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66
제266화. 첫 암행
바리엘에 봄이 왔으나, 그걸 바로 알아챈 자는 드물었다. 제국민들의 시선은 알맞게 올라온 꽃봉오리가 아니라, 황궁에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고작 얼마간 사이에 세상이 바뀌지 않았나. 그들은 마당에 심어진 나무를 보는 것보다, 어디로 흩날릴지 모르는 황궁 국기를 더욱 자주 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모든 게 안정됨에 따라 고개를 틀어 저들의 일상을 살폈다.
“…언제 이리되었지.”
“뭐가?”
“왔는가? 날씨 말이야. 정신 차리니 봄이군.”
막 영업을 시작한 주점. 사내 둘은 야외 테라스에 앉아 거리를 구경했다. 느지막한 점심이라 그런지 심히 한산하다. 아이들이 골목을 헤집는 게 보이고, 고양이 한 마리가 지붕에 벌러덩 누워 햇볕 쬐는 게 보인다.
저들 외, 주점에는 다른 한 무리밖에 없어서 참으로 조용하다. 주인장이 틀어놓은 오르골 소리만 듣기 좋게 띵똥띵똥.
“이러다 여름 금방 오지. 그리고 가을도, 겨울도. 참, 중앙 광장 시체 모두 치워졌더라. 재판 열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주일 넘게 지났어.”
“그런 건 빨리빨리 치우는 게 나아. 보기 흉해.”
“한잔하고 어디 가나? 오랜만에 카드나 치지? 오늘 그날이잖아.”
“으응, 안 돼. 일 있어.”
그때, 주점 주인이 그들 앞으로 살얼음 낀 맥주를 내어주었다. 진득한 꿀이 바닥에 잔뜩 깔려있었다. 한 사내가 잔을 들며 물었다.
“일? 무슨 일?”
“하이만 은행 간판 교체 작업하는데, 일손 도와달라 하더라고. 이거 한잔 마시고 가야해.”
하이만의 몰락은 역사에 굉장한 자국을 남겼으나, 사실상 일반인들에게는 큰 실감을 주지 못했다.
그들 대다수는 은행에 계좌조차 없었으며, 그중 또 대다수는 하이만을 중앙 광장에서 처음 보았다. 누가 누군지 적혀있지 않았더라면, 당최 구분하지 못할 만큼 엉망인 모습으로.
“은행 간판? 아아, 그래. 다른 귀족들이 각자 운용한다며? 에이제인인가? 거기는 이번에 새 상품을 내놓는다고 하더라. 소상공인들 대상으로 하는 저금리 대출. 우리 주인한테 빌린 거, 그걸로 갚고 갈아탈까 봐. 매년 겨울에 이자 낸다고 죽을 지경인데.”
“듣기로는 중앙에만 은행 다섯 개로 나뉜다하더라.”
“어우, 간판만 바꾼다고 되겠어? 오늘 가서 고생 좀 하겠는데?”
“옆집 아저씨는 내일 중앙 나간다고 하더라.”
“옆집 아저씨? 카풀루 가문에서 일하시잖아?”
“거기도 이번에 은행권 지분을 조금 받았대. 카풀루 지방 영지에 은행 세울 거라고, 고용인들 죄다 짐 쌌다. 여름쯤에는 올라오려나 모르겠어.”
가만히 듣던 사내가 맥주를 마시려다 말고 멈칫거렸다. 반대편 대각선에 앉아있는 무리가 저들 대화를 엿듣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신 맥주를 들이키는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멀뚱히 앉아 고개를 은근히 이쪽으로 돌린 상태였다.
‘뭐지?’
외형으로 보아 어디서 꽤 귀하게 자라신 분들 같은데. 맥주를 하마처럼 들이키는 붉은 머리 소년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는 자들인가?”
“아니. 모르지.”
“자꾸 이쪽을 봐. 기분 나쁘게.”
