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54
제254화. 기둥
말문이 턱하고 막힌다는 게 이런 것이로구나.
세르오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집사를 바라봤다. 지금 저가 뭔가를 잘못 들은 것이라. 다시 말해달라는 눈빛이 형형했다.
집사는 복도 끝, 손님들이 모인 응접실을 힐끗거리며 재차 목소리를 줄였다.
“아니지요? 작은 주인님.”
“그걸 말이라고 하나?”
소문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한창 가세가 오르려는 지금, 하이만과 저들이 관련 있다고?
세르오는 응접실로 달려가려다 재빨리 몸을 틀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곤 허겁지겁 따라오는 집사에게, 동생 알레나라를 데려오라 지시했다.
타닥타닥!
콰앙!
집무실 문이 좌우로 거칠게 젖혀졌다.
그는 발걸음을 크게 하여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먼지가 희게 쌓인 책장이 즐비하다. 손끝으로 꽂혀있는 서류를 훑을 때마다 자국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체투르, 체투르, 체투르…….
“아. 찾았다.”
세르오는 체투르 구역에 관련한 임대업 증명서를 확인하고 종이를 넘겨댔다. 누렇게 뜨고, 끄트머리가 갈라졌으며, 특유의 묵은 내가 진동했다. 세월의 흔적이 진득한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정정할 때 맡았던 건이 분명하리라.
‘그래도 최근 수입은 모두 내가 관리했어. 하이만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돈이 있다면 필시 알았을 터. 뭘까. 근본 없는 소문치고는 너무 구체적이라 불길하다.’
세르오는 속독하듯 글자를 읽어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현재 가문에서 소유한 체투르 구역 건물은 딱 하나. 중소 무역 회사가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벌써 십 년째 계약 진행 중이었고, 앞으로도 삼 년이 더 남아있었다. 오래 보고 지낸 곳이다. 하이만과 관련 없음을 자신했다.
차락.
성급하게 넘겨대는 손짓에, 종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세르오는 그걸 주우려다 멈칫했다. 임대증이 아니라, 매매증이다. 그가 천천히 증서를 펼쳤다.
“아, 젠장.”
체투르 3번 구역의 한 건물.
자신의 아비는 몇 년 전, 그 건물을 코아루 코빌이라는 자에게 팔아넘겼다. 중앙에서 유명한 대장장이 가문 출신이자, ‘코앤코’ 단장의 사촌이기도 했다. 황궁친위대가 흑갑옷 재료를 압수했던 그 ‘코앤코’ 말이다.
세르오가 짜증스럽게 앓는 소리를 내자, 뒤에서 어수선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 진짜 아니라니까!”
“알레나라 님. 진정을 좀 하시고.”
“알레나라!”
“오빠!”
세르오의 동생, 알레나라가 분에 차서 발을 굴려댔다. 드러난 어깨가 벌게진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열 오른 모습이다. 소문을 당사자가 들었다는 것, 그것은 이미 모두가 소문을 접했다는 뜻이렷다.
“너, 하이만 둘째 아들이랑 만났어?”
“미치겠네! 아니!”
그녀는 두 손바닥까지 내보이며 결백을 주장했다. 세르오는 매매증을 고이 접어 안쪽에 넣어 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면도 없고?”
“안면은 없을 수가 없지! 내 나이가 열여덟인데.”
“하나도 숨김없이 다 고해. 지금 하이만과 엮인다는 게 얼마나 예민한 문제인지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춤춘 적 딱 두 번 있어. 끝나고 와인도 한잔했고. 근데 알잖아? 파티장에서는 콧구멍이 귓구멍에 달린 거 아니면 모두가 그 정도는 해.”
줄지어 춤추다 파트너가 바뀌는 것은 예사요, 술과 음식은 파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알레나라는 이마를 짚어대며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알레나라!”
“뭐! 왜! 솔직히 까보면 나보다 더한 애들 쌔고 쌨어! 이름 불러줘?”
솔직히, 그리고 확실히 그랬다. 소문이 났다고 하기에는 뒷받침할 진실이 너무 빈약했다.
중앙 귀족치고 여태 하이만 가와 거래 한 번 안 해본 자들이 어디 있나? 사교장에서 얼굴 한번 안 튼 자들은? 단언컨대, 없다.
“진짜 짜증 나. 내가 봤을 때, 이거 우리보고 한번 해보자는 거야. 사태 진정되면 세르오 가문 어떻게 될지 빤하니까. 애먼 소문 흘려서 흠집 내려는 거라고.”
알레나라가 핏대를 올려대며 이를 갈아댔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세르오 역시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였다. 문제는, 그게 누구냐는 거지. 소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시발점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하아.”
