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58
제258화. 선고
진 베로시온.
아이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깨달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황가의 핏줄임을 스스로 이른 것이라고. 형제의 그림자에서 살던 자신이, 끝내 살아남아 이토록 화사한 제국민들의 눈빛을 받고 있노라고.
또한, 무엇보다-
‘마리브 형님과 게일 형님이 바라던 게 이것이로구나.’
솔직히 어린 마음에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둘이 어째서 그리 치열하게 겨누고 시기하며, 검을 맞부딪혔는지 말이다. 아비를 해하고, 형제를 베면서까지 왕관을 얻는 게, 의미가 있는가?
진에게 황제란 그저 살아남기 위한 목적지였으며, 이안이 일러주는 자신의 위치였다.
그런데 이제는 진심으로 알겠다.
진심으로 두 형들의 마음을 이해하겠다.
‘이걸 보고자 했던 것이라.’
바리엘의 환호는 심장을 울렸고, 웃음은 가슴을 간질였다. 그들이 저에게 보내는 눈빛만큼 귀하고 반짝이는 건 없다. 저들이 이루는 삶이 곧 자신의 역사가 될 것이고, 저들의 존재가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아아. 그래.’
형님들은 진작 이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피와 숨을 바쳐서라도 얻고자 했던 게다. 끝끝내 실패했다 하더라도,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만큼 값어치 있는 것이라.
단순히 증언을 위해 섰음에도 과분하여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어떨지 짐작조차 못 하겠다.
진은 마도구를 가볍게 그러쥐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른 시일을 간격으로, 황궁이 두 번이나 봉쇄되었다. 이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례였고, 제국민들의 불안이었으며, 황실의 수치였다.”
군중들이 제 옆의 사람을 껴안으며 진을 올려다봤다. 어린 황자의 목소리가 마도구를 타고 귓가에서 속삭였다. 여리지만, 힘이 잔뜩 서려 있는 음성. 황실의 고고한 자태가 그대로 묻어났다.
“사달은 마리브 형님과 게일 형님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나, 그 주위를 두르고 더한 열기를 내었던 자들은 따로 있었다.”
진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하여 그날 일을 하나씩 풀어갔다. 이미 이안이 한차례 알렸고 언론사가 보도하였으나, 황실의 근본이 직접 전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나.
제국민에게 바리엘은 황실이었고, 황실에게 바리엘은 제국민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눈으로 확인하여 믿음을 견고히 하는 것은, 굉장한 힘을 만들어낼 것이라.
“그릇된 영광에 눈멀어 명예를 스스로 짓밟은 자들. 이곳에 선 일곱 가문이 바로 그러하다. 없었던 일이라 할 수는 없을 터. 내 얼굴에 난 상처가 바로 그날의 진실이니.”
하이만은 표정 변화 없이 진을 올려다봤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지금,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문득 떠올리게 하는 아이다.
내란 당시만 해도 있는 듯 없는 듯 아르센을 대신하여 어미에게 버림받았던 아이가, 지금은 모든 경쟁자를 제치고 홀로 남았다. 명백한 패배자에서 유일한 승리자로 운명이 변했다.
“나는 생생히 증언한다. 하이만 공작의 흑갑옷들이 어머니의 궁을 산산이 부쉈으며, 도망치는 자들을 죽였고, 직인을 찬탈하기 위해 마리브 황자와 맞섰다.”
몰랐기에 의도가 없었다는 거짓을 단박에 반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죽었다.”
이는 내란죄를 벗어나기 위해 아르센에게 힘을 실어주려 한 것을 짚는 말이다. ‘형제들’이라는 단어로 묶여있긴 하다만, 결과로는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말이다.
“마법부와 황실에서 제기한 혐의 모두, 내 이름을 걸고 진실임을 증명하지. 그러니 부디, 황실의 안정과 나라의 평안을 위해 죄인들에게 정당한 죗값을 내리길 바라오. 판사장.”
판사장은 화답하듯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바리엘을 위하여.”
“바리엘을 위하여.”
노년의 판사장과 소년의 황자가 하나의 가치만을 위해 맹세했다.
그걸 지켜보던 군중들이 수군거리며 황궁 벽에 가까이 다가왔다. 병사들이 창으로 막아섰지만, 상기된 열기까지 어찌 막겠는가? 그들은 손을 뻗어대며 진을 불러댔다.
