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44
제244화. 이것이 피바람
“저하.”
“우웅…….”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시아오시가 나지막이 진의 아침을 깨웠다. 언제나처럼 침대 머리맡에 무릎 꿇고서, 조심스러운 음성이다.
진은 베개로 얼굴을 파묻으며 잠투정 아닌 잠투정을 부려댔다. 제아무리 황가의 아이라고 한들, 무의식적인 본능까지는 어쩔 수 없지 않나. 시아오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금 말을 덧붙였다.
“새벽에 이안 님이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응?”
“진 저하가 일어나시면 바로 준비하여 집무실로 와달라 청하셨어요. 부탁할 것이 있다고요.”
반쯤 감겨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몽롱하던 잠기운이 찬물에 씻겨가듯 한번에 사라지는 기분이다. 아이는 이불을 걷어내며 단박에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이안 경이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 보이셨습니다. 저하, 잠옷 차림으로 가실 것입니까?”
“아차차. 잠깐. 세숫물! 세숫물을 들라.”
평소답지 않게 허둥지둥 서두르는 진이었다.
반면 시아오시는 차분하게 옷가지를 준비하였고, 세숫물 온도를 확인하였으며, 아이의 머리치장 도구를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진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 잠깐의 기다림이 아이의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안 경이 무엇을 부탁한다 하던가?”
“자세히 듣지는 못하였습니다만, 저하께서 처리해 주실 일이 있다 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
진은 치장을 받는 동안 연신 문 쪽을 힐끔거렸다. 최대한 자중하고 있긴 하지만, 시종들도 아이의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걸 알아챘다. 덩달아 그들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저하. 다 되었습니다.”
“수고했다.”
“시아야, 가자.”
진은 점잖은 몸짓으로 시종들을 물리고 침실을 나섰다. 처음에는 그저 자박거리는 발걸음이었으나, 이내 가면 갈수록 힘이 실렸다. 타닥타닥! 그들이 이안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가쁜 숨을 들이쉴 정도였다.
끼이익.
업무로 인해 몇몇이 계속 오가는 모양인지, 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진이 조심스레 인기척을 내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안 경?”
“저하.”
이안은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여전히 파리한 안색이긴 했으나, 피 토했던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안정화된 모습이다.
이안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진을 반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하.”
“좋은, 좋은 아침일세!”
“예. 헤일 대장에게 보고서로 전해 들었습니다. 대회의에서 큰일을 하셨다지요. 제가 못 했던 것을 이리 해주시어, 어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요.”
진의 볼우물이 서서히 패였다. 만개한 꽃봉오리가 터져 나가고, 흰 구름에 노을이 물들어가는 것과 같다. 진은 치아를 가지런히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감사 인사는 무슨! 몸은 괜찮으시오?”
“덕분에요.”
이안의 시선이 구석 소파로 슬쩍 흘러갔다. 그곳에는 반쯤 넋 나간 헤일 대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몇 시간 동안 교대 못 하고 마력을 주입한 탓이었으나, 아이가 알 턱이 없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부탁할 게 있다면서?”
“사법부에서 하이만의 재판 일정을 잡아주기 전, 해둘 것이 많아서요. 잘 아시겠지마는 귀족의 작위 수여와 박탈은 황제 폐하 고유의 권한입니다.”
건국 초반, 특히 황제의 권한이 제일 강했고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시기에는 작위의 수여와 박탈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그것이 황제의 총애를 증명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세대가 지날수록 나라는 안정되었고, 토지와 작위 그리고 귀족의 권한은 세습 및 계승되었습니다. 중죄와 엮이지 않는다면, 폐하께서도 명분 없이 그들의 수혜를 앗을 수 없게 되었지요.”
사락.
이안은 진 앞에 서류를 몇 장 내밀었다. . 맨 아래쪽에는 수상과 이안 본인의 직인이 찍혀있었다.
“재판을 앞둔 지금, 하이만과 그 귀족들의 혐의가 뚜렷하니 미리 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게 주된 의견입니다. 진 저하만 허락하신다면, 수상께서 이를 처리할 것입니다. 재산 동결 및 구류 일수 제한 해제, 사병 축소 강제 집행 등, 여러 방면에서 귀족들을 압박할 수 있지요.”
하이만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그와 묶인 세력들을 한번에 뭉쳐서 누를 수 있는 것이라.
특히 사병 축소 강제 집행의 경우, 여차하면 일어날 무력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일 터.
“가능하겠는가?”