세르오가 턱을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불현듯 떠오르는 멜라니아의 출궁. 진실은 하찮지만, 소문은 아주 거대하고 빠르게 스며들었다.
이는 소문을 옮기는 자들이 은근한 확신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확신을 가졌다? 증거 따위는 없고, 그렇다면 당사자가 직접 증언을 했다는 것인데…….
‘멜라니아가?’
세르오를 견제해서 무엇 하려고? 곧 멸문할 가문이.
‘아. 혹시 하이만을 대체할 가문이니까 흠이라도 내서 갈라보겠다?’
감히 하이만 다음으로 거론되어,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세르오였다. 서명도 모아서 재판 일정을 확정지었으니, 명분은 그럴듯하다.
이안이 말한 방패막이가 이런 것인가?
그는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할 만하지 않나. 형체 없는 소문 따위, 담배 연기와 하등 다를 게 없다. 진흙탕 속에 푹 잠겨 버린 하이만이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한들, 쳐내면 그만이다.
“알레나라. 너도 한번 알아봐.”
“뭐를? 소문?”
“그래. 나보다는 네가 사교계에서 존재감이 있잖아.”
“그건 그렇지. 오빠보다는 내가 인기 많으니까. 알았어. 기다려 봐. 애들한테 다녀올게. 대신-!”
알레나라는 집사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이르며 고개를 휙 돌렸다.
“다음에는 꼭, 나 이안 경 만나게 해줘.”
“만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알았어! 알고 있다고! 멸문가랑 엮이는 거, 무슨 의미인지 알아. 내가 바보야? 다녀올게. 누군지 몰라도, 걸리면 내가 먼저 손볼게.”
머리털을 죄다 뜯어놓을 것이라고, 알레나라는 그리 중얼거렸다. 하이만의 둘째 영식도 포함이다. 어차피 명예가 실추되어 죽을 사람, 무서울 것 뭐 있겠는가? 알레나라는 혀를 쯧, 차대며 집무실을 나섰다.
“어찌할까요, 작은 주인님?”
집사는 알레나라가 사라진 쪽을 힐끔 보며 물었다. 바깥 일은 알레나라가 볼 것이니, 안쪽 일은 그가 봐야 할 것 아닌가? 세르오는 거울 앞에 서며 옷깃을 탁탁 정리했다.
“응접실로 간다.”
소문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불순물을 모두 흩트려놓을 것이라. 세르오가 문제 있다면, 다른 귀족들 역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저만, 그저 이안의 총애를 얻었다는 연유로 이리 몰아간다면 가만있을 수 없지.
이미 바짓가랑이가 진흙으로 물들었다. 그걸 다른 자에게 좀 묻힌다고 한들, 누가 비난할까?
끼이익.
세르오는 응접실로 들어가는 복도 앞에 섰다. 안쪽에서 흰 연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술과 음악 그리고 희망과 뒷담화가 함께 어우러진 연기였다.
“그래? 드래곤 각린? 난 처음 듣는데.”
“저도 본 적은 없습니다만, 하이만 은행 경비들의 갑옷을 그것으로 만든다고 하더군요. 저번에 체투르 구역에서 대량으로 몰수되었다 합니다. 비가 아주 많이 오던 날이요. 다리 침수되어 못 들어간다고, 아침부터 사용인들이 아주 난리였지요.”
“아아. 그날, 기억나는군. 그런데 그 건물이 세르오 거였다고? 그러면 세르오는 드래곤 각린을 몰랐나?”
“알지 않았을까요? 임대업 말고는 딱히 하는 것도 없는데. 하하. 흑갑옷 재료라고 하니까, 알아도 모른 척했던 거겠지요. 내란에 썼던 갑옷이잖습니까.”
“이안 경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당연히 알고 넘어간 것 아닙니까?”
“그런 것치고는 의문이 많지요. 왜 굳이 세르오입니까? 별 볼 일 없는 가문, 눈감아주면서까지 왜 그렇게 밀어주겠냐고요. 차라리 여기 계신 에이제인 경이 적합하다 여겨집니다.”
“저도 모른다는 것에 한 표입니다. 알면 끈 떨어집니다.”
“알면요? 알면 그만큼 세르오를 신임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러쿵저러쿵, 정세를 가늠하고 재는 말들이 음악을 타고 들려왔다. 세르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무리 가문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응접실에서 저딴 얘기를…. 이럴 줄 알았으면 이안 경에게 망설이지 말고 귀족 이름을 더 넘길 걸 그랬다.
그래. 그러는 게 낫겠어.
딸깍.
