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3
제233화. D-Day
그날의 해가 떠올랐다.
이안은 피곤하다는 듯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시종들의 손길을 받아냈다. 그들은 머리칼을 흐트러짐 없이 넘겨주었고, 단추를 잠가주었으며, 이내 황실에서 수여한 마법부 장관 배지를 가슴팍에 달아주었다. 시종이 금쟁반에 가죽 장갑을 담아 올리자,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안 님. 준비 다 되셨습니까?”
비비안나였다. 그녀 역시 평소보다 격식 있는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황궁의 중요 행사인 것과 별개로 누군가의 마지막이 될 날이었으니까.
상대측은 그것이 이안이라 여기겠지만, 이안의 측근들은 아르센이라 믿었다.
“비비안나. 그대도 함께하는가? 몸이 안 좋다며.”
“아닙니다. 이안 님 뒤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가야지요. 그리고 로만드로 님 상태가 아무래도 힘들어 보여서요. 곁에 있는 게 심적으로 편할 듯합니다.”
수세로 밀릴 것이다. 아르센을 지지하는 자에 비해 진을 지지하는 세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비비안나는 한 사람이라도 더 자리를 채워주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비록 위험 때문에 안쪽까지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이안 님은 좀 괜찮으신가요? 아코렐라 대장의 체력 물약 부작용이 서서히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피곤해하시는데, 한번 잠들면 며칠을 내리 잔다고 하니…….”
“아직은 견딜 만해. 진 저하는?”
“마치셨습니다.”
“그래. 가지.”
꽈악, 이안은 힘주어 장갑까지 착용했다. 밖으로 나가니, 진과 시아오시 그리고 로만드로가 마법사들과 함께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은 진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이는 말없이 붙잡았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응. 이안 경, 자네는?”
“저 역시 아주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지난밤, 진은 다시금 아르센 꿈을 꾸었고 이안은 잠들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늘 하루의 행운이 저들에게 있다는 걸 암시하려는 듯, 마주 보고 웃었다.
타닥타닥!
“마법진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장관님이 마지막으로 확인하시면 됩니다. 정문에 마력확인식 참석자들이 입궁할 시 전언하라 일렀고, 혹시 몰라 친위대에게 병력 배치를 요청했습니다. 답장은 없었습니다.”
이안이 했던 것과 달리, 이번 마력확인식은 마법부의 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신년회 등의 추가적인 일정이 없었고, 전적으로 마법부의 주관 아래 이루어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뜻밖의 상황에 대비하여 이것저것 해둘 것이 많았기에, 황궁 본관보다 마법부가 훨씬 유용했다.
드르륵.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오른쪽! 좋아!”
“이쪽 커튼은 어찌합니까? 쳐버릴까요?”
“와인 준비는 다 되었어? 잔 모자라지 않게 준비해.”
“손 좀 빌려주십시오. 여기, 여기 잡아줘요!”
천을 벗은 신탁의 빛은 실로 아름다웠다. 하프 형태를 띠긴 하지만, 우윳빛 곡선 아래 촘촘히 박혀있는 보석들로 인해 하나의 예술 조각품처럼 보일 정도라. 건국의 영광을 함께했던 카르보의 명성에 걸맞았다.
“이안 님.”
“대신관.”
마법사들 사이를 누비던 대신관 릴리가 이안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자, 굽은 등이 크게 들썩거렸다.
“이르신 대로 준비는 끝마쳤습니다만,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정녕 옳은 길인지요.”
“옳은 길 따위는 없습니다. 각자가 갈 길만 있을 뿐. 대신관께서는 그저 뒤에서 지켜보다 선택하시면 됩니다.”
대신관은 아르센이 마물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보다, 의심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입증 과정을 돕되, 그로 인한 결과를 보고서 어찌할지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뒤쪽으로 아비드엘과 마카엘이 신탁의 빛에 손을 올리고 기도하는 게 보였다.
“이안 님. 행정부의 퀸타나 님 도착하셨습니다.”
“마차 다섯 대가 방금 정문을 통과했습니다. 중앙 귀족 레온티스, 필레토, 그리고 문화부의 델마입니다.”
이른 시간이지만, 모두 기다린 날인 만큼 손님들이 서두르는 게 느껴졌다.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손님맞이를 부탁하며 단상에 올랐다. 신탁의 빛 아래, 마법사들이 그려 놓은 거대한 마법진이 빛을 머금고 있다.
“문제없습니다. 이안 님.”
