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7
제237화. 남기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흔들리는 그의 검은 머리칼만 바라볼 뿐. 저지한다고 하여 저지될 의지가 아니었고, 거스른다고 하여 거스를 수 있는 운명이 아님을 알았다.
게일이 힘주어 심장 쪽으로 검을 밀어 넣자, 아르센은 광분을 토해냈다.
“죽을 것이다! 죽을 것이라고!”
솨아아악!
독기로 인해 검 끝이 마멸되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끝을 잡아먹는 아르센의 발악으로 인하여.
그러자 게일은 혀를 쯧 차며 상체 무게를 실었다. 검은 허공에 멈추어 사라지기만 하였다. 심장을 꿰뚫으려는 힘과 밀어내려는 힘의 균형이 만들어낸 모습이다.
“아르센.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솔직히 네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아아아악!”
“어린애 주제에, 자기가 어린애인 걸 알고 있었어.”
“게이이일! X발! X발!”
하찮은 미물 따위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십 년씩이나 숨어들어 사악한 수작질을 벌이는가? 장성한 마리브와 게일 탓에 숨죽이고 산 것이 이 정도라니. 실로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이를 꽉 물자, 잇새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커헉.”
게일은 이 감각이 무엇인지 단번에 떠올렸다. 이안의 노예가 자신을 암살하려고 궁에 침입했을 때, 그때 쏟았던 각혈의 감각이다. 그는 희게 웃으며 사납게 소리쳤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아라!”
사아아악!
“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알 수 없는 희열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이것으로 살았다. 바리엘 제국 황자로 살아왔던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 영명과 긍지 그리고 사명. 언제고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지겠지만, 게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손안에,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쿠구웅! 쿵!
지이잉!
이안이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바닥과 천장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주문진들이 다시금 발하였다. 하나둘씩 따뜻하고 환한 빛이 몰려들어 너울 쳤으니, 아르센의 검은 기운과 한데 어울려 낮과 밤을 만들어냈다.
장엄한 천체라. 빛과 어둠 그리고 생과 사 사이에 있는 게일은 힘차게 부르짖었다.
“사멸하라! 사멸하고, 또 사멸하여 아득한 지옥 밑바닥에서 마주하자!”
“으아아악!”
“다시금 너를 죽여줄 것이다! 기꺼이!”
콰악-!
반쯤 남아있던 게일의 검이 결국 아르센의 심장을 관통했다. 고여있던 독의 정수가 힘차게 터졌고, 품고 있던 악한 기운 역시 폭발하였다.
이안은 있는 힘껏 마력을 끌어냈다. 순간, 머리와 목덜미가 핑하고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찰나였다. 인지할 여유 따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깥에는 진이 있고, 사람들이 있다. 죽어서는 안 될 자들이었으니. 이안은 어금니를 깨물며 정신을 붙잡았다.
퍼억! 퍽!
게일은 독을 뒤집어쓰고도 계속해서 심장을 난도질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가 궤를 그을 때마다 검붉고 진득한 피가 솟구쳤다. 살이 타오르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 역시 멈출 수 없었다. 건국부터 이어온 악마. 한두 번 벤다고 하여 그 숨이 멈출까?
“후대에-!”
아르센이 저주를 남기려 하였다. 로버사이드가 죽였던 악마처럼, 그 역시 후대의 복수를 다짐하여 패배를 영원히 미루고자 하였다.
하지만.
“아니. 너는 무엇도 남길 수 없어.”
이안이 단박에 저지하여 대꾸했다. 게일이 파고든 틈으로 서서히 빛이 스며들었다. 어둠을 밀어내는 새벽의 여명처럼, 그의 손길을 따라 마력이 서렸다. 신관들의 신성과 마법사들의 결단이 담겨있었다. 아르센에게 무한한 나락을 선사하는 힘이다.
파아아앗!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다. 이안은 소매를 들어 눈을 가렸고, 귓가로 아득해지는 청명한 비명을 들었다.
이내 시간이 조금 지나자, 회장에는 이안과 게일의 숨소리만 희미하게 남았다.
