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52
제252화. 진흙탕
마차에서 내린 멜라니아는 멍하니 저택을 올려다봤다. 참으로 신기했다. 평생 살아온 보금자리이건만, 마치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모든 게 어색하지 않나.
이리저리 밟힌 잔디와 대리석 바닥에 얼룩진 핏물, 쓰러지고 깨진 장식품, 뜯긴 커튼, 그리고 저가 도착했음에도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현관까지.
멜라니아는 반쯤 열려있는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갔다.
끼이익.
“이봐. 거기 누구지?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혹, 하이만 가문의 사람인가?”
복도 끝, 삼삼오오 모여있던 황궁 병사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소리쳤다. 멜라니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무어라 대꾸하려던 순간, 황궁부터 그녀를 안내했던 병사가 뒤따라 들어왔다.
“하이만 가의 막내딸 멜라니아 영애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일들 보십시오.”
“아아, 그래. 수고하시게.”
“제이럿 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혹시 몰라 훈련장 수색 한 번 더 한다고 하시던데.”
멜라니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단순한 병사들의 언질에서 그녀의 처지를 다시 상기한 것이다.
그녀는 단호히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끼익끼익, 언제부터 계단에서 소리가 났지? 모든 게 엉망이 되었음을, 오감이 일깨웠다.
쿠웅! 우당탕!
“멜라니아!”
“오라버니!”
작은 오라비가 아래층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 단정하지 못한 옷매와 흐트러진 머리칼은 둘째치고, 절망으로 절어버린 눈매가 유독 엉망이다. 그는 누이동생을 힘껏 껴안으며 걱정스러운 안부를 늘어놓았다.
“멜라니아, 괜찮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님은?”
“오라버니, 우선 들어가요. 들어가서 얘기해요.”
“제발, 먼저 말해 다오. 모두 괜찮은 거니?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응?”
멜라니아가 주위를 힐끔거렸다. 위층 역시 아무도 없다. 분명, 시종에게 자리를 지키라 일렀는데…….
그녀는 작은 오라비와 함께 계단에 주저앉아 머리를 쓸어넘겼다. 땀으로 절은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그 전에, 다들 어떻게 됐어요?”
“말도 말아라. 내 이것들의 본성을 이제야 알았다.”
저택 사용인 중 절반은 멜라니아가 마차를 타고 떠난 직후 나가 버렸다. 봉급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황궁 병사들의 언질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제아무리 오랜시간 충성으로 다져온 인연이라 한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삶이 있었다. 가족과 연인 그리고 친구들은 저택 안이 아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오라버니. 원래 그런 것입니다. 어두울 때는 그림자마저 저를 저버리는데, 주위의 사람들이 어찌 자리를 지키겠습니까? 원망하지 마세요. 원망하기에는 나아갈 힘도 모자랍니다.”
“노예들은 황궁 병사들이 수를 헤아려 데려갔다. 어찌 알았는지, 머릿수를 정확히 알고 있더구나. 사병 역시 소집 해제되었어. 몇몇은 대응하다가 크게 얻어맞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치료비는 우선 집사의 사비로 한다던데…….”
작은 오라비가 마른세수로 얼굴을 세차게 문질렀다. 대체 어쩌다 이리된 것인가. 어쩌다 하이만에서 식구들의 치료비 하나 낼 수 없어 집사의 손을 빌린단 말인가.
멜라니아는 모든 걸 옆에서 지켜보고, 감수해 낸 오라비를 위로했다. 안타깝지만, 이건 시작이다. 오라버니. 이미 우리는 시작점을 떠나왔고, 그 끝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어요. 멜라니아는 차마 나오지 않는 그 말을 씹어 삼켰다.
“오라버니. 기억 안 나십니까? 하이만의 아이들은 구슬치기를 보석으로 하였고, 가위질 놀이를 비단 천으로 하였습니다. 기회를 조금만 엿본다면, 식구들 봉급 챙겨주는 건 문제 없을 겁니다. 하이만의 마지막, 그렇게 초라하지 않아요.”
“멜라니아, 마지막이라니! 이제 말해보렴.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니? 너는? 어떻게 나왔어?”
멜라니아는 그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아주 나지막하게, 하이만의 운명이 낭떠러지 끝에 서 있음을 알렸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 오라버니는 처형될 것입니다. 이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더군요. 마법부 장관인 이안 경이 물러서지 않겠다 일렀습니다.”
“젠장! 젠장!”
