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43
제243화. 침대 위의 숙청
로만드로를 간호하던 비비안나가 이안의 소식을 듣고 집무실을 찾았다. 과다출혈 한 것치고는 정신을 일찍이 차렸다며, 오가는 마법사들이 안도하는 말소리가 조곤조곤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차를 쟁반에 받쳐 들고 모퉁이를 돌았다. 반쯤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필리아. 비비안나가 놀라서 그녀를 불렀다.
“부인?”
“아, 안녕하세요.”
“여기서 무엇 하세요? 안 들어가시고요?”
“일어났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 잠깐 보니까 마법사님들이랑 대화하는 것 같더라고요. 혹 방해될까 봐 기다리는 중입니다.”
필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손끝을 꼬물거렸다. 복도 창가에 놓여있는 보리죽. 차게 식은 것으로 보아,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안이 어릴 때 아프면 언제나 보리죽을 찾았거든요. 황궁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한지라, 이제 이런 건 안 먹겠지만요.”
“제일 힘들 때 기억나는 것이 어릴 때 먹던 음식입니다. 부인. 걱정하지 마시고 함께 들어가셔요.”
“아, 그럴까요? 하하. 같이 들어가면 좋겠네요.”
아이고, 이런 들꽃 같은 사람아. 비비안나는 여인의 기쁜 낯을 보며 안쓰럽게 웃었다. 어쩜 이목구비는 이안과 똑 닮았거늘 성정이 저리 가늘단 말인가. 비비안나는 문을 열어주며 안내해 주었고, 필리아는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익.
“이안 님?”
비비안나가 인기척을 내며 안으로 들어서려다가 멈칫거렸다. 집무실의 작은 침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탓에, 이안의 모습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푹신한 베개와 쿠션에 파묻혀서는 보고서를 넘겨대고 있었다.
차락.
“부인, 로만드로 님은 좀 어떠신가?”
“꺄아아악! 이게 대체 무슨 짓이세요?!”
비비안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피를 진창 흘려놓고, 정신 차리자마자 업무라니! 이안이 미쳤거나, 저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옆에서 마력을 주입하고 있던 헤일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부인. 괜찮으시오?”
“괘, 괜찮을 리가요! 그럴 리가요! 이안 님, 이게 대체 무슨 광경입니까? 절대안정(絕對安靜)이라는 단어를 혹시 모르십니까? 대체 어느 냉정한 인간이 눈 뜨자마자 이안 님께 보고서를 건네줬단 말입니까? 예?”
허업. 헤일은 순식간에 냉정한 인간이 되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비비안나가 경악을 금치 못하자, 이안은 보란 듯이 보고서를 흔들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누워있지 않은가.”
“누워있다고 만사가 아닙니다!”
도대체 마법부에 베드트레이가 왜 있단 말인가?
비비안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나무 상판을 똑똑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모든 게 푹신하고 완벽한 각도로 고정되어 있으니, 그저 손목만 움직이면 된다. 그가 느긋하게 고개를 쳐들자, 비비안나는 제 이마를 짚어버리고 말았다.
“로만드로 님은?”
“…아직입니다만, 중간에 일어나서 식사까지 할 정도로 호전되셨습니다.”
“미안하게 됐군.”
“어찌 그러셔요.”
“나는 마법사들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그대의 남편은 온전히 스스로 이겨내야 하니까.”
차락.
이안이 보고서를 다시 한 장 넘겼다. 여전히 피곤함이 물씬 서려 있었으나, 시선은 올곧다. 그는 손끝만 까딱거리며 헤일을 재촉했다. 마력 흘려 보내는 걸 멈추지 말라는 듯이.
“아 참, 필리아 부인. 들어오셔요. 괜찮습니다.”
비비안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기겁하여 경기를 일으켰으니, 필리아는 덩달아 놀라서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이안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이안.”
그녀는 쟁반을 받쳐 든 채 쭈뼛거리며 모습을 보였다. 그걸 본 이안이 쿠션에 몸을 깊이 맡기며 싱긋 웃었다. 피 칠갑을 한 채로 사경을 헤맸던 아들이다. 이 정도 미소는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작은 배려다.
“걱정 많으셨지요?”
“보, 보리죽을 가져왔어.”
“감사합니다. 마침 배가 고팠어요.”
헤일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극심한 피로로 인해 식욕이 없다며 주방에서 올라온 음식을 모두 쳐내지 않았나? 무엇보다 배가 부르면 더더욱 잠을 이길 수 없다며, 이안은 마력만으로 몸의 에너지를 채우는 중이었다.