“그래. 잘 그렸네.”
손끝으로 수식 하나하나를 살피는 모습이 신중했다. 마법사들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숙제 검사하는 심정으로 주시할 뿐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자, 마법사들 역시 안심하며 웃었다.
“교향악단을 들라. 축제를 시작할 것이다.”
* * *
몇 시간 후.
풍부한 선율이 흐르는 회장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초대장 없는 자들도 섞여 있겠지만, 마법부에서는 딱히 막아서지 않았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축제는 즐거울 것 아닌가?
“마법부가 이렇게 생겼군요. 사실 저는 처음 와봅니다. 세상에나. 아름다워요. 계속 흐르는 꽃가루라니.”
“마법부 어느 곳에는 눈과 비가 계속 내리는 방도 있다지요. 과장이 아닌 듯합니다.”
“그나저나 이안 장관은 보이질 않네요.”
“저는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아르센 저하가 마물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너무 무거운 발언인지라, 혹시나 한 마음이 든답니다.”
“마법부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해요. 이안 장관이 대회의 이후로는 이렇다 할 입장을 안 보여서.”
“둘 중 하나는 죽어 나간다 공언하였지요. 오늘 볼거리가 많을 것입니다.”
귀족들과 관료들은 저마다 입가를 가린 채 수군덕대며 주위를 살폈다. 그들이 평생을 즐겨왔던 파티장과 다를 바가 없건만, 어쩐지 날 선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다.
오늘, 지금, 곧.
바리엘의 미래가 정해질 것이니.
“딜라이나 님과 아르센 저하 드십니다!”
“하이만 공작 드십니다!”
끼이익.
문이 천천히 열리자,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말이다. 악단의 느릿한 음악이 아니었다면, 모두 그리 생각했을 터.
딜라이나와 아르센 그리고 하이만 공작이 함께 회장으로 들어섰다. 그들 뒤로는 한 자리씩 차지한 지지 세력들이 함께다.
“오오, 어서 오십시오. 아르센 저하.”
“딜라이나 님. 잘 지내셨습니까?”
몇몇 귀족들이 재빨리 움직이며 아르센을 반겼다. 단내를 맡은 개미 떼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 문 옆을 지키고 있던 로만드로가 혀를 끌끌 차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이잉. 지잉.
그때, 모두의 귓가에 작은 울림이 일었다. 마법부에서 마도구를 이용하여 알릴 때마다 들렸던 이명이다. 군중은 바로 단상을 올려다보았고, 평소보다 화사하게 반짝이는 이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입니다. 바쁘신 와중, 이리 참석해 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바리엘 역사상 처음일지 모르는 황실 마법사의 탄생을 간절히 바라며, 마력확인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이안은 아르센을 똑바로 내려보며 웃었다. 제발 네가 마법사였으면 좋겠다는 반어적 미소였다. 그가 우아하게 손짓하여 무대 계단을 가리키자, 아르센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오늘의 주인공이신 아르센 저하. 올라오시지요.”
“그 전에 이안 경. 하나 짚을 것이 있지 않나?”
대회의에서 했던 발언, 어디 다시 한번 해보라는 도발이다.
“나를 마물이라 하여 황제이신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이라. 황족의 명예를 더럽히다 못해 산산이 찢어버렸어.”
황족 모욕.
“거기에 나를 죽인다는 발언까지 했지.”
황족 시해.
“저주받은 내 동생, 진을 방패 삼아 실권 잡으려는 추악한 태도가 심히 과하네. 내가 마법사의 자질을 갖췄다는 걸 증명한다면, 스스로 죽을 수 있겠나?”
군중들은 숨죽여 이안과 아르센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날카로운 시선. 먼저 웃은 것은 이안이었다.
“…다들 들으시오. 내 다시 한번 공식으로 발언하겠소. 아르센은 바리엘에서 마지막으로 죽은 마물의 형제이니, 나라를 쇠락의 길로 이끌 악마다. 세뇌의 능력을 쓸 수 있고, 마력과 비슷한 힘을 가졌으니 인간을 현혹하게 하는데 유능한 자라.”
숨넘어가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대놓고 화두를 던졌으니, 이제는 진짜 물러설 곳이 없다.
“진 저하의 신탁을 조종한 것도 저것이고, 딜라이나 님에게서 모성애를 앗은 것도 저것이다.”
“이안 경! 무례하오!”
“혹여 아니라면 내가 스스로 죽겠소. 하지만 아르센이 악마임이 드러난다면, 친히 죽이리라.”
