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65
제265화. 면천(免賤)
“오셨습니까?”
홀로 마법부를 지키고 있던 시아오시가 주인들을 반겼다. 이안과 진은 나갔을 때보다 좀 피곤해 보이긴 하다만, 베릭은 상태가 왜 저런 것인가? 옆구리 상처가 다시 터져서는 듣기 힘든 욕설을 입에 담고 있었다.
“제이럿, 이 개새, 아오-”
제이럿 대장의 짓이로구나. 그렇다면 필시 베릭의 무례함이 자초한 결과일 터.
시아오시는 능숙하게 수납장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 이안이 코피 흘리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의사가 아예 집무실에 구비해 놓은 것이었다.
“시끄럽다, 이놈! 제이럿 대장이 네 친구냐?”
“내가 대장 되면 친구지요!”
“어이고, 대장이 반대쪽도 꼬집었어야 했는데.”
“이게 꼬집은 걸로 보여요? 쥐어뜯었구먼! 아악! 아파! 살살 좀 발라줘요잉.”
로만드로가 시아오시에게 연고를 건네받아 상처를 돌봐주었다. 다행히 의사를 다시 부를 정도는 아닌가 보다.
두 사람이 그리 투덕거리는 동안, 이안은 언제나 그렇듯 바로 집무실 책상 위를 살폈다. 자리 비운 사이 올라온 서류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몸짓이다.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모두 대회의장에 모여있었으니, 진행된 보고서도 없었겠지.”
잘 되었다. 솔직히 이안도 조금 피곤한 차인지라, 내일 오전까지는 쉴 수 있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는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시아오시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그러자 진이 의자를 가까이 끌어와 턱을 괴었다. 마치 재미있는 일을 기다리는 것처럼.
“시아, 글을 읽을 줄 알지?”
“예. 저하 덕분에, 감히.”
“자. 네것이다.”
빳빳한 고급 용지가 곱게 접혀있었다. 머뭇거리며 바라보는 시아오시에게, 이안이 서둘러 받아보라며 손을 까딱거렸다. 그가 조심스레 받들자 로만드로 역시 치료를 멈추고 시아오시의 반응을 보기 위해 주시했다.
“읽어보렴.”
“…대제국 바리엘의 국민이 된 것을 환영한다.”
공식 문서치고 굉장히 감상적인 문구가 처음을 장식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사유재산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살아가도 된다는 허락과 그에 부여되는 권리, 의무 따위가 상세하다.
하지만 시아오시는 첫 문장에 사로잡혀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시아, 어찌 그래?”
기쁘지 않니? 활짝 웃는 모습을 기대하였건만, 그는 오히려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시아오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제 핏속에 흐르는, 수많은 이들의 인생이 떠올랐기 때문이라.
어미와 누구인지 모를 아비. 그리고 다시 어미의 어미들과 아비의 아비들. 혹 있을지 모를 형제자매들. 모두가 이 종이 한 장을 얻지 못하여 그리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참으로 덧없지 않나? 이 종이를 받기 전과 지금의 저는 다르지 않은데, 형체 없는 누군가의 허락으로 인하여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사람. 인격체가 존재함이 인정되는 사람.
그것도 바리엘 대제국의 국민.
“제 선에서 끊어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억겁의 세월 동안 이어져 왔던 노예의 핏줄이 이 순간 끊어졌다. 시아오시는 한 글자도 빠짐없이 증서를 읽으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중얼거렸다.
“고맙다는 말도 그만하면 되었다. 말했듯이, 내 그저 친절로 한 게 아니니까. 금화 쉰 닢. 식구가 많은 소작농이라면 버거운 금액이겠지만, 시아오시 너에게는 알맞을 것이라.”
천천히 갚으라는 뜻이었다. 보통 평민들의 한 달 봉급이 금화 한 닢이었다. 쉰 닢이라 하면 4년에 가까운 나날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가능한 금액이다.
하지만 시아오시는 현재 진의 유일한 수족이었고, 앞으로도 황궁에서 일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더 많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돈 나갈 일이 무엇 있겠나?
“갚으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시아오시는 진과 이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갚으면, 이제 이들과 함께할 수 없는 것일까? 주종관계도 채무도 사라진다면, 시아오시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할까? 평생 타의로 묶여있던 터라 벌컥 불안함이 밀려왔다.
이안은 그의 의중을 알아챘는지, 외투를 의자 등받이에 걸치며 대답했다.
