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48
제248화. 진의 부탁
멜라니아의 눈매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저 의문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 자신을 제삼자처럼 표현하다니.
하지만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호박색 원석을 들여다봤다. 마리브가 내란 시 썼던, 그리고 실라스크 화분 아래에 있던 원석과 굉장히 유사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드갈이 맞다. 아무래도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는데.’
아코렐라가 그러지 않았던가. 인공적인 원석이라 반으로 가르면 기하학적인 태가 보인다고. 그것은 연금술사의 제조 흔적이요, 고유의 무늬라.
이것이 서자 이안이 만든 게 맞는다면, ‘이드갈’과 전혀 다른 결이 나타날 것이다.
“이안.”
이안은 멜라니아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매가 상당한 의구심을 품어내고 있었다. 집요하게 들러붙는 시선과,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멜라니아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감정을 추슬렀는지, 말투에 격식이 갖춰졌다.
“이안 경, 혹시 기억이 아예 없습니까?”
되묻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떠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멜라니아에게 아주 중요한 변수였으니까.
이안이 기억을 잃었다면, 과거의 정보 불균형이 일어난다. 이는, 정보를 쥐고 있는 멜라니아에게 굉장한 기회로다.
“웃었잖아요. 너무 기뻐서 얼굴에 홍조가 가라앉을 정도로 행복해했잖아요. 그래서…….”
멜라니아가 무언갈 말하려다 멈칫거렸다. 이안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단서를 직접 줄 만한 상황적 설명보다 추상적인 것을 던져주는 게 유리하지 않겠나.
이안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침묵으로 응대했다. 기억난다고 하기에는 여러 위험이 컸고, 안 난다고 시인하는 건 좋은 수가 아니다. 모호하게 말을 돌리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시인이다.
과거에 관한 것은 현재 이안이 불리하다만, 황궁의 내부 상황으로 아쉬운 쪽은 멜라니아. 침묵으로 시간을 끌수록, 멜라니아가 먼저 말하게 되리라.
스윽.
이안은 대답 없이 압화를 가져왔다. 전등 빛을 타고 붉은빛을 띠는 실라스크. 중앙에서도 그 흔적 찾기가 어려웠는데, 이리 다시금 호박색 원석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사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확실히 러더포드 상단이 꽃과 관련있음을, 그리고 멜라니아의 주장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드갈은 마리브도 운용했던 것이지만, 이 꽃만큼은 지금까지 만난 자들 중 오직 이안만이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나.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제발. 이러면, 꼭 마치…….”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다고, 기억을 못 하는 걸 넘어서 남의 일을 대하는 자 같노라고, 멜라니아는 말도 안 되는 말을 겨우 삼키며 뒷말을 이었다.
“마치 제가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날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이리 명확한데.”
“흐음.”
티잉!
이안은 호박색 원석을 튕기며 가볍게 호응했다. 아주 건수를 잘 잡지 않았나.
이드갈은 마력봉인석에 준하는 효과가 있었기에, 마법사들에게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하여, 러더포드 상단을 추적하여 이를 몰수하고, 없애버리는 것이 마법부에서 추진할 장기 목표 중 하나일 것이라.
한데, 서자 이안이, 그것도 마법부 장관직에 있는 그가 이드갈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더 나아가 러더포드에 맹세?
“혹시 이 쪽지는요? 쪽지도 몰라보십니까?”
사락, 멜라니아가 이안을 다그치며 낡은 쪽지를 펼쳤다. 모르는 문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이안은 그것이 어디선가 보았던 것임을 깨달았다.
처음 브라츠 백작저에서 눈을 뜨고, 서자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보았던 낯선 문자. 마찬가지로 해독할 수 없다.
‘하이만 가문을 살리기 위해 풀어내는 비밀이다. 내게 충분히 위협적이라, 구제와 교환하기에 알맞은 가치가 있다 판단한 것이겠지. 무엇인지 모르니 조심스럽긴 하다만-’
마법부 장관이 이드갈을 만들어낸다는 건, 모순이나 마찬가지다. 마법사가 아닌 자들에게는 효과가 없고, 저들의 숨통이나 조여대는 걸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 부서 안에서 반발이 극심할 터.
‘지금 상황에서는 또 괜찮다.’
잘만 이용한다면, 나쁘지 않다.
차기 후계자인 진이 이안을 신임하고 있다. 황실 입장에서 이안은 마법부의 권력 균형에 있어 적임자로 판단할 것이요, 이는 진에게 안정감을 주게 된다.
