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63
제263화. 각자의 사념
‘제국의 축복이시군요. 최초의 귀족 마법사라! 반갑습니다. 저는 나움 오비아입니다. 편하게 나움이라 부르십시오.’
본래의 이안이 열다섯 시절, 처음으로 황궁에 들어와 이름을 나눈 자가 나움이었다.
모두가 축복이라 여겨 의심치 않았던, 그래서 그것이 두 사람의 인생을 어찌 휘두를지 예상치 못했던, 한 여름날의 만남이었다.
‘나도 편하게 이안이라 할게. 마법부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새로운 동료가 몇 년 만인지! 아직 마법부를 다 보지 못했지? 내가 소개해 주마.’
갈색빛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칼처럼, 미소 또한 부드러운 자였다.
나움의 움직임에 마법사들은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멀리했다. 대부분 천민 출신이라, 고난의 밑바닥을 겪었던 자들이다. 귀족 자체에 대한 반감, 신분 격차 없던 마법부에 층이 생길까 싶은 염려, 이안이 귀족 정체성을 내세워 마법부에 해를 끼칠 것이라는 경계 따위가 점철된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나움은 그들에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다들 이안 만나고 싶어서 안달 났구나. 미안하지만, 내가 담당이니 물러서고 일이나 하러 가라. 입부식 때나 인사해.’
이안은 나움 같이 너스레가 자연스러운 자를 그때 처음 보았다. 언제나 고고하고, 고결하며, 품위 재는 귀족들 사이에서,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따지자면 마법부는 낯선 곳이었으니, 당연한 감상이다만.
아무튼, 그래서 그랬던 걸까? 그를 따라 걷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마법부의 길만이 아니라, 인생의 길 또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나움은 부정할 수 없이 믿을 만한 동료였고, 훌륭한 스승이었으며, 없어서는 안 될 친우였으니. 세월의 차이 따위는 관념에 불과했다. 확실히.
‘나움. 나는 너에게 깊이 고맙다.’
마법부 별채 안쪽의 단출한 서재.
이안과 나움은 시간 날 때면 그곳을 찾아 탐독하는 것을 즐겼다. 책에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안이, 문득 그리 말했다. 싱그러운 여름의 이파리가 가을빛으로 물드는 계절이었다.
‘무엇이?’
‘…….’
무엇이? 그걸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나?
끝이 없는 대답인지라, 이안은 침묵했다. 나움 역시 계절의 변화를 살폈다.
‘이안, 그거 아나? 마법부 별채에서 이곳 창문이 제일 크다.’
‘어째서?’
‘처음 별채가 건설될 때, 원래 이곳은 없는 공간이었대. 근데 공사를 담당하던 선조께서 아쉽게 여겨 새로 만들었지. 예정에 없던 거라 벽면 대신 창문으로 대체했다 하더라고.’
‘이름이 티모시였나?’
‘그래. 저번에 우리 집 와서 보았지?’
나움이 자랑스럽게 웃었다.
티모시, 그는 버고스 왕국 출신의 이민자라 했다. 귀화했을 때 받았던 바리엘 제국민 증명서는 나움의 가족들이 소중하게 지니고 있었다. 자신들을 쇠락한 버고스 왕국이 아니라, 바리엘의 제국민으로서 살아가게끔 해준 감사함을 기리기 위해서.
‘아마 티모시 님도 모르셨을 거다. 훗날 너와 내가 이렇게도 소중히 쓰고 있다는 걸.’
‘우리가 서재를 여기만 쓰는 것도 아닌데.’
‘흐음. 그래? 대신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게 있지.’
이안이 모른 척, 고개를 슬쩍 돌렸다.
힘들 때마다 여기 왔다는 걸 들켰나? 나움이 소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책장을 넘기려고 할 때였다.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타닥타닥!
인기척이 드문 별채 중에서도 제일 안쪽의 공간이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닌지라, 이안과 나움은 동시에 문 쪽을 바라봤다.
거칠게 문이 열리며 찬 바람이 훅 끼쳐왔다. 파다닥 넘어가는 책장, 상기된 마법사의 얼굴, 이상하게 쿵쿵 울리는 심장.
‘이안, 나움! 젠장, 얼마나 찾았다고!’