“시아. 네 걱정보다 자유는 더 달콤할 것이다. 몇 년 후에 한번 보자꾸나. 지금의 너를 잘 기억해. 아마 훗날의 너는 지금의 너를 굉장히 놀라워할 터이니.”
물에 처음 몸 담그는 아이를 보는 것 같다. 지금은 두려워 머뭇대지만, 얼마 안 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제 뜻을 펼치겠지.
시아오시는 증서를 소중히 접은 다음,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얼마 후면, 황궁친위대와 제국방위부에서 인재를 선발한다 하는구나. 베릭은 지원할 것이라 하는데-”
“하고말고! 다 뒤졌다, 진짜! 으아악!”
“시아, 너도 하겠느냐?”
시아오시는 이안의 모든 행동에 의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지금 면천 증서를 내어준 것은, 인재 선발에 대비한 것이리라. 아무래도 노예는 모집 대상에서 제외일 터이니.
“네. 하겠습니다.”
자유민의 신분이 되었다면,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밖에 없다. 노예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이제는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보일 때. 주인들이 원하는 대로, 인재 선발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는 수밖에.
이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로만드로는 베릭의 상처를 계속 살피며 칭찬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하나둘씩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찾을 게다. 베릭 이놈을 보아라. 거칠고 투박하긴 해도 원하는 바가 또렷하니, 사는 게 재밌어 보이지 않나?”
“지금 옆구리 상처 터진 사람한테 뭐라는 거예요.”
“이것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얻은 것이라. 겸허히 받아들여.”
꽁!
로만드로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 베릭에게 꿀밤을 놓았다.
“무기며 보호구며, 준비할 것이 많을 것 같군. 시아는 조만간 나랑 같이 외출을 다녀오자. 집에 간 지도 오래라, 겸사겸사 비비안나도 보고. 음음.”
“나도! 나도 같이 지원할 건데, 왜 나는 준비 안 해줘요?”
“너는 흑검 있잖아!”
“이안아아! 나도 용돈 좀!”
두 사람이 나간다는 소리에, 베릭이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외쳤다. 용돈?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베릭을 찬찬히 살폈다.
“무엇에 쓰려고?”
“나도 보호구 사고-”
“고기 사 먹을 거지?”
“아, 그럼! 당연히 고기도 사 먹고! 헙!”
베릭이 제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멈추었다.
저저, 머릿속에는 당최 먹을 생각밖에 없나? 로만드로가 혀를 차며 구급상자를 정리하자, 가만 듣던 진이 이안의 소매를 조심히 잡았다.
“저기, 이안 경.”
“예, 저하.”
“나, 나도…….”
진이 우물쭈물 말꼬리를 삼켰다. 무엇이든 하문하시라, 이안이 다정하게 허리를 숙이자 진이 외쳤다.
“나도 밖에 구경 가고 싶소!”
“오, 진 저하님도 이안한테 용돈 달라 그래요.”
“이놈아, 바리엘이 저하의 것이시다. 누가 누구한테 용돈을…….”
신전에서 태어나 젖먹이 시절을 그곳에서 지낸 것 외, 진은 단 한 번도 황궁 밖에 나간 적이 없었다. 나갈 이유도 없었고, 필요도 없었으니까. 황궁은 넓었고, 모든 게 있었으며, 미지(未知)인 곳도 아직 즐비했다.
‘하긴. 마리브와 게일은 귀족들을 만나며 세력을 구축하고, 중앙 곳곳의 민심을 살피느라 외출이 자연스러웠을 터. 하지만 어린 황자가 나갈 만한 명분은 거의 없지. 딜라이나 역시 친정과 왕래가 끊겼고.’
진이 이안의 소매를 꾹 쥐고 눈을 반짝였다. 시아오시가 증서를 잡았던 손길과 다를 바 없이, 필사적이다. 이미 재판장에서 제국민들을 만났고, 그 기쁨을 알아버렸다. 모르면 몰랐지, 알고 있는데 어찌 원하지 않겠나?
“이안 경. 응? 제발. 후계자가 되면 더더욱 밖에 못 나갈 것이 분명하네. 매일 같이 학문과 수련에 파묻히겠지. 지금이 내 인생 중 제일 한가한 시기일세!”
열 살 난 아이가 인생을 논하다니, 이안은 미소를 머금으며 진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저하. 로만드로와 시아오시는 개인적인 업무로 나가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려면, 저하께서도 변장하여 신분을 숨기셔야 해요. 공식으로 행차하시려면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어.”
“그리고 저하가 가시면 저도 갈 것입니다.”
