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42
제242화. 루스웨나 사절단
루스웨나 사절단은 황궁 본관에서 제일 먼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애초부터 기별 없는 방문이기도 했거니와, 황궁 내부의 소란스러움을 최대한으로 숨기려는 의도였다.
보좌진을 이끈 수상이 재촉하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사절단 대표로 온 자가 엘더트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루스웨나의 현 12대 왕, 에리포니의 사촌이자 최측근입니다. 현재 왕의 자문관 역을 맡고 있다 합니다. 자문관 전에는 루스웨나 국립대의 도시공학과 교수직을 맡은 이력이 있습니다.”
“…교수직을? 젊어 보이던데.”
수상은 휴게 동안 잠깐 보았던 그를 떠올리며 감탄했다. 왕의 측근이 왔을 정도면, 그쪽에서 하이만의 도움 요청을 가벼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긴, 애초에 그리 여겼더라면 이리 황궁으로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
수상은 희멀건 눈동자를 찌푸리며 아치형 중문에 들어섰다. 응접실 좌우로 서 있던 시종들이 기척을 알아채고 안쪽에 기별했다.
끼이익.
“수상님 드십니다.”
문이 좌우로 젖혀지자, 소파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자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호위들을 제외한 사절단은 모두 다섯. 그중 대표인 엘더트가 제일 늦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청록색 긴 생머리에 째진 눈, 그와 반대되게 부드러운 입매가 도드라지는 사내다.
“오, 수상님.”
“오래 기다리시었소.”
“아닙니다. 이리 고즈넉한 응접실을 내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여독이 바로 풀리는 것 같습니다.”
엘더트의 인사치레에 보좌관들이 흠칫거렸다. 황궁의 제일 안쪽, 인기척 없는 곳을 내어주었다는 걸 돌려 말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난장판이 된 대회의를 수습한다고 시간이 꽤 지체되어 있었다. 일반적이었다면 사절단은 응접실이 아니라 처소를 배정받아 쉬고 있었어야 할 시간. 그런데도 접대하는 자 없이 방치되어 여태 응접실에 있었으니. 여독이 풀리기는커녕 쌓이는 게 옳을 것이라.
제국과 왕국의 관계를 차치하고, 이는 명백히 황궁의 실수 아닌 실수였다.
‘어허, 이것 보시라?’
하지만 어쩌겠나? 갑작스러운 방문에 황제가 직접 나서는 건 있을 수 없었고, 지금은 그리할 수도 없었다. 외국 사절단 맞이는 평소 마리브 소관이었지만, 그는 죽었다. 외교부? 사절단을 맞이할 만큼 지위가 있는 자들은 모두 대회의에 묶여있었다.
“황궁의 모든 것은 제일이라. 무엇이 되었든 그대들의 여독을 풀기에 충분하지. 앉으시오.”
하이만을 빌미로 제국의 균열을 노리는 주제에, 감히 어디서 혓바닥에 날을 세운단 말인가? 너희들에게는 이만한 대접도 과분하다며, 수상은 마찬가지로 웃으며 응대했다. 보좌관들과 사절단 부하들이 냉랭해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숨죽였다.
“그래. 머나먼 루스웨나에서 여기까지 어쩐 용무이신가? 내 전해 듣기로는 하이만 공작을 찾는다 들었는데.”
바로 인접한 이웃국이었지만, 수상은 일부러 ‘머나먼’이라는 단어를 덧붙였다. 이는 단순히 거리감을 주거나, 기선 제압을 위한 화술이 아니었다. 세계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접경한 국가끼리 사이가 좋은 예는 없었으니까.
“하이만 공작께서 입궁해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뵙고 싶다 하였지요. 큰 의미를 두지는 마시옵소서.”
그어진 경계선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오기 위해 벌어지는 전쟁과 분쟁 그리고 그로 인하여 심어지는 증오, 분노, 혐오. 물론, 바리엘은 제국이고, 그들은 왕국이었기에 역사 속에서 승기를 잡아 온 쪽은 당연히 바리엘이었다.
하지만, 루스웨나는 비옥한 토지를 중심으로 자급자족이 활성화되어 있고, 다른 나라와 비견했을 때 왕족의 정통성이 완벽하다 할 만큼 잘 지켜지고 있었다. 민족성이 얼마나 뚜렷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였다.