‘왜 그래?’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이안은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란 걸 직감했다. 인생의 분기점이라는 게 무엇인지, 오감으로 느꼈으니까.
‘이안. 차기 황제로 네가 거론되고 있어.’
‘…….’
‘예상했지?’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궁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황제는 오늘내일했고, 후사는 없었으며, 이안은 황가의 방계 혈족이자 신성한 마법사이지 않은가.
거기에 더하여 어렸다. 직접 황좌에 오르기 어려운 권신들 처지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건. 다만, 엄중한 자리인지라 이안은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크로니 님이 찾고 계셔.’
크로니라는 이름에 나움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안의 조카이자, 제국방위부의 부장관이었으며, 이안의 부모를 대신한 후견인의 아들. 그리고 이안에게 마법의 힘을 숨기라 종용했던 자.
이안이 일어서려고 하자, 나움이 붙잡았다.
‘찾는다고 해서 만날 필요 없다, 이안.’
언제나, 크로니를 만나고 오면 이곳을 찾는다는 걸 알아. 나움은 뒷말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헛소리로 아이의 심장을 후벼놓을지 알 수 없다.
‘괜찮다. 말대로, 나는 이 순간을 예상했어. 그러니 지금은 내가 필요하여 그를 만나는 것이다.’
이안이 일어섰다. 그러자 색소 옅은 벽안과 백금발이 햇살을 받아 더더욱 환하게 빛났다.
그걸 본 나움 역시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인생의 분기점에서 이안이 스스로 나아간 순간이었고, 그것 끝이 차기 황제의 시작이라는 걸 깨달았으니.
‘나움.’
‘…그래.’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계속 생각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외면하려 해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어.’
황제, 바리엘의 정점, 세상을 받치고 바꿀 수 있는 자.
생각의 불씨를 꺼트리려 해도 쉬이 되지 않았던 것은, 마법사로 일하며 만났던 제국민들의 웃음과 울음 때문일 것이리라.
이안은 나움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그리고 너에게는 마법부 장관 자리가 어울려.’
‘이안.’
‘지금처럼, 앞으로도 너의 도움을 바란다.’
차기 장관, 그러니까 이안이 황제가 된다면 일종의 내각까지 정해진 참이라. 마법사는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며 문밖으로 나섰다. 이안 역시 망설임이 없다.
홀로 남은 나움은 이마를 짚으며 이안이 펼쳐놓은 책을 덮어주었다. 물론 그 역시 할 수만 있다면 언제나 이안의 곁을 지킬 것이다.
이렇게, 책을 덮는 것처럼 뒷일을 봐주며 제국의 찬란한 미래를 함께 이끄는 것 또한 둘 없을 영광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안아. 황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버리는 일이란다.’
안타까울 뿐이다.
황궁이 어떤 곳인가? 피바람이 숨죽인 채 상대의 목덜미를 노리고, 수많은 욕망이 한데 모여 깊은 웅덩이를 만든 곳이다.
홀로 선 아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견딜 수는 있겠지. 부러질 수도 있겠지만.
‘하아.’
스윽.
나움 역시 읽던 책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크로니를 만난 이안이 이곳을 다시 찾을 때는, 저가 없는 편이 나을 것이라.
그가 바리엘에게 삶을 바치기로 했다면, 저 역시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인연조차 기적이건만, 두 사람은 사제와 친우와 동료의 인연을 맺지 않았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나움은 무의식적으로 창문에 작은 주문진을 그려 넣었다. 이안이 이곳에서 슬픔을 풀 때, 너무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 *
대회의에 모인 각 부서의 장관들과 관료들은 어색한 눈빛만 주고받았다. 논의할 거리가 산더미인 터라, 드넓은 회의실 뒤쪽으로는 서류가 다발로 놓여있었다. 한시가 바쁘게 진행되어도 모자랄 판에, 주요한 두 인물이 넋을 놓고 있었으니.
“자, 그러면 다음 사안입니다. 문화부에서 올린 것이군요. 하이만 가에서 들어온 그림 백다섯 점 중, 서른 점을 황궁 국립미술관에 전시, 열일곱 점은 황실 개인 소장, 그리고 다른 것들은 경매에 올린다고 하는데요. 진 저하. 목록을 확인하셨습니까?”
