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6
제26화. 수락
수가 제자리에서 몸을 가볍게 털었다. 그리고 이내 멀뚱멀뚱, 베릭을 쳐다봤다. 시작은 그쪽에서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그럼 시간 잰다?”
잘깍.
수가 허리춤에 달린 회중시계를 설정했다. 그와 동시에 베릭이 달려들어 수에게 주먹을 날렸다.
“맞고 울지나! 마라!”
“그래!”
쉬익! 쉭!
허공을 가르는 주먹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몸짓 하나하나에 살기를 감아선 베릭. 꽤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비교하여, 수는 굉장히 여유로웠다. 한발씩 뒤로 빼는 것만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자아. 1분 지났어.”
“미친! 아니,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건데?”
“도망 안 치면? 네가 견딜 수 있겠어?”
“뭔 개소리! 씨발! 똑바로 해!”
주먹에 감정이 실리자 궤가 흐트러졌다. 이안은 잘 깎인 바위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수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 것 같아서.
“내가 공격하면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
빠악!
재밌다는 듯 베릭의 턱을 후려치는 수.
주먹이 제대로 들어갔다. 베릭의 중심이 크게 흔들리고, 겨우 허벅지에 힘을 줌으로써 버텼다.
그가 멈칫거리며 수를 올려다봤다. 솔직히, 충격에 의한 충격이라기보다 의외성에서 오는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너…….”
“좀 그렇지 않아? 상대한테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쥐어 터진다는 게. 뭐. 너만 좋다면 나도 좋지만.”
“이런 미친, 또라이가 싸가지…….”
빠악!
채 욕을 다 뱉기도 전이다. 다시금 베릭의 머리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수는 재빠른 공격으로 쉴 틈 없이 베릭을 몰아붙였다.
이안은 턱을 괴고서 한숨만 낼 쉴 뿐이다.
‘임자 제대로 만났군.’
저거, 저 성격상 대련이 끝나도 깔끔하게 마무리될지 모르겠다. 베릭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타격에 가만히 서서 맞는 수밖에 없었다. 수십 마리의 벌들이 쏘아대는 것처럼 사방에서 수의 일격이 터져댔다.
퍼억!
“베릭. 괜찮아?”
“X발, 말 걸지 마.”
“괜찮다니 다행이군.”
그가 눈을 부라리며 이안을 노려봤다. 집중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상대는 급소를 파고들 것이다. 지금으로는 방어가 최선이다.
이안 역시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별채 쪽을 힐끔거렸다. 창문에 네르사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서 있었다.
“2분 남았다.”
빠악! 빡!
이안의 안내에 수의 발길질이 더욱 격렬해졌다. 시간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즐거운 표정이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3분의 대련으로 확실해진 게 있었다.
“수. 자네 정말 빠르군.”
“당연하지. 네르사른 님이 괜히 날 데리고 온 줄 알아? 일족 중에서 나 따라올 자가 없어.”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이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있는 탓일까? 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문득, 어둠 속에서 이안의 눈동자가 금빛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수십 번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쏟아부었는데, 베릭은 아직 멀쩡해. 빠르기는 하되 영 실속이 없군.”
아무리 마력의 힘이 깔려 있고, 베릭의 체력이 좋다고는 한들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계속해서 처맞고 있는데, 베릭은 넘어가지 않았다.
정곡을 콕 찔린 수의 구릿빛 피부가 확 붉어졌다. 아마 본인도 인지한 문제점이었나 보다.
“너……!”
“어지간하면 피떡이 되어 있어야 정상인데.”
“하! 봐주면서 했더니 이것들이 아주-!”
수가 흥분해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발차기 축이 흔들리면서 공격에 군더더기가 생겼다. 뒷목을 감싸고 있던 베릭이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피는 안 터져도 X나게 아프다고.”
“야! 놔! 안 놔?”
“너 같으면 놓겠냐?”
어정쩡하게 다리가 붙잡힌 수는 몸을 밀착해서 상체를 지탱하려고 했다. 하지만 베릭이 더 빨랐다. 재빨리 복부를 가격하여 수를 바닥에 밀쳐 눕혔다.
퍽!
“악!”
“시작 전에 분명히 말했다? 맞고 울지 말라고.”
“울긴 누가 울어? 미쳤냐?”
