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9
제239화. 세 시간 전
이안이 마물의 소멸을 선언할 때였다. 대부분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으나, 적지 않은 수는 하이만 공작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공작의 난감한 기색. 그것은 최악에 치달았을 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밑바닥의 끝이었다. 황족과 귀족 그 사이에 있다던 하이만이, 잘게 신음까지 흘리며 곤란한 티를 숨기지 않았다.
“젠장.”
“고, 공작님.”
게일과 결탁하여 이미 한차례 황궁을 뒤집어놓았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 아르센을 후계자로 밀어주려 하였거늘, 마른하늘에 이런 날벼락이 있나!
마물? 그것도 건국부터 이어온 저주의 산물이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데, 더욱 암담한 것은 적대 세력인 이안이 그걸 알아채고 사하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마물이 살아나오는 게 나았다.’
죄다 죽고, 죽이며, 붕괴하는 게 나았으리라. 그리하면 그들의 과오는 혼란 속에 뒤섞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니.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어떻게 해서든 저놈을……!
“…바리엘의 제2황자 게일 베로시온께서 승하하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하이만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주위에 있던 자들 역시 놀란 숨을 동시에 터트렸다.
재판 전에 죽이려고 그 난리를 쳤던 게 무색하게끔, 게일이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걸어 들어가서.
“방금 들으셨습니까? 세상에!”
“게일 저하께서 승하하셨다고요.”
“아까 계단 오르실 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습니다. 혹여 바리엘을 위해 희생하신 것일까요?”
“희생은 무슨. 기회 엿보다가 실패하신 것이겠지요. 반역죄로 묶여 있던 몸입니다. 마물을 처리하면 그나마 바닥에 떨어진 위신이라도 세울 수 있으니, 망명할 때 루스웨나 측에서 협상하기에도 쉬울 터.”
“그래도 확실한 것은 분명,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셨습니다.”
질서 없이 떠도는 음성들. 어지럽고 경박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살아날 틈을 노리고 있던 하이만의 세력들이 침묵을 물고서 눈짓했다.
마법사들과 친위대 그리고 호위들이 수습을 위해 건물로 뛰어가자, 그들은 자연스레 뒤로 물러서며 뭉쳐 들었다.
“공작님. 방책을 강구해야겠습니다.”
“우, 우선 출궁하시지요. 하여, 사병이라도 모아놓고 의논하는 게 좋겠어요. 각자 저택에 연락하여 결집하도록 합시다. 딜라이나 님은, 아니, 지금 거기까지 신경 쓰기에는 너무 복잡해요.”
“문제 되지 않겠소?”
“이대로 가다간 문제고 뭐고 우리 다 죽습니다!”
바리엘을 몰락시키려 한 마물을 지원했다. 사실상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법부는 이미 두 번이나 황궁을 위기에서 구했고, 그들이 품은 황자는 현재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그뿐인가? 황제는 자리를 보전하여 제 역할을 할 수 없으니, 실질적인 황궁의 주인은 이안이 될 게 자명했다.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앞과 뒤가 막힌 것은 물론이요, 턱 끝까지 패색이 차오르는 기분이다.
“출궁하지.”
어떻게 되든, 황궁에 머무르는 것보다 저택으로 가는 게 맞았다. 이안의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니, 지금이 기회이리라. 정녕 대책이 없다면 게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루스웨나로 망명을 시도하는 수밖에.
그들이 마차를 준비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마법사들과 뭔가를 의논하던 수상이 급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하이만은 그가 내릴 조치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마법사들이 황궁 정문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수상은 주목하라는 듯 헛기침을 크고 깊게 내뱉었다.
“크흠! 지금부터 상황이 수습될 때까지, 황궁 출입문을 모두 봉쇄할 것이오.”
마물이 황자인 척 황궁에 숨어들었다. 또한, 다른 황자가 그로 인해 죽었다. 바리엘 역사상 이만한 치욕이 또 어디 있나?