“으응? 아아, 그래. 확인했네.”
한 명은 진이요-
“그러면 동의하십니까?”
“…아직 공식 감정서가 다 안 올라온 것으로 아는데요.”
다른 한 명은 이안이었다.
진이 허둥지둥 대답하자, 이안이 서류를 뒤적이며 덧붙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로만드로를 비롯하여 몇몇 관료들은 알고 있다. 이안이 무언의 상념에 계속 빠져있노라고. 평소라면 진이 저리 대답하기 전, 옆에서 먼저 일러주었을 것이라.
문화부 장관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보고를 이었다.
“하이만 가에서는 매년 미술품 감정을 따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공식 감정서를 대신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진행하려 합니다만. 워낙 수가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반대합니다. 하이만 가의 감정서를 믿을 수 없습니다. 세금을 누락하기 위해 일부러 가치를 낮춘 것도 있을 것이며, 이득을 위해 올린 것도 있겠지요.”
“음, 그것이… 해당 감정사가 재작년까지만 해도 황궁에서 일했던 자입니다. 신뢰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여겨졌습니다만.”
“그러면 예술품을 감정하기보다, 감정서를 감정하는 게 더 쉬운 길이겠군요. 어찌 생각하십니까, 저하?”
이안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진의 의중을 물었다. 그러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진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오, 옳다고 여겨지네.”
“그럼, 그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뭐지?
퀸타나가 마른 궐련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 저하의 태도가 확실히 이상하다. 평소라면 눈빛을 반짝이며 이안을 살피고, 하나하나를 따라 하던 저하 아니신가?
그런데 지금은 불편하고,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다.
마치 혼자 끙끙 앓는 것 같은…….
‘이안 경도 확실히 다르고.’
저자의 눈치가 어디 보통이던가? 진의 태도가 확연히 다른데, 알아채지 못하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좋습니다. 감정서에 관한 건은 그리 처리하도록 하지요. 다음 안건입니다.”
탕탕!
수상은 지체 없이 봉을 두드리며 회의를 끌어갔다. 비교적 중요도가 덜한 것들은 속전속결로 맺는 것이 조금이라도 회의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이안과 진이 계속 저 상태라면 아마 다음 날까지 회의가 이어질 것 같지만.
“마력봉인석에 관한 권한 분배군요. 마법부의 안건입니다. 음, 파악되는 총 수량에 관하여 황제 폐하 5할, 다른 황족 3할, 마법부 2할을 제안하였습니다.”
수상이 읊자, 진이 화들짝 놀라며 서류를 내려다봤다. 이는 다른 부서의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마력봉인석이란 무릇 마법사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아니던가?
신의 힘에 가까운 자를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방도인데, 그중 절반 넘는 권한을 황실에게 넘긴다니. 이는 게일과 인연이 깊었던 웨슬리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위에 이른 비율이 맞습니까? 이안 히엘로 장관?”
“그렇습니다. 마법부 장관으로서 내란을 겪으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우선, 마력봉인석의 전체적인 전수 조사와 확실한 관리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절대적인 힘에는 언제나 균형 잡힌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을요. 황실의 안녕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위해서는 이것이 마땅하다 여겨집니다. 현재 황실에서 폐하를 제외한 황족은 진 저하뿐이시니, 진 저하에게 마력봉인석 권한 3할을 부여하는 게 옳겠습니다.”
진의 눈이 점점 커졌다. 날카로운 부분을 마법부 쪽으로 하여 칼을 쥐여주는 것과 진배없다.
“음. 이드갈에 관해서는요?”
“…마법부 자체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추적하여 없애는 것이 혼란을 덜 방도라 그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진 저하. 저하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나 말이오?”
아르센의 속살거림, 하이만의 이간질 그리고 황족만 알고 있다던 통로를 꿰고 있던 이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머릿속이 복잡했거늘, 놀랍게도 맑게 개는 기분이었다. 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동의하는 바요.”
마주 본 이안이 눈썹을 까딱거리며 웃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이제야 진의 이상함을 알아챈 것이다. 그러자 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미소를 지었다.
퀸타나는 두 사람을 가만 지켜보다가, 궐련을 주머니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깊이 파볼 필요가 있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