“하면?”
“다름 아니라, 황궁에 여러 소란이 있다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심려하실 것을 우려하여, 저희의 왕께서 간소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엘더트의 눈짓에 그의 부하가 작은 상자를 꺼냈다. 루스웨나에서만 난다는 검은 보석들 그리고 진귀한 약재들이 잔뜩이었다.
수상은 수염을 만지며 엘더트를 찬찬히 살폈다. 보석은 그렇다 치고, 약재의 의미가 무엇인가? 황제의 상태가 대외적으로 위중하다는 건 아는 듯했다. 그러면 동결은? 하이만이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
“괜찮으시다면, 이를 직접 폐하께 올릴 영광을 허락해 주십시오.”
“안타깝지만 그럴 수는 없네. 폐하의 업무가 과중하여, 약속 없는 만남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으심이라. 에리포니 왕의 성의는 내 꼭 강조하여 전하겠네.”
수상은 불허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보좌진이 상자를 정성껏 들어 응접실 밖으로 내갔다.
또 다른 용건이 있나? 수상은 눈짓으로 되물었고, 엘더트는 싱긋 웃기만 하였다.
“아쉽지만 그리 해주신다 하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푹 쉬시게. 말들이 고될 터, 새로운 것들로 준비해 놓으라 하지.”
하룻밤. 딱 하룻밤만을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노골적인 대접에 사절단들의 입매가 절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불균형적인 외교. 거기에 일방적인 방문이었으니, 도리가 없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상으로서는…….
‘별궁 제일 안쪽 방을 내라 하여야겠다. 이자들이 출궁할 때까지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야겠어. 하필이면 오늘 와서는, 쯧.’
마물 아르센 사태가 일어난 날이다. 바리엘 역사에서도 완전히 지워질 날이거늘.
외부인이 궁에 기거한다면 변수를 예측할 수 없었다. 체면상, 딱 하루. 아니지, 아침까지의 열 시간. 그것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그때, 엘더트가 넌지시 말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하이만 공작님과 함께 출궁하겠습니다. 본관 쪽에 계시다 들었는데요.”
몸을 돌리려던 수상이 멈칫거리고 그를 돌아봤다.
“…하이만 공작과?”
“예. 아시다시피, 공작 부인께서는 루스웨나의 왕족이시지 않습니까. 왕께서 전하라 하신 서신이 있는지라, 그것이 좋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이리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인데,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당장 나가는 것은 환영이다만, 하이만과 함께? 공작의 행적을 일러주면 황궁 상황에 관하여 단서를 주는 것이다.
일러주지 않으면? 하이만이 황궁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에 의문을 품고 공식적으로 제기하여 더 큰 사절단의 방문 빌미를 주는 것 아니겠나.
이러나저러나 조금 난감하다.
“수상님?”
“…하이만 공작께서는 황실 모독 및 소란죄로 구류 중이시네. 마리브와 게일 저하의 내란에 대해서는 알 것이라.”
호외부터 시작해서 이안이 마도구로 중앙 곳곳에 알렸던 사안. 이는 인접한 왕국뿐만 아니라 바리엘 제국의 존재를 아는 곳이라면 모두 전해 들었을 내용이다.
“그에 관한 재판일이 곧 선고될 터. 아마 당분간은 출궁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네. 사절단은 여독을 풀고 홀로 돌아가시게.”
“아아. 그렇습니까?”
엘더트는 자못 놀란 기색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제아무리 왕가의 사위라고 하나, 어쨌거나 바리엘의 공작. 내란죄에 엮여 재판을 받는다면 방도가 없다. 무엇보다 황제가 만나주질 않는데, 어찌 교섭을 하겠는가?
수상은 그만 쉬라는 뜻으로 옷깃을 휘날리며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콰앙!
문이 닫히자, 엘더트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소파에 몸을 맡겼다. 그의 부하들은 넥타이 따위를 느슨하게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늦었나 봅니다.”
“재판일이 잡혔다면 정세가 5황자 쪽으로 기운 것 같은데요. 이거 참. 왕께는 무어라 전언하지요?”
“조금만 더 일찍 올 걸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이만 자체를 구하는 것보다, 그들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원했다. 내란죄로 멸문한다면 재산은 모두 바리엘에 귀속될 것이니, 그 전에 공작이나 공작 부인을 망명하게 하여 재산 전체를 루스웨나로 빼돌리려는 게 목적이었다.
