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6
제236화. 그것을 영광으로
“게일 저하. 다 드신 것입니까?”
필리아가 속상하게 중얼거렸다. 황실 요리사가 새벽부터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 식사이건만, 그 주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거부했다.
보아하니, 나이프와 포크조차 잡지 않은 것이라. 의사가 약을 놓을 수 없다며 길길이 날뛸 게 훤히 보였다.
“그래.”
주변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게일은 침대에 누워 궐련만 태워댔다. 후, 하고 숨을 뱉을 때마다 흰 연기가 길게 흐트러졌다.
그의 시선은 필리아가 방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필리아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었고, 애써 모른 척하였으나…….
“…아, 안 됩니다.”
질기고 끈덕진 탓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필리아가 대뜸 그리 말하자, 게일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엇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력확인식에 함께 가자 하시는 거잖아요. 안 됩니다. 저는 권한이 없어요. 이안이 허락하기 전에는 도울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필리아. 황자보다 그대 아들이 위에 있다 여기는 것인가? 대단하군. 그런 자의 어미이니, 귀하시어 내 쳐다도 못 보겠어.”
“그, 그 뜻이 아니오라…….”
필리아가 난감하게 말을 더듬자, 게일은 웃음을 낮게 흘렸다. 짓궂은 농담 하나 넘기지 못하는 저 여인이, 정녕 이안을 낳은 게 맞는가? 똑 닮은 외모가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며 네르사른이 모습을 보였다.
“필리아.”
“네르사른 님.”
이제 슬슬 정리하고 나가자는 부름이다. 필리아가 그릇을 내려놓으며 게일을 돌아봤다. 이제 갈 시간이 되었다는 듯. 그는 그사이 새로운 궐련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이봐. 사막의 전사.”
“…네. 게일 저하.”
어지간해서는 게일이 네르사른을 직접 부르는 경우가 없었다. 제국의 황제와 변방의 소수민족이라는 신분적 차이도 있다만, 중간 다리 역을 해주는 필리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내 배다른 동생을 마물이라 하였다지.”
“그렇습니다.”
“둘 중 하나는 오늘 죽어나갈 것이라 선포하였고.”
필리아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걸 느꼈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말이었다. 이안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황궁은 원래 이런 곳인가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목숨 걸 만큼 소중한 무엇인가를 품었구나 싶어서 안쓰러웠다. 저가 이안을 그리 여기듯, 이안도 무엇인가를 그리 여기고 있겠지.
“그 또한 맞습니다.”
“아르센은 내 배다른 동생이다. 이안이 죽지 않으면 아르센이 죽을 것인데, 나도 내 가족의 마지막을 볼 권리는 있지 않은가?”
네르사른은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하루가 멀다고 정세가 변하는 황궁이었다. 필시 게일이 이리 나오는 연유가 있을 것인데,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게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또한 제국민들이 보면 곤란하다는 연유로 별궁에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이안이 알려 주는 게 아니라면, 정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다. 거절.
네르사른과 필리아가 침실을 나서려고 하자, 탁상 서랍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게일은 상체를 쭉 펴고서 무언인가를 찾으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드르륵!
“아들의 안위를 위하여 그러는 것을 내 이해한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변방처럼 쉬이 헤아릴 수 없는 황궁이니, 일단 안 된다고 선 그은 것도 이해하고.”
“…….”
“아르센도 그렇지만, 나는 이안에게도 볼일이 있다.”
“그렇다면 제게 일러주십시오. 한 말씀도 빠짐없이 전하겠습니다.”
“으응. 그럴 수는 없지. 이게 뭔지 알겠는가?”
황자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쪽지들. 꼬깃꼬깃한 것은 둘째치고, 음식물이 잔뜩 묻어있었다.
네르사른이 필리아를 돌아보았으나, 그녀 역시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안이 내 이름 팔아서 솎아낸 변절자의 흔적이다.”
그가 루스웨나로 망명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마자,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식사마다 음식물 사이에 쪽지가 끼어있었고, 창문을 두드리는 전서구의 방문이 시도 때도 없었다.
“이름을 밝힌 자도 있지만, 아닌 자들도 있다. 하지만 필적 조회나, 마법부에서 조사한다면 그 주인을 쉬이 알 수 있겠지.”