황제도 쉬이 못 하는 결정을, 대리인들끼리 내려도 되겠냐는 물음이었다. 이안은 걱정하지 말라며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예. 가능할 것이란 판단이 듭니다. 황실의 유일한 후계 순위이신 저하의 허락이 필요하지만요.”
감히 그 누가, 귀족의 직위 박탈에 반하여 나설 것인가? 이는 황실과 귀족 간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 황실에서 하는 일방적인 숙청이요, 권력 굳히기의 일환이니,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리라.
“수상과 행정부에서 저하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답니다.”
“행정부에서도?”
“귀족들의 재산 몰수가 곧 국고에 이익으로 돌아올 터이니까요. 제국방위부에서는 귀족들의 사병과 무기 등을 기다리고 있고, 문화부에서는 예술품을 원하고 있습니다.”
황궁의 모두가 이를 드러내며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다. 빳빳한 목대를 붙잡았을 때 꺾어버리면 이만한 본보기가 어디 있겠나?
진은 이안 앞에 놓인 펜을 가져오더니, 망설임 없이 서명을 그려 넣으려 했다. 그때 이안의 손날이 이를 가볍게 저지했다.
“저하.”
“응?”
“서명은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니, 아무리 믿을 만한 자가 건네는 것이라도 쉬이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글자 하나하나, 의미와 어감 따위까지 철저히 따지시어 확인하세요.”
아하, 진은 펜 끝으로 볼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읽으시고, 모르는 게 있으면 하문하십시오.”
“응. 알겠네.”
아이는 널브러진 헤일 옆에 앉아 서류를 넘겨댔다. 저 작은 황제께서는 모를 것이다. 이는 그가 황자로서 최초로 착수한 업무라, 역사에서 ‘진 베로시온’을 언급할 때 처음 등장할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라니. 열 살 난 나이에 중앙 귀족을 제압하는 자로서 기록될 게 분명했다.
“음. 이안 경?”
진은 앞 장부터 막혔는지, 부끄럽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예. 저하.”
“이 부분, 설명을 부탁하오.”
이안이 담요를 내리며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갑작스레 문이 젖혀지며, 마법사 한 명이 난입했다.
벌컥!
우당탕탕!
진은 멈칫거렸고, 널브러져 있던 헤일은 반사적으로 아이를 뒤로하여 방어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곧 난입한 자가 마법사 동료‘였던’ 자라는 걸 알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페트릭. 무슨 소란인가.”
“이, 이안 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게일의 쪽지에 쓰여있던 변절자 중 한 명이다. 바로 따라 들어온 경비와 마법사들이 그를 제압하여 끌어냈으나, 그는 발악하여 문고리를 잡고 버텼다.
“이안 님! 이안 님!”
“젠장, 페트릭! 이러면 너만 곤란해!”
“저, 변절자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황자 저하도 계신다! 죄를 더 지을 셈인가?”
“죄송합니다, 이안 님. 조사실로 가다가 그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제발, 제발!”
이게 대체 무슨 일? 진은 놀라서 서류로 입가를 가린 채 눈만 굴려댔다. 이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표정에 변화가 없다.
“…되었다. 그만.”
“이안 님! 정말 저, 아닙니다.”
“페트릭. 네가 변절자가 아니라면 조사에 성실히 임하면 될 일이다. 마법부 소속이니, 동료들의 유능함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 그리고 혹 네가 변절자였다고 한들, 나는 너를 이해한다. 이익을 좇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이안은 크로니와 배신자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개인의 판단 아래, 더 나은 길이 있어 그걸 선택했겠지.
하지만-
“그러니 그대도 나를 이해하여, 대가를 치르거라.”
이 또한 이안의 판단이었다.
“이안 님, 제발, 제발…….”
“선택에 책임져. 신의를 지키는 자들은 모두 아둔하여 이익을 좇을 줄 모르는가? 나아가 얻고자 했다면, 나아가 잃을 각오도 해야 함이 이치다. 페트릭.”
페트릭이 엎드리며 싹싹 빌었으나, 이안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뒤에서 지켜보는 마법사 동료들이 난감한 숨만 들이쉬었다.
“도저히 마법부에 남을 수 없다면, 출궁하여도 좋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대도 잘 알 터.”
황궁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데다, 마법이라는 능력까지 갖춘 인재다. 신의의 문제로 내쳐진 자라면,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나. 추적장치와 마력봉인석을 내장하는 게 불가피했다.
“그만 데리고 가거라.”
“아, 네. 죄송합니다. 페트릭. 일어나.”
“흐윽, 으으윽…….”
끼이익.