안정감은 곧 단단한 결속. 마법부가 제국 내에서 더욱 신뢰받는 발판이 될 것이라. 한마디로 출렁임은 있겠지만, 선순환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멜라니아. 나는 계속 그대와 인연이 없다고 일렀습니다. 증거라고 하는데, 모두 주관적인 주장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였나요? 그런 것치고는 서로에게 너무 진심으로 검을 겨눈 것 같은데요.”
아르센의 정체가 마물이 아니었다면, 진과 이안의 입지는 위태롭다 못해 꺼지기 직전으로 치달았겠지.
그리고 이것이 이안에게 진정 위협이라면, 그녀는 진작 이 카드를 꺼냈을 것이다. 특히 마리브와 러더포드의 상관관계가 재판에서 거론될 때, 이안을 엮을 기회는 분명 있었다.
“혹여 무슨 사이였다고 한들, 혼자서 간직한 기억을 추억이라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압수하겠습니다. 쉬이 넘어갈 수 없음이니, 처분을 기다리시지요.”
달깍. 이안은 보석함에 물건들을 넣은 다음, 잠금장치를 닫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멜라니아는 이안을 지그시 쳐다봤다. 쪽지를 보고서도 안색 변화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기억을 잃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을 전으로 러더포드가 바리엘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와 만나면, 이안. 그대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요.”
멜라니아가 아는 한, 맹세는 영속적이며 고유하다. 대상자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여 사라질 게 아니란 말이다.
“멜라니아. 저는 바리엘의 품격을 위하여, 보다 인도적인 방법으로 그대를 대하고 싶습니다만.”
헛되게 자극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고문을 가하여 입을 열게 할 수도 있으나, 이는 그래도 하이만이 세운 업적을 치하하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들 덕분에 바리엘의 화폐 유통이 원활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멜라니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 손과 발은 얼마든 자르십시오. 다만, 혀만큼은 스스로 자를 것입니다.”
어떤 짓을 하여도 쉬이 입 열지 않을 것이라는 대응이다. 멜라니아는 얼굴을 바꿔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애처롭게 사정했다.
“하이만의 은행권 지분을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금 역시, 감당 가능한 선까지 모두 감내할게요. 작위 격하도 겸허히 받습니다. 다른 걸 원하지 않아요. 존속, 오로지 그것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면, 이안 경께서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의 일들을 제가 전부 깨워드리겠습니다. 하이만의 멸문은 황실에게 의미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안 경에게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에요.”
아아. 이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귀 옆으로 돌렸다. 창문 밖, 나뭇가지가 시원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르센도 죽기 전 비슷한 말을 하였지. 바리엘과 자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의미 없는 말. 그때나 지금이나 이안의 대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고, 망설임이 없었다.
“멜라니아. 바리엘에게 의미 있는 것이 제게 의미 있습니다. 소란 없이 기다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 가족과 길이 엇갈릴 것입니다.”
“이안 경!”
가족을 만나고 싶다면 조용히 있으라. 이안은 그 말을 남겨두고 응접실을 나섰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이안의 손에 들린 보석함을 힐끗거렸다. 그는 그 안에서 호박색 원석을 넘겨주며 지시했다.
“…아코렐라 대장에게 보내 이드갈과 같은 것인지 확인해 보도록 하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안은 잠시 침묵하며 창문틀을 톡톡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정보의 습격에 정리할 생각거리가 넘쳐난다.
우선 멜라니아가 말하는, 서자 이안의 육신에 걸린 맹세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내란죄를 일으킨 자를 벌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있을 수 없다. 선례가 남으면 필시 후손들에게도 좋지 않음이라. 멀리 갈 것도 없이 황궁 기강부터가 해이해질 터.’
“멜라니아를 특히 잘 감시하도록. 저녁에는 어머니와 네르사른을 좀 보자고 하지.”
“네. 알겠습니다. 마법부로 모실까요?”
“진 저하는? 마법부에 계시나?”
“아니요. 딜라이나 님의 처소에 계십니다.”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이안이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헤어진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마 바로 어미를 찾아갔을 것 같은데, 아직도 거기서 머무르고 있다니. 시아오시의 별다른 전언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문제는 없다만, 의아하긴 하다.
“그쪽으로 가자. 진 저하를 모시고 마법부로 돌아가겠다.”
스윽.
이안의 지시에 시종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분주하게 앞서 걸어갔다. 마차를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안은 굳게 닫힌 멜라니아의 응접실을 잠시 돌아보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역사에서 지워질 게일의 죽음조차 신께서 알고, 자신이 알고 있다.