콰앙! 쾅!
그는 울분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발을 굴렸다. 아래에서 병사 두엇이 무슨 일인가, 하고 슬쩍 고개를 쳐 들었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기회? 어머니, 아버지 다 죽고! 가문은 풍비박산에 알거지가 되었다! 그런데 무슨!”
“우리가-!”
멜라니아가 제 오라비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말갛게 반짝이는 여인의 눈동자. 거대한 폭풍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자의 결연한 자세다.
“우리가 바로 하이만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살면, 하이만이 살아요. 잊지 않으셨지요? 그 어떤 가문이라도, 시작은 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했어요.”
“메, 멜라니아…….”
멜라니아는 작은 오라비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지. 오히려 비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란죄로 멸문될 가문에서 살아남는 직계 후손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녀가 브라츠에서 이안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기적.
“하이만을 대신할 다음 가문으로 세르오가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안 경이 제안하더군요. 세르오보다 월등한 가치를 증명한다면, 한둘쯤은 살려줄 수도 있을 것이라.”
이안의 제안에 포함된 건 어디까지나 멜라니아뿐이었지만, 그녀는 작은 오라비에게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자이면서, 유약하고, 결국에는 명예보다 개인의 삶을 선택할 사람.
괜한 말은 불필요한 오해와 해명을 빚어낼 것 아닌가? 한시가 급하고 예민한 지금, 멜라니아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그, 그게 사실이니?”
“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보십시오. 다른 일곱 가문에도 남은 자제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합심하여 정세를 반전시켜야 합니다.”
작은 희망이 던져지자, 작은 오라비의 낯이 살짝 풀어졌다. 그는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담배를 찾아댔다.
“그, 후…. 지금 쓸 수 있는 마차가 없어서.”
“제가 타고 온 게 있습니다. 그리고 오라버니. 혹시나 하여 당부하건대, 모든 일은 비밀입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걸 다른 가문이 알면, 상황을 움직이기가 어려워집니다. 반발로 협조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는 마른 담배를 꽉 깨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멜라니아는 그의 볼을 안쓰럽게 매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아. 오라버니. 우리 어릴 때는 계단 옆에 숨어 비밀을 나누곤 하였는데, 지금은 죽음을 각오하고 속삭이는군요.
“멜라니아. 세르오를 견제하는 게 목적이면-”
오라비의 얼굴을 찬찬히 매만지던 멜라니아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러니까, 세르오가 지금 저리 기세등등한 것은 결국 이안 경과 진 저하의 신임을 얻어서 그런 것 아니냐? 그 신임이 떨어졌다는 걸 알려주면 알아서 기세가 사그라들지 않을까?”
“좋은 의견입니다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
“그건 이안 경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세르오가 아니라 다른 가문을 직접 불러들여 차를 마시고, 정세를 논하며, 차기 사업을 제안하면 자연스럽게 신임이 바뀌었다는 걸 알릴 수 있지요. 하지만 이안 경은 그러지 않고 저희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안이 바라는 것. 혹은 이안이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귀족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을 뜻하는 것이었다. 오라비가 담배를 꺾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혹, 우리를 이용하고 버리려는 건 아닐까?”
“당연히 그러겠지요.”
멜라니아가 희게 웃었다. 참으로 순진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릴 소각로에 버릴지, 길거리에 버릴지는 전적으로 그의 의지에 달려있으니. 저희는 그저 살아서 버려지는 게 목적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걸 위해서는 쓸모를 증명하여 그를 만족시켜줘야 해요.”
“어, 어떻게…….”
“옷을 정리하고 나오세요. 저 역시 움직이기 쉬운 것으로 갈아입겠습니다.”
멜라니아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한 손으로 휘어잡으며 일어섰다. 그러곤 힘주어 한 발 한 발, 제 침실로 뛰어 올라갔다.
시간이 없다. 재판이 진행되기 전, 모든 것에 종지부가 찍히기 전 성과를 내야 하지 않겠나. 오라비는 누이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며 담배를 짓이겼다.
* * *
이안과 진은 집무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책상은 로만드로의 차지라. 누워있는 동안 못 보았던 결재 서류를 대신 정리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이안은 잠깐의 쉬는 시간 동안, 진과 티타임을 가지며 책장을 넘겨댔다.
사락.
“저하. 읽어보십시오.”
“카-르데로니.”
“발음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런가? 헤헤.”