“다만, 아직 속이 어지러운지라 두시면 나중에 먹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먹을 리가 없지. 헤일은 고개를 짧게 주억거리며 마력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지이잉. 지잉.
“그래. 데, 데워 먹으면 더 좋을 거야.”
“네. 아랫것들에게 시켜 그리하도록 하지요.”
필리아는 감격에 찬 시선으로 이안을 힐끗거렸다. 쿠션에 푹 묻혀있는 모습을 보니, 어릴 때 아들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 탓이다.
아아. 참으로 귀여웠지.
지금도 귀엽긴 하다만, 그때는 정말이지…….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그리고 줄 게 또 있어.”
필리아는 잡념에서 깨어나 손을 내저었다. 그러곤 다급한 손길로 주머니에서 쪽지들을 꺼냈다. 꾸깃꾸깃하고 음식물이 잔뜩 묻어있는 것들이다. 이안은 처음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이내 가늠했다는 듯 짤막하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게일 저하의 선물이로군요.”
망명의 소문을 이용한 변절자의 접촉. 그가 협조하여 흔적을 모아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어찌할까 방도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리되면 일이 훨씬 수월하지.
“그런데 종이 하나는 저하가 태워 버렸어. 반이라도 구해볼까 했는데,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버렸더라고.”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어머니.”
이안의 인사에 필리아가 활짝 웃었다. 도움이 되었다는 뿌듯함이 미소를 타고 주위에 넘실거렸다.
아무래도 이것은 이안에게 주는 호의라기보다, 꼬박꼬박 함께 식사해 주었던 필리아에게 남기는 값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어디 한번 보자.’
이안은 종이를 하나씩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친히 이름을 적어준 자도 있고, 아닌 자도 있다. 필적이 워낙 또렷한지라, 대조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듯했다.
“…헤일.”
“네. 이안 님. 마력 계속 넣고 있습니다.”
“저기, 저 가운데 책장 왼쪽부터 두 칸 옆까지가 중요 보고서 보관함일세. 명단 확인하여 각 한 명씩 제출했던 보고서를 가져와. 그리고 다이넬스, 브레넌, 페트릭을 호출하고. 음. 황궁의 필적감별사도 부르지. 보통 두 명에서 세 명이 재직 중이라, 한 명 정도는 궁에 남아있을 걸세.”
줄줄 쏟아지는 명령에 헤일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되묻는 말 없이 바로 일어나서 집무실 밖 부하들을 불렀다. 그가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이안은 멈춤 없이 보고서를 넘겨댔다.
“이안 님. 정말 일 계속 하실 거예요?”
“그, 그래. 이안아. 너 피 너무 많이 흘렸어…….”
“당장 급히 할 일만 먼저 하고 또 쉬겠습니다. 뭐든 시기가 있는 법이니까요.”
아르센을 처리함으로 그 주위에 들러붙어 있던 벌레들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튀어 오르는 중이었다. 지금 잡지 못하면, 그것들은 도망치리라. 하여, 다시금 안 보이는 곳에서 알을 낳고 좀먹으며, 언젠가 또 볕으로 기어 나오리라.
‘진 저하께서 하신 말이 이거였군.’
대책 회의는 기록되지 않아 헤일 대장의 대면 보고로만 이안에게 넘겨졌다. 게일의 죽음을 역사에 어찌 기록할 것인지, 그리고 희생된 자들은 어찌할 것인지 등등.
하지만 고발장 적격성 판단 여부는 아르센과 별개인 사안이었기 때문에, 이리 보고서로 작성될 수 있었다.
‘그래. 칭찬해 드릴 만하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입가로 미소를 품었다. 관료가 모두 모인 자리를 아주 훌륭하게 활용하시었다. 거기에 거수한 순서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 나름 공격적인 의사를 보인 것이라.
이안이 피식 웃자, 비비안나와 필리아가 서로를 힐끔거리며 의아한 눈짓을 나누었다. 보고서를 무슨 소설 읽는 것처럼 저리 재미있게 읽는지, 원.
똑똑.
그때, 바깥에서 마법사가 기별을 전해왔다.
“이안 님. 수상님 오셨습니다.”
“수상님이? 모시게나.”
두 부인은 이안에게 안정을 당부하며 밖으로 나갔고, 이내 얼마 안 있어 보좌진을 대동한 수상이 집무실에 당도했다. 그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어쩐지 더 희어 보였다. 주름도 깊어진 것 같고…….
‘대회의에서 고생 좀 했나 보군.’
“안녕하십니까. 수상님.”
수상은 쿠션에 파묻혀 있는 이안을 보고서 잠시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누워있으라 손짓하며 의자를 침대 가까이 끌어왔다.