그리고 퉤! 침 뱉는 솜씨가 아주 예술이다. 베릭은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서는 얼굴을 눌러서 고정했다.
“아주 피떡이 뭔지 보여주려니까. 기대해.”
“꺼져! 꺼지라고! 빨간 대가리 주제에!”
“지랄하네. 너도 그렇게 만들어주마.”
주섬주섬, 그는 한쪽 주머니를 뒤적거려 붉은 안료를 꺼냈다. 순간 무슨 의도인지 몰라, 수가 멈칫거렸다.
이안은 창문을 확인한 다음 천천히 둘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창가의 그림자가 3개로 늘어난 참이다. 네르사른과 간샤, 무주룬 모두 궁금한가 보다.
“수.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거라.”
이안은 결박당한 채 발버둥 치는 수를 진정시켰다.
“합의된 대련이라고는 하나 서로 피를 내면 좋을 게 없는 관계 아니겠는가? 간샤나 무주룬이 아니라 너를 보낸 것은 막내기도 하거니와,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게끔 하려는 네르사른 님의 혜안이시다.”
“아니거든! 닥쳐!”
“뭐.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네 일이니 뭐라 않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네가 베릭에 의해 바닥에 누워있다는 것이고, 실제 전투였다면 죽었을 거란 사실이지.”
수는 분하다는 듯 씨근덕거렸다.
베릭은 승리에 도취된 미소를 지으며 수의 얼굴에 안료를 퍼 발랐다.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하니 돌아가서 아뢰라. 대외적인 이유로 너를 쓰러트리진 않았으나, 우리의 승리를 인정하면 말끔해지는 용액을 주마. 혹여 그대로 저택을 나선다면, 천려족은 꽤나 우스운 꼴로 브라츠 영지민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삑삑삑!
이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회중시계 알람이 울렸다. 꼼꼼하게 다 바른 베릭이 몸에 힘을 풀자, 수는 그의 배를 걷어차며 일어섰다. 그리고 닦아내려 열심히 문질렀으나, 지워질 리 만무했다.
“으으으! 이게 뭐야!”
“우리 어머니께서 쓰는 특별 안료다. 물과 땀에 지워지지 않아서 애용하시더군.”
수는 절망스러운 시선으로 이안을 올려다봤다. 흰 눈망울 외에는 모든 것이 붉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지막으로 베릭의 머리를 후려쳤고, 이내 도망치듯 별채로 튀어갔다.
따악!
“아오! 저게!”
혹이라도 생긴 걸까. 베릭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수의 뒷모습에 욕설을 지껄였다. 이안은 그에게 마력을 더 넣어주며 위안했다.
“수고했다.”
“근데 저거 저렇게 보내도 돼? 뒷말 안 나오게 원하는 대로 패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단어가 상스러워.”
“조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주인님?”
“…됐다. 수의 상태가 안 좋으면 분명 데르가가 눈치챌 것이다. 저쪽에서 수락한다고 한들 백작이 훼방 놓을지도 모를 일이고. 무엇보다 천려족은 가족의 유대감이 강한 자들 아닌가?”
진짜 죽어라 때려눕혔다간 국경 넘어서 어떤 보복을 받을지 모른다. 최대한 유혈 없이 허락을 받아내는 방법이 필요했다.
“근데 진짜 말한 것처럼 빤하네.”
이안이 대련 전에 언급한 부분은 딱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상대가 공격 대신 회피만 할 때는 도발로 공격을 끌어낼 것. 따라갈 수 없는 상대를 뒤쫓는 것보다, 그쪽에서 오게끔 힘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두 번째는 버틸 것. 천려족은 호전적인 종족이다. 일방적인 전투에서 오는 고양감에 도취될 때까지 버티면 분명히 빈틈이 생길 거라 일렀다.
틈은 이안이 만들었지만 잡아채는 것은 베릭의 역할이었다.
“천려족이라 그런 게 아니라, 보통 그러하다. 몸놀림이 날쌘 자들은 생각보다 힘이 약하니까.”
어느새 수는 창문을 넘어 방으로 돌아갔다. 벽 넝쿨 위로 붉은 자국이 남았으나, 아마 누구도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안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이안 님? 어디 다녀오십니까?”
“잠시 본채에.”
“오늘 밤은 경비가 삼엄하니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그리고 외부인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경비가 베릭을 가로막으며 보고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릭은 내일 오겠노라 말하며 저택을 나섰다. 이안은 제 방을 지나 한 층 더 올라갔다.