“하아, 하아…….”
“허억…….”
이안은 힘이 죄 풀리는 기분이었다. 벽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자, 두통과 흉통이 동시에 밀려왔다. 몸 상태가 산산이 무너진 게 분명했다. 며칠간 틈 없이 긴장한 상태에서 아코렐라의 물약을 먹었고, 마력을 한계 없이 쏟아내지 않았나.
“…아.”
몇 번의 기침은 객혈까지 이어졌다. 이는 회장에 남아있는 악마의 독기 탓일 것이라. 희미하고 미약하였으나, 그것마저 쳐낼 기력이 없다는 신호였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누워있는 게일을 바라봤다.
“…….”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검질기고 진득한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 심장을 찔렀던 손끝에는 독이 퍼지고 있었고, 그걸 바로 보았던 벽안은 빛을 잃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이안은 그저 침묵하며 그의 심정을 헤아렸다.
“하아, 하…. 이안.”
바래버린 동공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셨느냐고, 신께서는 머나먼 창공의 끝에서 이 모든 걸 보셨느냐고 묻는 듯했다.
“…남기세요.”
이안이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마지막이었다. 아르센의 존재가 역사에서 사라지면, 그로 인해 죽은 게일의 마지막 역시 사라진다.
신이 알고, 자신이 알 것이라 하지만, 그건 변함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 자에게 이만한 호의 정도는 괜찮을 듯싶었다.
“들어주겠습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의식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수많은 사념과 미련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무엇을 전하면 좋을까.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마지막을 알 자에게, 무엇을 남기면 좋을까.
‘아아. 이만하면 그래도, 축복이다.’
고민하던 그가 별안간 소리 내어 웃었다. 황자로서 태어나 황자로서 죽을 수 있으니, 마리브가 보고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라. 또한, 기록되진 못하더라도 누군가에겐 기억되겠지. 어쩌면 그것도 작은 역사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는 아득해지는 의식 탓에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조금만.”
“…….”
“하아, 조금만 늦게 나가다오.”
지금 이안이 나가면,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면 바닥에 누워 죽어가는 자신을 보게 되겠지. 그걸 원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온전히 죽은 모습으로 존엄을 보이고 싶었으니. 그것 또한 영광 중 하나 아니겠는가.
스윽.
이안은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회장을 채우고 있던 악기(惡氣)가 희미해졌고 게일의 숨소리 역시 옅어졌다.
반쯤 뜯긴 커튼이 바람에 휘날렸다. 반파된 잔해들이 조금씩, 조금씩 넘어지며 간간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스윽.
얼마나 지났을까.
이안은 주위가 적막하다는 걸 깨달았다. 게일의 호흡이 멈춘 것이다.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빛바랜 눈동자 따위는 보이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황자로다.”
이안은 자신의 정복을 벗어 그의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잘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회장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주위에 널브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죽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몇몇은 살아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 기운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이안이 비틀거리며 복도를 빠져나가자, 계단 아래 몰려있던 군중이 바로 알아챘다.
“뭐, 뭐가 나옵니다!”
“마물인가? 다들 경계 태세를 취해!”
“도, 도망쳐요! 황궁 밖으로 나갑시다!”
“아까 굉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이 기회입니다. 친위대는 무엇 하는가? 서둘러서 준비를-!”
두려움 탓이었을까. 그들은 정체가 무엇인지 구분하기도 전에 날을 세워댔다. 하지만 이내, 햇빛 아래 드러나는 찬란한 금발. 풀밭과 같은 짙은 녹안을 깨달았다.
이안이었다. 마법부의 장관이자, 황궁에 깃든 마물을 저격하였던, 제국의 사람.
타닥타닥!
“히, 히엘로 장관입니다!”
“장관님! 괜찮으십니까? 젠장, 의사를!”
“안에 게일 저하가 들어갔습니다.”
“마물은요? 마물은 어찌 되었지요?”
“잠깐, 기다려! 마물이 세뇌 능력이 있다 하지 않았나? 접근하지 마시게! 조심하라고!”