이안의 칭찬에 진이 배시시 웃었다. 맞은편에서 굴라를 와드득 씹어 먹던 베릭. 저도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 나섰다.
“뭔데? 나도 해볼래.”
“…따라해 보거라. 카-르데로니.”
“까아르떼로니!”
“…나쁘지 않았다.”
“근데 무슨 뜻인데?”
“외국어다. ‘이제부터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이안의 말에 베릭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농담인가 싶지만, 얼굴색 하나 바뀌질 않으니 알 수가 없다.
베릭이 당황해서 눈을 데굴데굴 굴려대자, 옆에 앉은 진이 눈을 강하게 깜빡거렸다. 장난이라는 신호렷다.
“이안! 먹는 거로 장난치는 거 아니야! 엉? 나 완전히 식겁했잖아!”
“베릭, 어제 영수증을 받았다. 정녕 먹는 거로 장난 안 친 게 맞아? 사람이 먹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양이던데. 당분간은 돼지만 먹어라.”
“하, 씨. 괜히 끼어들었네. 입 다물고 있을걸.”
그러면서 굴라 한 줌을 왕창 쥐어 입에 넣어버렸다. 뒤에서 그걸 보던 로만드로. 펜대로 턱을 긁적거리더니, 이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안.”
“네. 결재에 문제 있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진 저하 후계 임명식 진행하고 나면 베릭이랑 시아오시를 어찌할 것인가?”
베릭은 마검사였지만 평민이었고, 시아오시는 노예였다. 진과 이안이 계속 함께한다면, 그들 역시 진의 곁에 있을 게 자명했다. 황족, 그것도 차기 황제 옆에 있는 자들이 직위 없는 하층민이라니.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닐 터. 이안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습니다. 베릭은 황궁친위대 소속으로 올리는 건 어떨까 하고요.”
“내가? 나 어디 가라고?”
“어디 가는 게 아니라, 이름만.”
황궁친위대에는 마검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그러니 황궁에 계속 남으려면 그쪽으로 입부하는 게 당연하다. 베릭이 펄쩍 뛰어오르자, 이안은 자중하라는 듯 손짓했다.
“이름만? 그래도 돼?”
“그리해.”
“훈련은?”
“제이럿에게 일러두지. 소속은 그쪽으로 하되, 우리 쪽으로 차출하여 처리하라 하겠다. 그쪽도 마검사 하나하나가 귀한 터라, 제안을 거절하진 않을 게다. 이제 네 밥값은 네가 벌어.”
“아, 굶어 죽겠는데?”
베릭을 통해 황궁친위대에도 영향력을 넣어두려 함이었다. 사실 그가 워낙 망나니 같아서, 크게 도움이 될까 싶지만. 이리 놀게 두는 것보다 이름이라도 올리는 게 낫지 않겠나.
“시아는?”
“시아는…….”
이안은 문 쪽에 서 있는 시아오시를 돌아봤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아야. 어쩌고 싶으냐? 너는 마검사가 아니니, 제국방위부가 제격이겠다. 거기 들어가고 싶으냐?”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면 내게서 네 노예 증서를 사련?”
“…예?”
“요즘 시가가 얼마나 합니까, 로만드로님?”
“글쎄.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보통은 주인이 정하는 게 값이지.”
노예가 돈을 모아 노예 증서를 되찾을 수 있다면, 신분을 복원할 수 있다. 다만 값을 주인이 매기고, 노예 신분으로 사유재산 축적하는 게 어려워서 현실적으로 불가능이긴 하다만.
“돈이 없다면 내 빌려주마. 신분을 되찾고 여기서 일하여 갚는 게 어떤가?”
사실상 지금과 다름없이 지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황자 옆, 제일 가까운 자가 노예일 수는 없는 노릇. 시아오시는 그 뜻을 헤아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 주시면, 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갚는 돈이다. 감사할 것 없어.”
“아니요, 감사합니다.”
아마 조상 중 그가 유일하게 노예를 벗어난 자일 것이라. 시아오시는 철창 안에서 죽어가던 제 어미를 떠올리고,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 감정의 근원을, 시아오시는 알 수 없었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들어오라.”
“이안 님. 사법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곱 가문 재판일 최종 확정됐다 하는데요.”
“언제라 하던가?”
“열흘 후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밖에 세르오 경께서 와 계십니다.”
세르오가?
이안과 로만드로 그리고 진과 시아오시, 네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베릭은 하품을 쩌억 해대며 귀만 후비적거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