똑똑.
“이안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안 돼요! 들어오지 말라고 해요!”
“수. 시끄럽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수라장이다. 간샤와 무주룬이 천으로 수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얼룩만 질 뿐, 차도가 없다.
“원하시면 지우는 용액을 드리고자 하는데요.”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장난해?”
네르사른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안을 향해 돌아봤다.
“분명 대련을 허락했는데 이런 장난질이라니. 모욕이라고 느껴지는군.”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하지만, 상처투성이에 퉁퉁 부은 얼굴로 브라츠를 나서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승부에는 가정이 없다네.”
“하지만 수의 얼굴이 가정을 가능하게 하죠. 안료가 저토록 칠해질 정도면 굳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네르사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는 금방이라도 화병으로 뒤집힐 듯 이를 갈았고, 간샤와 무주룬은 알 수 없는 시선을 나누었다.
“아하하! 하하!”
침묵을 깬 것은 네르사른의 웃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간샤와 무주룬도 폭소했고, 울상인 것은 수뿐이었다.
“그래. 졌네. 불복하는 것만큼이나 추잡한 것은 없지. 베릭이라고 했나? 수가 아주 이를 갈던데. 꼭 대사막으로 데려가 노예처럼 부려야겠다고.”
말은 저렇게 하지만 천려족에는 노예제가 없다. 모두가 가족이었으니까. 이안은 공손하게 말을 덧붙였다.
“무례는 용서해 주시되, 제가 네르사른 님의 의중을 잘 이해했다고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군가의 부상과 그걸 알아챈 데르가 백작. 그게 공동체 관계에서 어떤 변수를 부를지 알 수 없었다. 재수 없다면 이안은 이안대로, 천려족은 천려족대로 난감해질 게 분명했다.
네르사른은 긴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웃었다.
“좋소. 화친식 때 쿠실레를 하나 더 데려오지.”
베릭을 위한 이동수단을 가져오겠다는 뜻이다. 이안은 감사를 표하며 주머니에서 작은 통을 꺼냈다.
“씻으면서 물과 함께 섞어 쓰면 될 겁니다.”
타앗!
수는 대꾸 없이 용액을 낚아채 가며 세면실로 뛰어 들어갔다. 간샤와 무주룬이 혀를 차며 웃었고, 네르사른은 이안에게 포도주를 건넸다.
“한잔하겠나?”
천려족은 아이라고 해서 제약을 두는 게 없었다. 그저 책임 아래 모든 게 자유로울 뿐. 이안은 실로 오랜만에 넘기는 포도주에 황홀함을 느꼈다.
* * *
“네르사른.”
“네. 백작님.”
여명이 터오는 새벽.
아직 도시는 잠들어 있었지만, 브라츠 저택만큼은 한낮처럼 분주했다. 바람처럼 온 손님들이 떠날 채비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채 식당에 다 같이 모여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갈 길이 멀었다.
“그대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소. 화친식은 오늘로부터 일주일 후. 촉박하니 최소한의 준비로 일정을 소화하겠소.”
“백작님의 이해에 천려족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부족장께는 무운을 빈다 전해주시길.”
데르가는 몇 시간 전, 한창 어두울 때 귀가했다. 몰린 경과 나눌 얘기가 깊었던 모양이다.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몰린 경도 수도로 떠날 것 같다.
이안의 입적을 위해서라지만, 아마 그들은 입적신청서 대신 내부고발자 인장을 황제에게 보일 터.
“그럼, 다시 만날 날까지, 데모샤(신의 축복 아래).”
천려족은 저들의 인사를 남긴 다음 쿠실레에 올라탔다. 밤사이 멀끔해진 수가 두건을 뒤집어쓰고서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이 살짝 웃자, 그녀는 보이지 않게 이를 드러내며 짜증을 부렸다.
“가자!”
“문을 열어라!”
히이잉!
쿠실레의 울음소리와 함께 발굽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이내 그들은 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저택을 빠져나갔다.
데르가와 백작 부인, 첼 그리고 사용인들 대부분이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아직 새벽의 몽롱함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다.
“화친식이 일주일 후다. 간소하게 하되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 그들을 재촉한 것은 집사였다. 하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며 이안을 돌아봤다. 아이의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