페트릭은 동료들에게 끌려나갔고, 헤일은 소파 뒤로 고개를 젖히며 혀를 찰 뿐이었다. 진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입술을 슬며시 짓눌렀다.
“저하. 송구합니다.”
“아니, 아닐세.”
“…중가산금이란, 국세징수법에 따라 의무 위반 시 가중되는 금액을 말합니다. 귀족일 때는 1할이 일반적이고, 아닌 경우에는 4할까지 부과할 수 있습니다.”
이안은 진이 질문한 부분을 짚어주며 설명했다. 아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으나, 집중 못 하는 티가 역력했다. 이안은 무릎 꿇고 앉아 낯을 찬찬히 살폈다.
“많이 놀라셨나요?”
“놀라긴 했는데, 그래서 그런 게 아니네.”
“그러면요?”
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언제고 나 역시, 이안 경처럼 할 때가 오겠지.”
황궁,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답고 잔인한 곳. 인의 따위는 권력 앞에서 사그라들고, 질서를 가장한 복종이 하루아침에 곪아버리는 곳.
“그걸 깨달아서, 좀 당황하였어.”
진도 생존을 위해 제 사람이었던 자를 쳐낼 날이 올 것이라.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이안은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잠시 침묵했다.
“옳습니다. 분명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는 잊지 마시고, 주저하지 마시고, 끊어내십시오.”
“알겠네.”
“하지만 그 전에, 제가 있을 때는 제가 저하 대신 그리하겠습니다.”
이안이 싱긋 웃었다. 하나의 역사에서 살아온 아이였다. 진이 있어서 이안이 있었으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도와줄 것이라.
진의 볼우물이 다시금 깊게 팼다. 아이는 펜을 다잡고 서류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사각.
그리고, 제 판단과 의지로 서명했다. 진이 이안에게 서류를 건네주자, 이안은 친히 고개를 숙이며 받들었다.
“감사합니다. 저하.”
“잘 해주시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밖에, 누구 없는가?”
똑똑.
“네. 이안 님.”
이안은 명령문을 감싼 가죽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둥글게 말린 서류는 나무통에 봉인되었다.
“행정부로 전달하라.”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로만드로 님 일어나셨다고 합니다. 베릭 님도 자꾸 복도로 기어나와서 굴러다니시는데요.”
“드디어 살 만한가 보군.”
마법사가 어이없다는 듯 어깨만 들썩거렸다. 무슨 짐승도 아니고, 자꾸 방을 탈출한단 말인가? 이안이 나가보라 손짓하자, 그녀는 인사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이제 무엇하면 되오?”
“음. 집행은 행정부와 수상께서 하실 것이니, 기다렸다가 소식을 듣고 움직이겠습니다. 그 전에.”
“그 전에?”
또 맡겨만 달라. 진이 눈을 반짝거렸다.
“루스웨나 사절단이 와 있다고 하는데, 저하께서는 차기 후계자이지 않습니까. 직접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배탈이 났다고 자리 깐 채 버티는 중이니, 친히 상태를 들여다볼 수밖에.
“그리고 저하. 혹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딜라이나 님의 상태가 영 안 좋으시다고요.”
“위중하시어 시종들조차 쉬이 들어가지 못한다고.”
“…이른 시일 내로 뵙는 게 좋겠습니다.”
이안의 말에 진이 멈칫거렸다. 고비가 온 것이라는 걸 돌려 말한 것 아닌가? 아이의 호흡이 가늘게 떨렸으나, 이안은 모른 척해주었다.
“그래. 알겠어.”
이안은 나가자며 손을 내밀었고, 진은 그걸 맞잡았다.
황궁의 피바람 속에서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 * *
타닥타닥!
“진 저하의 결재 서명입니다.”
“오, 왔군! 명령문에 허가가 떨어졌다!”
“제국방위부와 황궁친위대에 연락하시오.”
“지금부터 호명된 가문으로 가서 작위 박탈을 명령할 것이니. 무장하라! 성문을 활짝 열라고 전해!”
“하이만 쪽에는 제이럿 대장을 보내는 게 좋겠어.”
“해당되는 게 총 몇 곳입니까?”
“하이만을 포함해서, 음, 중앙의 일곱 가문입니다.”
잠시 후, 진의 서명을 전달받은 행정부에서는 명령 이행을 위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각 부서에 이것이 공유되고 전달되면서, 황궁은 참으로 오랜만에 한뜻으로 움직였다.
내부끼리가 아닌, 외부로 검을 겨누는 게 얼마 만인지! 황궁의 병사들은 오와 열을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정문을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중앙귀족들의 저택, 하이만의 중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