하이만과 딜라이나 그리고 대신들이 눈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다. 마법부 장관이라는 거물을 힘들이지 않고 꺾어버릴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제 발로.
딜라이나는 아르센의 어깨를 움켜쥐며 제안했다.
“좋아. 그 말, 명예를 걸고 지키길 바라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그대가 만든 마법진을 믿을 수 없다. 아르센을 악마로 보이게끔 하려고 무슨 수작을 걸었는지, 알 턱이 없지 않나?”
“마법진은 마법부 모두가 합심하여 그린 것입니다.”
“그대를 따르는 자들이다!”
마음 깊이 이안을 따르지 않는 마법사들의 낯에 불안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러다 이안이 실패하면? 이안을 따랐다는 이유로 저들의 목 역시 떨어지지 않을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마법진은 최소한의 마력이라도 신탁의 빛을 발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 맞는가?”
“맞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하지만 이번에 그려진 것은 변형된 것일 터.”
이안이 대회의에서 일러주었던 정보였다. 신관들의 도움으로 마물의 존재가 깃들어 있으면 다른 반응을 보이게끔 할 것이라는.
“그렇습니다.”
“그 변형이 순수하게 마물을 가려내기 위함이라는 걸 어찌 증명하나? 마법진을 치우고, 신탁의 빛만으로 식을 거행하지.”
“증폭 기능이 없다면, 아주 보잘것없는 빛이 나올 것인데요. 최초의 황실 마법사의 시작을 그리하시렵니까?”
“보잘것없는 빛? 아무리 흐리다고 한들, 황실에서 시작된 첫 번째 빛이니. 그 무엇보다 찬란할 것이다. 이를 거절한다면, 나는 그대가 마법진에 다른 장치를 해두었다고 여기겠어.”
딜라이나가 턱을 치켜들었다. 물러설 의지가 전혀 없음을 알리는 태도였다. 이안은 잠시 침묵하였고, 그럴수록 귀족들의 웅성거림은 커져갔다.
“이안 경은 왜 대답이 없어?”
“그러게 말입니다. 어허. 이거 참.”
“딜라이나 님의 요구는 정당하지. 암. 카르보 신전은 그래도 믿을 만하니까. 신탁의 빛 자체는 순수할 것 아닌가.”
따악!
이안은 조용히 해달라는 뜻으로 손을 튕겼고, 이내 다시 한번 계단을 가리켰다. 이제는 거절 따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손짓이었다.
“…좋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드르륵! 드륵!
마법사와 신관들이 신탁의 빛을 뒤로 밀었다. 마법진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지게 되자, 아르센은 귀족들을 헤치고 천천히 걸었다. 어린 황자를 피하여, 인파가 갈렸다.
“비켜주시게. 나를 위한 무대라.”
아르센이 신탁의 빛에 손을 올리며 이안에게 속삭였다.
맨손으로 접촉하였으나 특이 반응이 없다. 역시 아르센은 마물이 아니라고, 귀족들은 짐작하여 시선을 나누었다.
“뜻대로.”
이안마저 내려가니, 무대에는 아르센 혼자뿐이다. 아이는 자신 있게 손끝을 허공으로 세웠다.
그리고-
지이잉. 지잉.
마법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안광을 빛내며 마력을 터트렸다.
길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빛줄기.
적막을 지키던 교향악단 역시 연주를 시작했고, 강렬한 선율에 맞춰 사방으로 빛줄기가 퍼져 나갔다. 군중들은 감탄하여 입을 틀어막았다.
“증폭 장치가 없다 하지 않았나요?”
“엄청납니다! 엄청나요!”
“와아. 대단하네요. 저게 마력의 힘을 뜻하는 거라면서요. 이안 경이랑 맞먹지 않습니까? 바리엘의 축복이 맞습니다!”
마법진 없이 이안의 때와 비슷하게 화려하고, 아름답다. 천장에서 꽃가루까지 흩뿌려지니, 천국 자체를 옮겨놓은 듯하다.
아르센은 희열을 느끼며 이안을 바라봤다. 이것 보라고, 이 연주가 네놈이 듣는 마지막 연주일 것이라고, 즐거움을 숨기지 않았다.
“어……?”
“왜 그래요?”
“저것 좀 보십시오.”
“뭐가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 누군가가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아래에서 아르센을 바라보던 이안이 웃는 순간이었다.
“…아르센 저하, 그림자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