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40
제240화. 속살거리다
수상이 봉을 잡은 채로 잠시 멈추었다.
언제였던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신년회 전에는 매일 오전마다 각 부처의 관료들이 모여 안건을 논의했고, 오후에는 그걸 폐하께 올리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중대 안건을 위한 대회의가 시도 때도 없이 소집되었지 않나. 아아. 마리브와 게일의 내란 이후부터인가?
어찌 되었건, 이미 두 황자는 죽었고, 올 데까지 오고 말았다. 서기가 없는 대회의라! 이는 바리엘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미리 알리겠소. 지금부터 열릴 대회의는 서기가 없으니, 이는 후대에 알리지 않겠다는 의지요. 오간 그 어느 말일지라도 흔적을 남기지 말 것이며, 뒤돌아서는 순간 기억을 도려내시오.”
그리할 수 있게, 마법부가 도울 것이라.
마법사들은 비밀을 봉인할 만한 적당한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 금언(禁言)의 주문 혹은 물약,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마도구까지 끌어다 쓸 터. 어찌 되었든, 이안의 결재가 필요하긴 하다만.
타앙! 탕탕!
수상은 거칠게 봉을 내려치며 개최를 알렸다. 그와 동시에 굳게 닫히는 문. 관료들만 있는 게 아니라 귀족들까지 함께하였기에, 공기가 평소보다 후덥지근했다.
“이안 경이 자리하는 게 좋았겠지만, 몸 상태를 참작하여 불참을 이해하오. 대신, 이전에 배부하였던 보고서를 참고하시오.”
하이만과 아르센의 세력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던 그날. 정확히는 고발장 접수에 관하여 대회의 의결을 받아내지 못했던 회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보고서에는 카르보 신전에서 시작되었을 저주와 신탁, , 진과 아비드엘의 증언 따위가 상세히 적혀있었다.
차락.
여기저기서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고이 울렸다. 진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하나, 문장을 읽어내릴 때마다 죽어버린 제 형제의 흔적을 객관적으로 되짚는 기분이다.
“물론 이것들은 그 당시 단순한 의혹 제기에 불과하였네. 하지만 사실임을 모두가 알았어. 카르보 신전에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에 관하여 관련 법안이 있는가? 사법부?”
“신탁이 법적인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닌지라, 아직 사례도, 판례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마물의 수작이었으니 고의성이 없다 여겨져, 황실기만이나 다른 죄를 묻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카르보 신전 내에서 수습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전 안에도 독립적인 규율이 있을 터인데요.”
발언이 하나씩 돌아가다 진에게서 멈췄다. 사실상, 신탁의 제일 큰 피해자가 그였으니. 그의 의견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마땅했다.
“…나 역시 신전에 맡기는 것이 맞다 생각되네. 아비드엘이 신탁을 잘못 받긴 하였으나 그것의 실체를 알았을 때 외면하지 않고 이안을 도왔어. 수습하려는 자세가 바로 보였음이라.”
십 년이라는 세월이 고통스러웠지만, 이미 잃어버린 것으로 미래까지 잃을 순 없었다.
감정은 감정으로만 남겨두기.
결정까지 이어지게 하지 않기.
진은 이안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그리 발언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신께서도 안쓰럽게 여겨 위로하실 만큼 애절하더군. 스스로가 이미 고통의 늪에 빠져 어쩔 줄 몰랐는데, 더한 처벌은 과하다.”
“진 저하께서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카르보 신전에 그리 이르겠습니다.”
탕탕!
수상이 신속하게 의결을 끝맺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황궁이 폐쇄되었으니, 외부에 엄한 소문이 돌기 전 서둘러 일을 처리해야 했으니까. 그는 안경을 바로 쓰며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다음은 게일 황자 저하에 관한 것일세. 아르센의 기록은 고작 십 년 치라, 힘들긴 하지만 도려낼 수는 있네.”
게다가 아르센은 마리브와 게일에게 밀려 황자 수업만 받던 어린아이였다. 황실의 업무나 대외적인 활동에 이름 올린 적이 없었으니, 기록을 지운다는 게 영 불가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게일은?
“하나 게일 저하는 그 자료가 방대해. 존재를 부정할 수 없으니, 죽음에 관한 것을 새로이 쓰는 게 좋을 것 같네만.”
“동의합니다. 아직 재판 전이라 황자의 신분이 유지되었고, 지우는 것보다 덧붙이는 게 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아르센의 심장에 직접 검을 꽂아 넣었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진조차도. 그의 마지막을 보았던 신과 이안은 침묵 중이었으니까.
“그러면 어차피 역모죄가 엮여있지 않습니까? 반란을 일으켰다가 제압당한 것으로 하시지요. 후대에 본보기가 될뿐더러,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동의합니다.”
“현장에서 죽은 마법사들은요?”
“음…….”