하이만은 부인이 왕족인 걸 내세워 군대라도 들이밀어 오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그게 가능할 리 없잖은가. 솔직히 말한다면, 왕께서는 오히려 하이만이 ‘법적인 문제 없이’ 죽기를 바랐다.
“내란죄면 부인도 엮일 가능성이 큽니다. 흐음.”
부인이 홀로 남는다면, 귀국을 회유하여 하이만 가문의 재산을 흡수하는 게 최상의 계획이었다. 그리하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리엘 제국의 경제 주도권에 숟가락을 들이밀 수 있게 되니까.
“엘더트 님. 어쩔까요?”
“잠시, 고민 좀 해보지.”
그는 비단 같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정문 앞을 기억하는가?”
“정문이요? 예예. 뭐, 마차며 사람들이며, 늦은 시각치고는 인파가 꽤 있었지요.”
“밤중에는 당연히 황궁의 출입이 제한된다. 한데 어째서 그들은 앞에 모여있었던 것일까? 이는 기다림의 연속이라 보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낮부터 그러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어째서요?”
“글쎄다. 뭐, 황궁 문이 안 열려서?”
엘더트의 짐작에 부하들이 어깨를 으쓱댔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인데 정문이 안 열릴 리가. 차라리 봉쇄라면 몰라.
“그리고 원래 사절단 전용 응접실은 본관 층에 있지. 아무리 우리가 기척 없이 왔다 하여도, 이는 좀 특별난 경우 같은데.”
황궁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 혹은 벌어지고 있다. 엘더트는 그리 짐작하며 남은 차를 홀짝였다. 아무래도 당장 내일 떠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많았으니.
“자아. 다들 차를 남김없이 먹어라.”
“헉. 그거…….”
“엘더트 님. 한 명만, 한 명만 희생하면 안 됩니까요?”
“안 된다. 모두 마셔.”
“아이고, 미치겠네.”
엘더트는 부하들의 찻잔에 미리 준비한 고운 흑색 가루를 톡톡 털어주며 웃었다. 배탈을 일으키는데 아주 탁월한 가루였다.
* * *
지이잉. 지잉.
이안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뜨이는 눈꺼풀.
몽롱하여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갔지만, 이내 몇 번의 깜빡임 끝에 깨끗한 시야를 되찾았다.
헤일이다. 그는 불붙이지 않은 궐련을 깨물고서 마력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이안의 회복을 위하여, 마법사들은 빠짐없이 돌아가며 마력을 주입했다.
“…헤일.”
목소리가 나온 게 맞나? 이안은 스스로 의문스러워하며 손가락을 몇 번 까딱거렸다. 그러자 정신을 놓고 있던 헤일이 벌떡 일어나 바깥에 소리쳤다. 우렁차다 못해 천둥처럼 찢어지는 소리다.
“이안 님 일어나셨드아아아!!”
“이안 님 일어나셨다고요?”
벌컥!
콰앙! 쾅!
우당탕탕! 타앙!
“야, 의사 불러와!”
“헤일 대장, 그새를 못 참고 또 궐련을!”
“아니, 그냥 물고만 있었는데.”
“이안 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저 알아보시겠어요?”
“아이고, 비켜라. 비켜. 이안 님!”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각색의 목소리에 이안의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겨우 중얼거렸다.
“다들 조용히 좀…….”
“헙. 죄송합니다.”
“닥쳐, 다 닥쳐!!”
“네가 제일 시끄러워, 새꺄.”
이안은 희미한 한숨을 내쉬며 물을 달라 요청했다. 상체가 세워지고, 입으로 조금씩 미지근한 물이 흘러들어왔다. 그러자 조금 더 쉬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아직.”
이안은 이마를 짚으며 잠시 침묵했다. 마법사들이 모두 그의 안정을 기다리며, 함께 조용해졌다.
몇 분 후, 이안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진 저하는?”
“저하는 주무시죠. 시간이 새벽인데.”
분명 잠결에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누이며 손을 까딱거렸다. 무슨 뜻일까?
머뭇머뭇, 헤일이 그사이에 궐련을 끼워주자, 이안은 단박에 떨구어 던지며 대꾸했다.
“잠든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는지, 정리해서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