역사에 남길 수 없는 사안이었으므로 수습은 완벽해야 했다. 통제와 말소 그리고 후대를 위한 조작. 모든 걸 아르센이 태어나기 전의 바리엘로 돌릴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궁 금지로 목격자들을 묶어두는 게 우선이다.
“다들 안내를 따라 제1황궁 본관으로 이동하시라.”
대책회의 일정을 언급하지 않는 거로 보아, 그 전에 모종의 조사가 있을 예정인 것 같았다.
아르센이 세뇌를 썼다고 하였지. 혹여 마수에 걸린 자가 또 있는지 짚고 넘어가는 게 맞는 절차였다. 마법사와 신관들이 워낙 바빠 언제 받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어허, 참. 저번에도 이리 갇혀있었는데.”
“황궁에 들어오기만 하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원.”
“어쩔 수 없지요. 사안이 사안 아닙니까. 이러나저러나 오늘 못 나가는 건 기정사실이었습니다. 마물을 처리한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지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귀족들은 저들끼리 속닥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하나둘씩 친위대의 손짓에 따라 제1황궁 본관으로 사라졌는데, 그는 출입문과 정반대되는 방향이다. 하이만과 그 추종자들은 이도 저도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마차에 몸을 실었다.
히이잉!
‘황궁문은 마법으로 폐쇄되었을 터. 물리적으로는 절대 뚫지 못한다.’
하이만이 수염을 뜯어먹을 것처럼 배배 꼬아댔다. 생각하자, 그리고 살펴보자. 어찌하면 살아나갈 수 있을지, 어찌하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자.
아까는 당황하여 도망칠 생각만 하였는데, 차분하게 떠올려 보니 그건 하수(下手) 중의 하수 아닌가! 공작은 제1황궁에 도착하여 추종자들이 몰려들 때까지, 연신 침묵한 채 정세를 헤아렸다.
“공작님.”
그렇게 두어 시간이 흘렀다. 짙어지는 하늘을 뒤로하고, 누군가 그에게 접근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였다. 혈맥보다 짙은 금맥으로 이어진 자. 마법부의 펜으로 하이만에게 서신을 보냈던 자. 그는 조심스럽게 수습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아르센의 진액이 남아있습니다. 마물임이 확실하게 증명될 듯합니다. 이안이 신성한 주문진으로 악마를 사멸하였고, 그 여파로 쓰러져서 치료 중입니다. 로만드로 역시 마찬가지고요. 딜라이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가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흐음.”
이안이 쓰러진 것은 다행이지만, 딜라이나가 가망이 없다는 건 아쉬웠다. 진이 어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 보였으니까.
악마의 수작으로 인한 실수였다고, 어미를 앞세워 용서받을 빌미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가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아르센이 말하기를, 이안이 황족이랍니다. 그 증거로 세뇌가 안 통하는 황가의 축복을 내세웠다 합니다.”
“무어라?”
난데없는 헛소리에 하이만의 되물음 소리가 컸다. 그로 인해 초조하게 지켜보던 추종자들이 더욱 시선을 집중했다. 마법사는 부담스럽다는 듯, 로브를 꾹 눌러 당기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공작님. 저자가 무어라 하던가요?”
하이만이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고요한 낯과 달리, 손끝은 소파 팔걸이를 연신 긁어대며 뜯어내고 있었다. 방도가, 살아남을 틈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라.
“…지금부터 잘 들어라. 한날한시가 생사를 좌우하는 갈림길일 터. 우선, 우리 역시 아르센의 마수로 인해 세뇌에 걸렸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마물 따위를 바리엘의 후계자로 밀어주려 했겠는가? 안 그래?”
“지,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당연합니다! 마물이 우리를 조종한 것입니다!”
진실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마법부는 실담물약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이안의 의지대로, 거짓과 진실이 가려질 것이니. 대외적인 명분으로나마 세워두고 주장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것이 모래성과 같이 보잘것없어도, 명분은 존재 자체만으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현재 제일 큰 문제점은 이안과 진의 유대감이었다. 이안은 진에게 마법부라는 수단으로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었고, 진은 황실이라는 정당성으로 권력을 보태었다. 한번에 두 사람을 상대할 순 없다.