외부 세력, 예컨대 드물게 입궁한 귀족들이 죽고 다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황실의 인재였으며, 제국의 자산이었다. 역사에 이름을 올린 자들인데, 그 죽음을 흐지부지 넘길 수 없는 노릇.
“내란 중에 사망했다고 기록하지요.”
“적당한 듯합니다.”
“당시 사상자가 많으니, 그 틈에 끼웁시다.”
관료들이 주거니 받거니 역사의 틈을 만들어낼 때였다. 진이 슬쩍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잘라냈다.
“게일 형님과 달리 마법사들은 어떤 죄명도 달고 있지 않네. 바리엘을 지키기 위해, 마물과 맞서다 그리된 것인데, 명예를 세워주는 게 옳다 여겨지네만.”
“아, 음. 그것도 지당하신 말씀이긴 합니다.”
한 관료가 입을 쩝쩝 다시며 어색하게 대꾸했다. 제아무리 황자라고 한들, 고작 열 살짜리 아이 아니던가. 게다가 본격적으로 회의에 참석한 게 얼마 되지 않았거늘.
“이안 경이 일어나면, 마법부 전체의 의견을 조율해서 결정하는 게 좋을 듯하오. 당장 급한 일이 아니지 않소.”
다들 어색하게 웃으며 침묵했다. 마법부의 희생자를 반란에 엮어 처리하려 한 것은, 길게 보았을 때 마법부를 견제하고자 한 의도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두가 마법부의 활약을 알고 있으니 실권을 넘겨주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희미해져 미래에서는 기록으로만 그들의 존재를 가늠할 터.
마법부와 내란을 연결 지어 놓으면, 후대의 견제자, 즉 황실 측의 누군가가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저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진을 불렀다. 하이만 공작이다. 그는 입꼬리만 올린 채 이질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의도가 여실했다.
‘아, 저 어리고 어리석은 황자를 보라지. 잡아먹기 딱이로다.’
“…발언하시오.”
“마법사들의 죽음을 반란으로 묶어 놓는 것은 저하께 도움 되는 일입니다. 어찌하여 반대하시는지, 혹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연유 따위 없고, 그저 셈이 짧아서 그런 것이라 자백하라는 종용이었다. 귀족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속닥거렸다. 보이지 않는 것 너머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모르겠다.
진은 대답 대신 천천히 회의장을 돌아보았고, 이내 숨겨진 의도를 알아챘다. 이안 덕분에 살아남았으면서, 이안이 없는 틈을 최대한 취하려는 작태가 대단하였다.
서기가 없는, 종료와 즉시 휘발될 회의라 그런 것일까? 이안의 반발을 직접 받아낼 주체가 없었기에, 마음 놓고 이리하는 것일까?
“방금 연유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물과 싸우다 죽은 영웅들이니, 최대한 존중하자고요.”
황자의 침묵이 길어지자, 퀸타나가 대신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 하지만 하이만은 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웃기만 했다. 명백한 무시였으며, 압박이다.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할 죽음이거늘, 그걸 치하하기 위해 무리하시는 듯하여 말입니다.”
“…하이만 경.”
“예. 저하.”
진이 낭창하게 하이만을 불렀다. 어찌나 맑고 또렷한지, 울림이 깔끔하다. 턱을 바로 들자, 조명으로 인하여 벽안의 눈동자가 더욱 반짝였다.
“제국을 위해 죽은 자의 말로가 비참하다면, 대체 그 누가 위기 때 나선단 말인가? 희생한 자들을 모욕하지 마시게. 그들은 대의를 위해 그리하였고, 우리는 그것에 감사할 의무가 있다. 명예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산 자가 할 수 있는 제일 하찮은 방법이라.”
무엇보다, 다른 자들도 아니고 귀족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제국에 위험이 처했을 때, 예를 들어 전시 따위의 상황에서 제일 먼저 차출되고 희생될 자들이 귀족이었다. 그런데 어찌 저런 발언을 해?
“제국의 위기를 그저 보고만 있을 자라면, 뭐. 희생한 자들의 넋을 헤아리지 못하겠지. 음. 혹여 다른 의견이 있다면 편히 나누어 주시게나. 내 아직 미숙하여, 작은 사견이었네.”
여기서 더 덧붙이면 ‘제국의 위기를 그저 보고만 있을 자’가 되는 것 아닌가? 진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환히 웃자, 퀸타나와 수상이 놀라움을 숨기며 서로 힐끗거렸다. 어리고, 경험이 없다는 것은 진의 절대적인 약점이었다. 하지만 그걸 어설프게 숨기고, 치장하기보다 대놓고 드러내어 무기로 쓰고 있지 않나.
‘이안 경이 참으로 잘 일러주었군. 결만 다르지, 그의 기세를 단단히 닮으셨다.’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하이만에게 쏠렸다. 그는 기가 찬다는 듯 볼 안쪽을 깨물었으나, 이내 낯을 바로 하고 의견을 이었다.