“계속 누워계시게. 몸은 좀 어떠신가?”
“감사합니다.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아. 다행일세.”
손에 보고서가 들려있는 걸 보고 한 말이었다. 이안은 마침 잘되었다는 듯, 상체를 더욱 세우고 펜을 바로잡았다. 그는 우선 마법사들의 이름을 적어 내렸다.
“현재 마법부에서는 변절자를 가리고 있습니다.”
“변절자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으나, 개중 상당수는 하이만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결탁은 곧 아르센 사태를 일으키는 데 일조한 격이 있으니, 이에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는 게 마법부 수장으로서의 입장입니다.”
딱히 마법부가 아닐지라도, 부하가 상대편과 붙어먹었는데 가만히 있을 상급자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수상은 우려를 표했다.
“처벌이라면 어떤? 지금 마법부는 인력이 부족하지 않나. 한 사람이라도 간절하다 여겨지는데. 이는 마법부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 전체의 문제라네.”
“사망자 중 변절자가 있다면 게일 저하의 죽음에 묶어서 반역죄로 기록할 것이고, 아닌 자들은 지위를 격하하여 고정할 것입니다.”
죽이는 것은 인재의 가치에 비해 정도가 과하고, 변방이나 외국으로 보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마법사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할지, 누구와 결탁할지 어찌 안단 말인가?
제국의 마법사들이 수도에 모여있는 것은 그 수가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려는 황궁의 의도이기도 했다.
“지위 격하라. 퀸타나가 좋아하겠군.”
급여 삭감 및 각종 혜택 박탈 그리고 돌아올 동료들의 멸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통 밑바닥에 버려두는 게 낫다.
“그리고 보고로 들었습니다. 현재 하이만 공작과 그의 주축들이 구류되어 있다고요. 황실 모독 및 소란죄 명목으로는 길어도 사흘 아닙니까? 그 전에 재판일이 잡힐 것 같습니까?”
“음. 사법부에서도 최대한 협조해 주려 하고 있네. 그때, 마법부의 고발장 접수 당시 사법부 단체 결석이 공론화되고 있거든. 하이만에서 손을 썼다는 게 거의 확실시 되고 있어서.”
실제로 사법부는 아주 질겁하여 소스라치게 놀라는 중이었다. 청렴결백의 결정체라 여겨지는 그들이었건만, 알게 모르게 하이만의 마수가 끼쳤고, 그것이 꽤 효과적으로 먹혔다는 것에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차락.
이안은 천천히 글자를 읊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것보다…….”
“음?”
“하이만 가를 비롯한 중앙 귀족들의 재산을 국고로 환원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두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니까요. 하이만 공작 부인을 비롯하여 그 자식들까지 철저히 해주세요.”
황궁의 각 부서는 국가 예산 확보로 인한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고, 이것이 마법부에 협조적으로 나오는 주요 이유였다. 하이만과 대척점을 이룬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세르오, 그는 하이만 가의 재산이 분할되어 그 틈을 치고 가는 걸 목적으로 하지 않나.
“내란죄만 성립된다면 멸문인지라, 국고 환원은 자연스럽겠지만 혹여 그 전에 변수가 생기면 곤란합니다. 공작 부인이 루스웨나 출신이라 하지 않았던가요?”
“아, 그래. 이안 경. 내 그걸 이르려고 이리 들렀네. 루스웨나에서 사절단이 왔는데, 아무래도 하이만이 부른 것 같더군.”
“그렇습니까?”
“원래라면 오늘 아침 출궁인데, 아, 그자들이 모두 배탈이 심하게 나서 앓아누워 버렸지 뭔가.”
수상 역시 그것이 의도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에서 대접한 차가 사달의 중심이요, 그쪽에서는 다른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며칠 더 지내며 쉬는 것을 간청했다. 한 나라의 사절단을 모질게 내칠 수가 없는 노릇인지라, 참으로 난감하다.
이안은 눈썹을 까딱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사서 고생들 하는군요.”
이안은 펜으로 사각사각, 뭔가를 적어 내렸다. 앞으로 할 것들에 관한 지시였다.
“수상님. 하이만과 중앙 귀족의 제압은 황권 강화의 초석이라. 이는 곧 대국으로 나아가는 길이지요.”
“동의하는 바일세.”
황권이 강화되면 수상의 권한 역시 줄어들게 된다. 그럼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동의한다 이르다니. 황제가 다른 건 몰라도 수상 자리만큼은 적격자에게 맡긴 것 같다.
“숙청의 시간입니다.”
숙청.
수상은 고개를 끄덕인 채 이안의 보고서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마무리되면, 우리 진 저하의 공식 후계 임명식을 진행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