게일은 보란 듯이 궐련으로 쪽지 하나를 지졌다. 종이는 순식간에 바짝 타오르더니, 잿더미로 변하여 바스러졌다. 그의 미소가 마치 불장난하는 아이와 같다.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이걸 다 태워 버리겠다.”
“저하. 이러시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필리아. 걱정하지 마라. 동료가 칼을 품은 줄도 모르고 등을 맡겨야 할 이안이 제일 곤란할 것이니.”
아들을 두고 하는 협박이었다. 이안이 마력확인식에서 살아 돌아온다 한들, 주위에 변절자가 깃들어 있으면 그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오래가지 못해 또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티잉!
게일은 필리아에게 보석 하나를 튕겨주었다. 반응하지 못한 그녀 대신, 네르사른이 대신 허공에서 그걸 잡아챘다.
“원한다면 보석도 주마. 이리 갇혀있어도 내 제국의 황자라. 두 사람이 원하는 만큼의 재화 정도는 문제없다. 사막의 전사여. 너는 부족의 지도자 격이라지? 풍족한 국고가 얼마나 따뜻한 봄을 가져오는지 잘 알 것이라 여겨지는데.”
“이런 건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아들이-”
“하하하! 얼굴이 벌겋다.”
“아들이 원하는 걸 원합니다.”
“그래. 이것이 그대 아들이 원하는 것이다.”
살랑살랑, 게일의 손끝에서 종이 쪼가리가 흔들렸다.
사유(思惟)란, 신께서 허락하신 한, 인간 고유의 무결한 은신처였다. 변절자를 가리는 건 그곳을 침범하여 샅샅이 뒤지는 일.
그것도 적군이 아닌 아군의 마음을 의심하여 읽어내야 하는 일이었다. 참으로 어렵고, 고되며, 까다로운 일 아니던가.
“왜 이안이 이런 일을 벌였겠나? 마법부는 실담물약을 무력화하는 법을 알고 있다. 내가 덕을 좀 보았거든. 그러니 이 종이가 아니라면, 고생 좀 할 것 같은데.”
네르사른은 속으로 한숨을 들이 삼켰다. 쪽지도 쪽지지만, 이대로 돌아선다고 하여 황자가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문제라도 일으키면?
“하나만 진실하게 일러주십시오.”
“기꺼이.”
“어찌 가시려 합니까?”
“…….”
거의 수락이나 다름없었다. 게일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웃옷을 걸쳤다. 안쪽 주머니로 들어가는 쪽지 뭉텅이. 마지막으로 궐련갑까지 확인하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제일 적기이니, 신께서도 그리 생각하지 않겠나.”
* * *
게일의 동석으로 인해 일정이 조금 늦어졌다. 마차를 더 큰 것으로 바꾸었으며, 혹시 몰라 전사들을 대동했고, 그들의 옷차림을 제국의 것으로 치장하였기 때문이다.
게일은 실로 오랜만에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곳곳에 그와 마리브의 혈전 흔적이 남아있지만, 역시나 평생 각인해 왔던 황궁의 모습이 여실했다.
히이잉!
마차가 흔들렸으나, 게일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황홀하게 상앗빛 성벽과 금색의 무늬들 그리고 잘 깔린 붉은색 벽돌을 지켜봤다.
아아. 황궁이 이다지도 아름다웠구나. 게일은 입술을 꾹 깨물며, 애써 떠오르는 추억들을 지워냈다. 추억은 가끔 후회를 만드니까.
“다 와갑니다. 네르사른 님.”
“어? 그런데 저기 다들…….”
“잠시만요. 이쯤 해서 멈춰야겠는데요? 사람들이 다 나와 있어서 마차가 못 들어갈 것 같습니다.”
마법부 앞에 인파가 득실득실했다. 마차와 호위들 그리고 너절해진 귀족과 관료들이 엉켜서 소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기이한 모습. 필리아 역시 자연스레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게, 저게 뭘까요?”
마법부의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음습한 검은 기운. 마치 다가오지 말라는 듯, 일정한 경계를 긋고 있었다.
필리아는 불길한 낯으로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안 경! 이안 경!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다!”