한데, 서자의 맹세를 아는 자가 세상에 멜라니아밖에 없겠나?
‘귀찮은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쪽지를 폈다가 고이 접었다.
서자 이안. 이자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마력의 흔적도 갖고 있고, 연금술의 재능까지 가지고 있었다니. 브라츠 백작저 뒤뜰에서 밥 먹기 전, 대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의아하다.
‘그래도 하나는 알겠군.’
황제 이안이 서자 이안으로서 눈 뜨게 된 것. 거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과가 섞여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안은 보석함을 소중히 안은 채, 마차에 올랐다.
* * *
어둑한 침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긴 했으나, 그마저도 곧 있으면 저버릴 시간이었다.
이안은 딜라이나의 침실로 통하는 작은 방에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있던 시아오시가 일어나서 그를 맞이했다.
“저하는?”
“안에 계십니다.”
“계속?”
“예.”
끼이익.
놀랍게도, 죽음을 앞둔 냄새가 났다. 이는 베릭이 만신창이가 되어 실려 왔을 때와 다른 것이다.
비릿한 피 냄새는 오히려 살아있음을 일깨워주지만, 이렇게 희미하게 떠다니는 약품 냄새는 수명을 겨우겨우 연명하는 느낌을 준다.
“…하십니까?”
시아오시가 있는 방과 침실을 잇는 짧은 공간. 이안은 드문드문 들려오는 진의 혼잣말을 듣고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는 딜라이나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엎드려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처음 가정교사를 받았을 때요. 사실요. 그때 문학에서 칭찬받은 것은 저였습니다. 바보 같이 말하지 못했어요.”
“…….”
“조금씩 어긋났던 순간들을 미리 잡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어머니. 적어도 어머니께서 이리 누워계시지는 않지 않았을까요?”
“…….”
어미는 대답이 없었으나,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훌쩍이며 말라 버린 손등을 매만지고, 홀로 어미의 대답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다시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진은 눈물을 추리다가 또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다정히 건네었다.
“저는 노란 꽃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아세요? 어머니는 노란색이 아주 잘 어울리시거든요.”
“…….”
이런 식으로, 반복하고 반복하여 지난 십 년간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이안은 벽에 기대어 그걸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격해질수록, 이안은 제 생모를 떠올렸다.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 저도 저리 울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
“어머니.”
진은 신음 같은 어미의 부름을 알아듣고 귀를 기울였다. 이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푸른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고, 이내 안타깝게 인상을 찌푸리며 제 어미의 이마에 입술을 비벼댔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저는 오래 살 것입니다. 십 년간의 기억 따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오래 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딜라이나가 힘없이 손을 들어 아들의 상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걸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마리브가 내고, 저가 내었던 상처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툭.
그리고 순식간에 힘을 잃고 손을 떨구었다. 놀란 진이 재빨리 손목을 잡았지만, 그로서 확실히 느꼈을 뿐이다.
“어머니?”
딜라이나의 숨이 거두어진 것이다. 진은 몸을 떨어대며 턱턱 막히는 비명만 질러댔다. 아이가 내는 게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처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진은 정말 혼자였으니. 아비의 존재는 애초에 멀었고, 그나마 어미와 형제를 두고 이곳에서 살아왔는데…….
“아, 아, 안 돼요. 안 돼요! 어머니, 잠시만요!”
“저하.”
“이안 경! 이안 경!”
도와달라 외치려던 진이 숨을 흡, 들이쉬었다. 하지만 숨이 멈춘 것이 무색하게 눈물은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저하.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흐윽…….”
사람을 부르겠노라. 이안의 전언에 아이는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끊이지 않는 슬픔을 끊어내려 몸을 웅크렸다. 귀한 자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이안이 그리 일러주었으니까.
“저하.”
이안이 손을 뻗자, 진은 겉옷에 숨어들어 얼굴을 가렸다. 시아오시가 소란을 듣고 잠시 안쪽을 확인했다. 그의 나지막한 부름에 바깥이 어수선해졌다.
“의사를 불러주십시오. 사망 선고가 필요합니다.”
“어머! 자, 잠시만요!”
“기다리십시오. 밖에! 밖에 누구 없나?”
타닥타닥!
“…가려주시오. 이안 경.”
“예. 저하. 제가 가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리 있어 주시오.”
“예.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다.”
“이리, 계속…….”
“…….”
시종들과 의사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으나, 이안은 조용히 처리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그들은 진을 못 본 척 지나쳐 딜라이나의 상태를 진단했다.
“…그, 검은 천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진의 어미가 그렇게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