정예 기사들이 붙는다고 하더라도, 진을 혼자 보내기에는 불안했다. 자신이 곁에 함께해야 안심될 것 같았다.
“…그 또한, 원한다!”
허락 가능성이 점점 보이는구나! 진은 저도 모르게 발돋움하며 방방 뛰었다. 체통을 지키시라, 이안이 말려도 얼굴에 홍조가 가라앉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번 주중으로 날을 잡겠습니다.”
“와! 이안 경! 고마워!”
“아닙니다. 저하께서 장성하시면, 암행하는 일도 곧잘 있을 터이지요. 미리 연습한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진 황자의 첫 암행. 로만드로는 턱을 긁적이며 준비해야 할 것들을 떠올렸다.
우선, 황궁친위대에 알려서 은밀히 따라붙을 기사들을 선발하고, 동선 확인, 위조 신분증 마련 따위가 필요하겠지. 말로는 암행이지만, 사실 이를 위해서라도 각 부서의 협조는 필수적이었다.
“그럼 우리 다 같이 가?”
“베릭, 나가서 얌전히 굴겠다고 약속해. 진 저하가 함께라면, 작은 소란도 용납할 수 없어.”
“야호! 이안이 최고! 진 저하님. 제가 헤일 대장한테 들었는데요, 맥주에 꿀 타주는 주점이 있대요. 아주 기가 막힌다고 합니다. 우리 재밌게 놀고 거기서 한잔-”
“이놈아!”
따악!
로만드로가 최후의 꿀밤을 날렸다. 감히, 진 저하에게 주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눈을 치켜떴다.
“왜요! 거기 꿀 농사 직접 짓는 데라서 엄청 맛있다고 했단 말이야! 우유도 판대! 진 저하님은 그거 먹으면 되잖아!”
“그래그래, 베릭. 나는 처음 나가는 것이니 많이 알려다오. 제국민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즐기는지 내 참으로 궁금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안내할게요! 이야호!”
“저하, 믿지 마십시오. 저놈 저거, 길치입니다.”
신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베릭과 속닥거리는 로만드로. 진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이안은 서류를 정리하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아까만 해도 진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는데, 단순한 피로에 불과했나 보다.
‘퀸타나와의 대화를 비밀에 부치셨다라.’
이안은 진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비밀을 간직하는 것은 곧 인격 존립의 시작. 청신호 중에서도 청신호였으니, 참으로 대견하지 않나.
무엇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라면 더더욱, 혼자 서는 법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밖에서는 진 저하의 신변이 노출되지 않게, 각별히 조심해!”
“아씨, 알겠다고요! 진짜, 잔소리 오져. 그럼 진 저하님 말고 뭐라 불러요? 네? 말 까는 건 아니잖아!”
베릭의 외침에 로만드로가 멈칫거렸다. 그리고 슬며시 이안을 돌아봤다. 그러게? 보통 나갈 때는 위장 신분을 쓰니까… 새로이 호칭을 정해야 할 터인데?
이안은 저를 바라보는 세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무에 그리 고민이냐는 듯.
“저와 진 저하가 형제라 하고, 시아오시와 베릭은 시종으로 하면 되겠습니다. 로만드로 님은 이숙이나 고숙 정도가 좋겠군요.”
“혀, 형제? 이안 경과 내가?”
진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그럼 밖에서 부를 때는 형이라 호칭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세상에!
“나는 너무 좋네. 찬성하오!”
“잠깐, 왜 나는 많고 많은 관계 중에 이모부, 고모부인가? 번거롭지 않아? 차라리 숙부가 나을 것 같은데.”
로만드로의 말에 베릭이 터진 상처를 움켜쥐고 킬킬거렸다.
“아, 로만드로 님. 피 안 섞인 보호자 선에서는 그게 딱이지. 그림체가 너무 다르잖아요. 안 그래, 이안아?”
아하! 로만드로는 깨달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다가, 뒷말을 이해하곤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진이 당황하여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해 주었다.
“로만드로, 걱정 마시게. 그대의 아이는 비비안나를 꼭 닮았을 터이니.”
“…저하, 위로 감사합니다.”
“우, 우는 것인가?”
“아니요. 그저 슬플 뿐…….”
진은 로만드로를 달래주면서도 연신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나가면 무엇을 보게 될까, 그리고 무엇을 겪게 될까. 이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즐거울 것이라.
아이는 서류를 훑어보는 이안을 돌아보고, 결심의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잘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