“로만드로 님!”
“놓아아아! 안에 어머니와 이안이 있어!”
“안 됩니다. 저하. 제발!”
멀지 않은 곳에서 진이 호위들을 떨쳐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발길질하여 떨어지라고, 저를 내버려 두라고 소리쳤으나 그 누구도 그리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후계자는 진밖에 없었으니까.
필리아가 로만드로의 팔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어찌 된 일입니까? 로만드로 님!”
“필리아 님! 헉, 그것이 말입니다.”
“필리아! 안에 이안 경이 있다. 아르센이 이안 경을 죽일 것이라. 다들 어째서 가만 보기만 하는 것인가!”
“아이고, 저하, 제발 진정해 주십시오.”
이미 건물에 접근하려던 병사 몇몇이 널브러져 있었다. 가까이만 다가가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어지러우니, 답이 없었다.
마법부에서 방책을 세우고 있었지만 대장직들은 죄다 안에 들어가 있으니. 이거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진.”
그때, 게일이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나지막한 부름에 진이 멈칫거리며 돌아봤다.
게일 형님이 어째서 이곳에?
“시끄럽다.”
“무, 무엇입니까?”
“아르센이 마물이 맞나?”
“…형님.”
“그래. 그랬군.”
게일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저도 저지만, 마물과 한배를 타고난 아이의 운명도 참 기구하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서, 망설임 없이 독기 안으로 들어섰다.
“게일 저하!”
“저하가 어째서 이곳에?”
“독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세상에, 이게 대체 어찌 된…….”
숨이 좀 막히긴 하다만, 크게 어지럽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게일은 계단을 오르다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러곤 품에 넣어두었던 쪽지를 필리아에게 던지며 인사했다.
“필리아. 그간 식사 함께해 주어 고마웠다.”
“저하?”
“이안이 나오면 전해주거라.”
“저하!”
게일은 그대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자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다. 적요한 공간. 게일은 궐련을 질끈 깨물며 천천히 걸어갔다.
-저주를 받은 자여, 운명을 거스르진 못할 것이니. 바리엘을 위해 스스로 죽으라. 그리하면 세상에 영광이 깃들 것이다.
신탁을 본 그날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그는 바리엘의 황자이니. 마리브처럼 바람으로 돌아가기보다, 세상의 영광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나았다.
비록 역사에 새겨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영광은 남으니까.
“어, 어디 한번 찔러 보아라! 나를 죽이면 너 역시 죽을 것이다. 네가 죽으면 진 역시 얼마 안 가 죽을 것이라!”
…저게 아르센의 목소리인가? 참으로 듣기 더러운 목소리다. 그는 인기척을 따라 걸었고, 이내 회장으로 들어서는 문을 젖혔다.
끼이익.
쿵.
“대낮부터 파티가 꽤 화끈하네. 나도 끼워주지?”
회장을 가득 채운 신비로운 빛. 게일은 순간 천국에 와 있나 싶었다.
허공으로 검을 치켜들었던 이안이 몸을 돌렸고, 그 앞에서 껄떡대는 심장이 독기를 터트렸다.
“뭡니까?”
“새로 내려왔던 신탁을 기억하나?”
“…….”
궐련이 튕겼다. 그가 뱉는 마지막 연기가 될 것이라.
“저하의 신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니까.”
게일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 천천히 이안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죽으면, 나는 영광을 남긴다.”
죽지 않으면?
“죽지 않으면, 황궁에 깃든 마물을 내 손으로 처리하였으니 그것 또한 영광이다.”
진액 속에 헐떡이는 심장의 핏줄이 유독 도드라졌다. 게일은 담담하게 그 끝으로 검을 겨누었다. 이안이 그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황궁에 마물이 깃들었다는 것을, 역사에 남길 수 있겠나? 절대, 그럴 수 없다. 하나의 흔적 없이 모조리 없앨 것이다. 불경했던 지난 십 년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빛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게일이 죽음으로 헌신한다 하여도, 그 누가 알겠나?
“아니. 신께서 알고 계시지.”
게일은 웃으며 아르센의 심장에 검을 가져다 댔다. 그는 이안에게 마력을 발동시키라 눈짓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대가 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