“아르센이 이안더러 황족이라 하였다는군. 진 저하 역시 그걸 들었고.”
“예? 그게 무슨…….”
이것 또한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이 황족이면 실로 당황스러울 것이라. 최초의 황실 마법사 명예가 이안에게 주어지고, 이는 곧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뜻했으니까.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쩌긴.”
이안은 단단해서 파고들 틈이 없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유약한 진을 흔들어야 했다. 그 어린 몸뚱어리를 흔들고 흔들어서, 제 옆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도록.
“이안이 황족이라는, 하, 말하면서도 어이없긴 하지만…. 아무튼 그만큼 반향을 알 수 없는 화두가 될 터. 어리고 보잘것없는 진보다는 그래도 성년식을 앞둔 마법부 장관이 황좌에 더욱 맞는 격 아니겠나.”
언제나 자리는 하나다. 황좌는 말할 것도 없고, 후계 자리도 역시 하나다. 저를 도와주던 조력자가 사실 제일 위협적인 존재라는 걸 알게 되면, 필시 이전과 같지 않은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흔들다 보면, 그리하면 살아나갈 틈이 생기리라.
궐련을 빽빽 피워대던 누군가가 난감하게 말을 덧붙였다.
“저기, 이안 경의 어미가 번듯하게 살아있습니다. 아무래도 길게 끌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황자도 죽어 나가는 황궁인데, 그깟 천민!”
콰앙!
“정신 똑바로 차려. 잡아먹지 못하면, 우리가 먹혀. 이미 목덜미가 그쪽 주둥이에 반쯤 들어간 상태란 말이다.”
하이만이 아둔한 소리 집어치우라는 듯 일갈했다. 벽으로 날아간 재떨이가 산산이 조각나며 박살 났다.
사지가 찢겨 죽어 나갈 판인데, 그깟 게 문제란 말인가? 하이만은 자욱한 연기 속에서 이를 바득거렸다.
* * *
진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대회의장으로 들어섰다. 복도에 나와 있던 귀족들과 관료들이 진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래에서 보아 그런 것인가? 어쩐지 그들이 보이는 예의는 끝까지 내려온 것 같지 않았다.
“진 저하가 오셨다.”
“오, 세상에. 저하께서…….”
“이안 경은…….”
차마 진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수군거림. 진은 그들 눈빛에서 미약한 두려움을 느꼈다. 저의 모습을 똑 닮았던 마물을 마주했을 때와 똑같은 낯들이다.
진을 보면 자연스레 아르센이 떠오르고, 살면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마물의 공포 역시 자연스레 떠오르는 게 당연했다. 당연했으나-
‘이리 드러내는 것은 당연치 않다.’
뭐지? 무엇일까? 어쩐지 귀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닮은 모습이 아니라면, 한배에서 난 저의 핏줄을 의심하는 걸까?
“진 저하 드십니다.”
끼이익.
시종들이 회의장 입구를 좌우로 젖혀주자, 틈틈이 새어 나오던 소란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동시에 쏟아지는 수백 개의 눈동자.
진은 저도 모르게 왼손을 소매 속으로 넣어 꽉 쥐었다. 언제나 이안이 잡아주던 것인데, 허전하다.
‘눈물을 거두세요. 저하께서는 귀한 분이십니다.’
‘버티고 넘기면, 다시 오지 않을 일입니다. 온다 한들, 저하는 이기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겼던 위로만큼은 생생히 마음에 새겨져 있다.
진은 수상 가까이 자리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그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타앗.
진은 시아오시가 밀어준 의자에 바로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바로 맞은편에 하이만 공작이 보였으나, 아이는 평온하게 표정을 유지했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수상의 물음과 퀸타나의 걱정스러운 눈길. 진은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황궁을 버티고 설 자는 이제 자신밖에 없다.
황자로서, 황자로서…….
“물론이오. 회의를 시작하지.”
이안 없이 내딛는 첫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