“저하, 딜라이나 님과 아르센 저하가 돌아가셨나요?”
“자네, 몰랐는가? 신문에 났었는데.”
“진 저하! 얼굴을, 상처를 다시 보여주십시오!”
“바리엘에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시라. 제발 가까이!”
“저하! 저하! 진 저하!”
“판사장님. 바리엘을 위하여, 나라를 어지럽힌 귀족들을 모두 멸문해 주십시오.”
“멸문하라! 멸문하라!”
“저것들 욕심 때문에 귀한 황실의 숨이 끊어진 것 아닙니까? 황자들이 내란을 일으키면 옆에서 말리고,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게 저들 역할 아니냐고요!”
“황제 폐하께서 보고 계십니다!”
“재판 똑똑히 하십시오!”
“물러서라! 더 이상 다가오면 퇴장시키겠다!”
“물러서! 뒤로, 뒤로 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본인들은 그저 한마디만 던졌을 분인데, 머릿수가 좀 많은가? 한 번에 수백 개의 고함이 터진 것과 다르지 않다.
귀족들은 엄청난 고성에 멈칫거리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천한 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저리 큰소리를 낸담? 귀족들조차 숨을 죽이고 있건만.
“불경죄로 죄다 쳐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쯧쯧. 못 배운 것들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세수 확보한답시고 개방한 것부터가 문제였어요. 저것들이 지엄하다는 의미를 아는지조차 의문이군요.”
“저러다 창문 넘어오면 어떡해요? 황궁친위대가 미리 수라도 써놓는 게 좋겠는데요.”
다들 이안 쪽을 힐끔거리며 뭔가 조처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의 마무리를 기다렸다.
“이상. 발언을 마치오.”
“네. 잘 들었습니다.”
짝짝짝!
이안은 다시 한번 보란 듯이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반사적으로 다른 자들이 먼저 박수를 올렸다. 우렁찬 격려 속에서, 진은 이안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이 눈을 잠깐 맞추었다. 아이는 창문 가까이 가고 싶어 했고, 이안은 그 마음을 읽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문의 존폐를 가르는 재판 중이었으니, 이안이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저으며 말렸다.
“자, 그러면…….”
타앙! 탕탕!
재판장이 마도구를 인지하여 봉을 보다 강하게 내려쳤다. 군중들은 동시에 귀를 틀어막으며 멈칫거렸다.
“정숙들 하십시오. 재판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제국민들은 황실 병사의 지시에 따라 질서를 정확히 지키길 바랍니다.”
제자리로 돌아온 진이 반듯하게 앉아 정면만 바라봤다. 옆에서 제국민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버티다 버티다 못해 시선을 돌리니, 그들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재판 따위, 뒤편으로 치워진 지 오래다.
“다음은 아발리아 가문입니다.”
재판은 계속되었다. 하이만 가문이 그러했듯 사라질 자들에 대한 예우를 지켜주기 위해, 절차는 생략되지 않았다. 하이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네. 혐의를 모두 인정합니다.”
“알겠습니다. 공조죄를 적용합니다.”
타앙!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공조죄를 적용합니다.”
타앙!
“…할 말 없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대부분이 의욕을 잃고 포기했다는 것이다. 하이만처럼 끝까지 부인하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스스로 변론하는 자가 드물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품위가 있다 여길 것이요, 또 누군가는 나약하다 여길 것이다. 어쩌면 합리적이라 생각할 수도.
진은 물 흐르듯 진행되는 재판을 지켜보며 하이만을 힐끔거렸다. 뒤통수만 보이지만, 꼿꼿한 자세가 여전했다. 아마 표정 역시 마찬가지일 터.
“변론, 더 없습니까?”
“…….”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판사들은 선고를 조율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족이었던 마리브와 달리 이자들은 귀족이다. 과반수의 의견을 따를 것 없이, 판사들의 권한 아래에서 선고할 수 있었다.
“십 분간 휴정하겠습니다.”
사형은 사형인데, 그 방식이나 순서 혹은 추후의 사체 처리 따위를 의논하기 위함이다.
판사들이 나가자,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진과 시선이 마주친 제국민들의 얼굴에 기쁨이 물들었다. 언제, 그들이 또 황실의 귀한 분을 마주할 수 있단 말인가? 납작 엎드려 받드는 게 옳다만, 제국민들은 계속해서 진에게 닿기를 원했고, 용기 냈다.
