안은 덤덤하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 사이 기이한 침묵이 길어질수록, 각자의 부하들이 동공을 굴려대며 당황해했다.
“그럼, 실례합니다. 자세한 일정은 오늘 오후 중으로 통보하지요. 다들 무엇하나? 안 움직이고?”
이안은 시간 낭비라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아르센의 눈살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지 않나?
타앗!
아르센은 이안의 팔을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들 놀라서 멈칫거렸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다. 불쾌하게 손을 쳐내려는데, 아르센의 안색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멈췄다.
“…….”
“무엇 하십니까?”
“너……?”
마법사라서, 그리고 장관직을 맡을 정도로 강력한 자라서 통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아예 시도조차 되지 않는 이상한 무력감. 아르센이 멍하니 그를 보다가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너, 뭐야?”
마치 황족에게 썼을 때와 같은 느낌 아닌가?
이안은 허리를 잔뜩 숙이고 아르센에게 속삭였다. 둘만 들을 수 있게, 아주 작은 목소리다.
“…그러는 넌, 대체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