“…아니요. 저는 단지 저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올린 것이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오해는 무슨, 당치도 않소. 원래 회의라는 게 이런 것 아닌가? 최선을 찾으려면, 차선의 존재 역시 중요하네. 그래야 최선이 최선인 줄 아니까.”
하이만의 발언이 영 쓸모없었다는 것을 저리 빗대어 말씀하시다니. 퀸타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를 뻔하였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나? 독기를 단단히 품으신 것이라.
그도 그럴 게, 상대는 다른 귀족도 아니고, 하이만이었다. 견제하던 아르센의 중추 세력이자 마리브, 게일의 내란부터 거슬러왔던 귀족들의 정수.
“한데, 하이만 공작.”
“예, 저하.”
“그대, 괜찮은가?”
느닷없는 물음에 하이만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진은 순진함을 가장하여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를 제외하면 마물이었던 아르센과 제일 많이 접촉하였잖아.”
마물과 결속하였던 걸 짚는 처사였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아르센의 마력을 믿고 돌아선 자들이었으니, 다들 긴장하여 입술에 침만 바짝바짝 발라댔다.
“예. 저도 모르는 사이 세뇌되어, 오욕할 뻔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법사와 신관들이 재차 확인해 주어 지금은 문제가 없다 합니다.”
“그래? 세뇌였다?”
시간이 지나면, 이안이 깨어난다면 들통날 거짓말을 태연히도 하는구나. 하지만 진은 연신 고개만 주억거리며 뭔가를 고심하는 척했다.
“한데, 저하…….”
하이만이 무어라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수상의 부하가 들어오더니, 그에게 무언가를 급히 전언했다. 수상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지며 하이만을 바라봤다.
무슨 일일까? 진이 의아하게 되물으려 했으나, 수상은 봉을 내려치어 막아냈다.
타앙! 탕!
“실례하오. 한 시간 정도 휴게 시간을 갖겠소.”
당황해하는 귀족들을 뒤로하고서, 수상은 진에게 속삭였다. 마리브와 게일, 심지어는 황제도 부재한 현재. 황궁에 남은 자는 그가 유일했으니까.
“저하. 루스웨나에서 공식 사절단이 도착했다 합니다. 제 선에서 먼저 만나볼 터이니, 우선은 자리를 지키고 계십시오.”
루스웨나! 어째서 지금? 진은 표정을 관리하며 하이만 쪽을 힐끔거렸다. 그 역시 다른 귀족들과 뭔가를 급히 논의하고 있었다. 하나, 아직 저들은 알 길이 없을 것이라.
수상이 회의장을 나가자, 하이만은 넌지시 안부를 물어왔다.
“저하. 저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네.”
“아무래도 황실의 축복 덕인 듯합니다. 다행이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소문이 떠도는데, 혹여 사실인지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마물이 죽기 전, 이안 경이 황족이라는 말을 남겼다 하던데요. 사실인지요?”
담배를 태우려고 일어났던 퀸타나가 어이없이 몸을 돌렸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상식의 범주를 훨씬 벗어난 물음이다. 하이만이 갈 데까지 갔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대꾸했다.
“공작님. 발언이 놀랍습니다. 서기가 없다 한들, 여기는 황궁이에요. 저하 앞에서 그 무슨-”
“신성으로 가득한 대신관까지 속절없이 쓰러졌다. 그런데 이안 경이 무사한 게 의아해서 되묻는 말이네. 무에 그리 예민하게 반응하는가?”
퀸타나가 담뱃대를 뽀각 부러트리며 받아치려고 하자, 진이 손으로 막아냈다. 아이는 연신 웃음을 띠고 있었다.
“공작. 이안은 마법부의 장관이오. 마력의 세기가 남다르니, 마물의 수작 따위는 통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소?”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공작에게 다가갔다. 쉬는 시간인지라, 다들 제 일을 보고 있는 듯하여도 은근히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혹여 아니더라도, 마물이 혼란을 주기 위해 이안을 제외하여 능력을 썼을 수도 있지.”
“그래요. 그럴 수 있습니다.”
“이안이 황족이라니. 하하하. 자네는 황궁을 두 번이나 구한 자보다 마물의 말을 더 의식하는 듯하군. 혹여, 아직 세뇌가 덜 풀린 것 아닌가? 마법부에 가서 추가 조사를 받으시게.”
가까이 다가온 아이에게, 하이만 역시 허리를 가볍게 접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이안이 황족이라는 건, 그저 반향을 일으키는 도구에 불과했다. 본질은, 이안과 진 사이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는 아주 작게 제안했다. 마치 악마처럼 간지러운 속삭임이다.
“저는 그저 저하가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마물이 말하기를, 이안이 속내를 감추고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번 시험해 보시지요.”
이안이 장관직에 올라, 대외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붙이던 일. 아무리 생각해도 불필요한 일이건만, 사리에 맞지 않게 포기하지 않았던 일.
“마법부 별관 건설 건이 적당하겠군요. 그저 마법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니, 저하께서 반대하면 이안이 어찌 나올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