“저하, 이것을…….”
“어허, 물러나시오.”
“죄송, 죄송합니다.”
병사들 사이로 내밀어지는 한 송이의 꽃.
진은 놀라서 시아오시를 쳐다봤다. 시아오시는 황자를 대신하여 창문에 가까이 다가가 병사를 불렀다. 병사가 꽃을 받았고, 시아오시에게 넘겨주었으며, 그것은 이내 진에게 건네졌다.
진은 노란 들꽃 하나를 소중히 감싸고 중얼거렸다.
“…고맙네.”
“저하께서 무사하시니, 저희가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제국민에게 받은 선물이다. 진은 연신 코 끝에 꽃잎을 문지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그걸 흐뭇하게 지켜보는 로만드로. 이안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으나, 찰나였다.
“시아.”
이안은 시아오시를 조용히 불러 속삭였다. 바로 옆의 로만드로조차 듣지 못하게끔, 아주 은밀한 꾸중이었다.
“모르는 자가 내미는 것을 저하께 함부로 건네주면 되겠는가? 각별하게 조심하라.”
“…죄송합니다.”
“되었다. 미리 이르지 못한 내 불찰도 있으니.”
“꽃은 어찌 할까요?”
“일단은 두어라. 저하께서 저리 좋아하시니.”
볼우물 활짝 팬 웃음을 어찌 저지하나? 이안의 끄덕임에 시아오시가 진의 옆자리에 가 앉았고, 진은 연신 그에게 꽃을 보여주며 뭔가를 속닥거렸다. 분명 자랑하고 있음이라.
로만드로는 봉긋 솟은 광대를 숨기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턱 괸 손이 앙증맞게 모여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하께서 황궁 밖으로 나간 적이 없지? 후계자 임명식은 실로 성대하고 완벽하게 준비해야겠네.”
수도 입구에서 황궁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금빛의 도로가 있다. 황족만 이용 가능한 것이었는데, 보통 황족이 출전하거나 귀환할 때 혹은 대관식 등의 공식 행사에서 쓰는 도로였다.
진은 후계자가 됨으로써, 처음으로 궁 밖에 나가 바리엘을 만날 것이다.
“예. 그리해야지요. 아마 외국에서도 손님이 많이 올 것이니까요.”
“그리하겠나?”
“그럼요. 유일한 황자 아니십니까.”
유일한 황자라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긍정적으로는 차기 황제라는 것이요, 부정적으로는 바리엘 황실이 내란과 소란으로 인해 취약해져 있다는 것을 뜻했다.
외세의 입장에서는 직접 황궁으로 들어 정세를 파악하고, 진에게 눈도장 찍을 기회라. 왕까지는 무리겠지만, 그 아래 후계자들이 방문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끼이익.
그때, 판사들이 재입장했다. 그들은 벨벳의 검은 선고문을 든 채였다. 다들 순식간에 침묵하여 판결이 알려지기만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중앙의 일곱 가문이 지난날 바리엘을 위해 헌신했음은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내란과 관련한 죄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희석할 수 없는 중죄. 하여, 황실재판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고합니다.”
사락.
판사장이 가문의 수장들을 하나씩 짚으며 일렀다.
“하이만을 포함한 대상자 일곱 가문의 무형, 유형 재산을 모두 황실에 귀속하여 압수한다. 또한, 가문의 성(姓)을 따르는 자들은 교수형에 처하며 그 시체를 일주일간 거리에 효시하여 반역의 경계로 삼을 것이다.”
타앙! 탕탕!
무표정하던 하이만이 결국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 분노에 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으며, 귀족들은 복잡한 심경에 앓는 탄성을 내질렀다. 관료들은 모두 일어나 이안과 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저하.”
“모두 끝났군요. 저하, 축하드립니다.”
“이안 경, 수고했네. 수고했어!”
“아닙니다. 다들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아이고, 로만드로! 자네! 이제 가서 좀 쉬게!”
이안은 진의 어깨를 감싼 채로 곳곳에서 들려오는 축하에 화답했다. 그러는 동안 하이만과 귀족들은 황궁친위대에 의해 끌려나갔고, 판사장은 재판의 마무리를 일렀다.
“이상, 재판을 마치겠습니다.”
타앙! 탕!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황실의 승리였다.
적어도 이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