모두 걱정하여 계단을 오르다가, 누군가의 외침에 멈칫거렸다. 그래. 이안이 직접 그리 일렀다. 아르센에게는 세뇌의 능력이 있다고. 하여, 히엘로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라면?
타앗!
“이안! 아아아! 이안!”
하지만 멈춘 인파를 헤치고 내달리는 한 사람. 필리아였다. 한 치의 의심 없이 두 손을 뻗으며 이안에게 팔을 벌렸다. 그녀는 퉁퉁 부은 눈으로 제 아들의 얼굴을 붙잡았다.
“이안, 괜찮아? 피가, 피가 너무 많이 나.”
“…어머니.”
“살았구나, 살았어. 다행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얼마 안 되는 시간. 필리아는 산지옥을 여럿 체험했다. 안에서 굉음이 들려올 때마다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숨을 가져가라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들이 살아 돌아오다니.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안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이안, 고마워. 살아서 너무 고마워.”
이안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은데, 이제 진짜 한계다. 이안이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고르는 순간이었다.
“…이안 경.”
필리아의 뒤를 따라 달려온 진이 그를 불렀다. 아이 역시 눈물을 만만찮게 흘렸는지, 낯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진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아이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마물은 어찌 되었는지, 어머니는 살아 계신 것인지, 그리고 아르센이 일렀던 ‘황족’에 관한 것까지 모두.
하지만 진은 물음 대신 힘차게 계단을 뛰어올라 이안에게 달려갔다.
“…옷이 더럽습니다.”
“나 또한 더럽다. 여기 있는 자들 모두 그러하다.”
진이 작게 중얼거리며, 기어코 이안을 끌어안았다. 꽈악, 작은 두 손이 옷깃을 붙잡으며 그의 무사 귀환을 안도했다. 이안은 가쁜 숨을 내쉬며 그를 토닥였다.
“이안, 많이 다쳤는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게일 저하도 들어가셨는데, 혹 보았나? 어이구, 저저, 피가 대체…….”
로만드로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안부를 묻자, 이안은 몸을 바로 하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귀족들과 관료들이 그의 발언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제발, 마물이 사하였다고 일러주기를.
“…마물은 죽었다.”
이안의 선언에 다들 안도의 숨을 터트리며 안도했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들려왔고, 친한 자들끼리는 가볍게 껴안으며 평온을 반겼다.
“하아! 되었네, 되었어.”
“역시 히엘로 장관이십니다!”
“그렇지요. 제아무리 마물이라고 한들, 마법사, 그것도 장관님 앞에서는 꼼짝 못 하지요! 실로 대단하십니다! 큰일 하시었어요!”
“오늘 죽이지 못했더라면, 아, 상상만 해도 바리엘의 미래가 끔찍합니다.”
이안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가로저었다. 다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그의 지시에 맞춰 점점 잦아드는 잡음. 이안은 이어서, 그의 죽음 역시 알렸다.
“또한, 바리엘의 제 2황자, 게일 베로시온께서 승하했다.”
“……!”
“황궁친위대와 호위, 그리고 마법사들은 회장 안으로 들어서서 사태를 수습하라. 살아있는 자가 있다면 서둘러 호송하고-”
이안이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이 끊어지는 것처럼, 뚝 하고 잘린 지시였다. 로만드로가 의아하게 쳐다봄과 동시에, 이안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시했다.
“게일 저하를 비롯하여, 사망한 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라. 이상.”
타닥타닥!
그의 명령에 병사들이 이안을 지나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다들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안, 이안은 슬쩍 자리를 피해 건물 뒤로 돌아갔다. 걱정하는 로만드로와 진, 필리아가 따라와 불러도 멈추지 않았다.
“이안!”
“이안 경!”
“세상에, 피가!”
그리고 인기척이 드문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이안은 벽을 짚으며 쓰러졌다.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쓰러질 의무가 있었으니까.
흰 셔츠가 피로 젖어 드는 걸 마지막으로, 이안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