“어허. 다들 모여 있었군요.”
“세르오 경. 돌아오셨네요.”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안 경은 뵈었습니까?”
세르오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독사들이 교활한 눈빛으로 그를 뜯어 살폈다. 소문을 접했는지 궁금한 것이라. 세르오는 보란 듯이 환하게 웃으며 방금 도착한 것처럼 코트를 벗었다.
“예. 보았지요. 몸 상태가 괜찮아 보이시더군요. 진 저하도 함께 알현했습니다.”
“진 저하도요?”
현재 유일한 후계자이자 유력한 차기 황제. 진을 스스럼없이 보았다는 말에, 귀족들이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마찬가지로 안색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오호, 다행이군요. 역시 세르오 경입니다. 경이 아니었다면, 황궁 소식을 어찌 들을 수 있었겠어요?”
“하하. 아닙니다. 하이만 가문을 비롯하여 일곱 가문의 재판일이 정해졌다 하더군요. 이안 경께서 불손 세력을 걱정하시어, 당분간 조사를 더욱 자세히 할 예정이라 합니다.”
일곱 가문 외, 황궁에 반하는 자가 있다면 걸러낼 것이라는 말이었다. 세르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은 에이제인에게 당부했다.
“에이제인 경.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하이만 은행에서 선박 투자지원금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때 거래한 선박으로 하이만이 외항 사업을 진행했다고 하던데요. 맞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언제 적 얘기를, 대체 지금 왜 꺼내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이었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세르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오, 맞는군요. 제가 잘못 안 줄 알았습니다.”
“왜 물으십니까?”
“그저 궁금해서요.”
세르오가 싱긋 웃자, 귀족들은 속으로 잘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놈, 들었구나. 여기 있는 모두가 하이만과 연관되어 있으니, 세르오만 특정하여 헛소문 내지 말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이는 결국 능수능란한 귀족들에게 하나의 단서를 주게 되었으니.
‘이안 경은 모르나 봐? 지금 소문.’
이안 경이 모르니까 저리 나오는 것 아닌가? 그들은 와인을 홀짝이며 머리를 굴려댔다. 이안이 세르오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저들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나? ‘저’ 세르오도 하이만을 대신하겠노라 나대는데, 그들이 못 할 것도 없다.
하이만을 밀어낸 세르오, 그리고 그런 세르오를 밀어낸 또 다른 가문.
스윽.
그래. 굳이, 뭐, 세르오를 이리 따를 것 있겠나? 임대업이나 하며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주제에.
귀족들은 괜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시선을 달리했다. 그럴수록 피아니스트의 건반 두드리는 소리가 격정적으로 치달았다. 반대파 안에서도 또 다른 갈래가 솟아나는 소리였다.
* * *
“이안 경.”
“예. 저하.”
“그런데 나 궁금한 것이 있소.”
“하문하십시오.”
이안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그 앞에 의자를 끌어와 턱을 괸 진. 아이는 이안이 보는 서류를 함께 보며 되물었다.
“귀족들 사이를 가른다면, 황궁이 더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우려되오. 모두가 힘을 합심하여 나아갈 시기니까. 귀족들은 어쨌거나 바리엘을 받치는 기둥이지 않나?”
동그랗게 뜬 눈이 유독 맑고 반짝였다. 이안과 책을 읽을 때, 그림을 그릴 때, 그리고 이리 무언가를 배울 때만큼은 또래 아이와 진배없다.
이안은 펜을 슬쩍 내려놓으며 웃었다.
“방금 정답을 말씀하셨습니다. 저하.”
“무슨 정답?”
“기둥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거리가 적당히 벌어질수록 안정적이고 견고하지요. 저희가 지금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작업입니다. 굳이 한곳에 다 모여 있을 필요는 없지요.”
“음. 그렇긴 해.”
“기둥 수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필시 다른 것 하나가 세워지게 되어 있어요. 저하께서는 그걸 정하고, 허락하는 분이십니다.”
진이 입을 꾹 다물고 웃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안이 해주는 따뜻한 말은 참으로 듣기 좋다.
“기둥이 든든하면 지붕이 무너지지 않지요. 저하께서 무너지지 않으면 결국 아래에 사는 백성들이 평온한 법이랍니다. 그리고 다 차치하여, 모두가 감내할 고통은 정해져 있으니. 귀족과 관료가 고생하면 할수록 백성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안 경도 이리 밤까지 일하오?”
“예. 그렇지요. 저도 저하의 기둥 중 하나입니다.”
이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펜을 들었다. 그러곤 시원하게 새기는 서명. 사법부에서 진행될 하이만 가문 재판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