주점에서 일어나는 다툼 원인 중, 제일 흔하디흔한 게 ‘뭘 꼬나봐’이지 않은가? 평온했던 분위기가 순간 쨍쨍해졌다. 사내 둘 역시 흰자로 낯선 무리를 경계했다.
“…심상치가 않은데.”
“인정. 특히 붉은 머리 새끼. 옷 입은 것부터 미친놈 같아.”
길 가다 마음에 드는 건 죄다 사서 걸친 것 같다. 호위가 맞나?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맞는 것 같은데, 어찌 저리 휘황찬란 화려한 거적때기를 두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잿빛 머리도 만만치 않아. 주점까지 와서 물만 마시고 있어. 정상은 아니지.”
“계속 의식하네. 에잇. 술맛 떨어져. 이것만 비우고 일어나지.”
“그래. 그게 낫겠어.”
변변찮은 협잡꾼들이라면 몰라, 저쪽에는 검을 찬 자만 둘이다. 게다가 우유를 꼭 쥔 채 어깨를 잔뜩 굳힌 아이까지. 필시 엮여서 득 될 것 없는, 의아한 조합이라. 사내 둘이 건배하기 위해 잔을 든 순간.
드르륵.
아이가 우유를 들고 일어난 게 아닌가? 그러곤 아주 소심하게, 총총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동시에 보호자로 보이는 네 남자가 응원하듯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멈칫, 사내들은 긴장했으나 이내 벽안의 눈동자에 어떤 악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왜, 왜 그러는가? 요?”
존대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하대하기에는 아우라가 심상치 않다. 가까이서 보니 태부터가 뭔가 남다른 아이다.
“거, 거, 건배를!”
“예?”
“건배를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큰 결심을 했다는 듯, 우유를 들이미는 아이의 볼이 붉다. 어이가 없어서, 원. 사내들은 아이 뒤쪽, 일행들을 돌아봤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부탁하오.’
그러자 이안이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단 한마디도 없이, 뜻이 전해지는 게 놀랍다.
그들이 이안의 화사한 미소에 눈을 떼지 못한 것도 잠시, 이내 베릭이 흰자를 뒤집으며 아르르거리는 걸 깨달았다.
‘X발, 뭐 하냐? 짠 안 해?’
‘우유 든 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릭과 시아오시의 눈빛 역시 말하는 바가 확실했다. 로만드로는 주먹을 꽉 쥔 채 소리 없이 진을 응원하고 있을 뿐이다.
“아, 예예. 뭐…….”
째앵!
두 사내가 진의 우유에 잔을 맞대주었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아이의 벽안이 반짝 빛났다.
제국민과 처음으로 한 건배라!
아이가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마시자, 사내들도 고민하다 맥주를 꼴딱거렸다. 무릇, 잔을 쳤으면 비우는 게 당연하니까. 그것이 술이든, 우유든.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입가를 슥 닦으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진. 이안이 의자를 빼주며 맞이했고, 이내 사내들에게 일렀다.
“덕분에 제 동생이 즐거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 잔은 저희가 사지요. 주인장. 맥주 두 잔을 우리에게 달아주시오.”
“오, 그,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아무튼 잘 마셨소. 큼큼.”
시비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너무 정중하고 우아하다. 그들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였고, 넌지시 인사를 붙였다.
“어디 귀족 자제분들이십니까? 제가 그런 분들과는 술을 마셔본 적이 없어서요. 나중에 자랑이나 하려 합니다.”
“아아, 귀족은 아니고 이모부께서 작은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중앙의 봄이 유독 아름답다 하여, 저희를 초대해 주셨지요.”
있는 집 자식들이었구먼. 어쩐지, 돈 냄새가 좀 난다 하였어. 그들은 로만드로를 보며 이모부라는 관계에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비는 좀 아니지. 어미가 어지간한 미모가 아니면, 당최 불가능하다.
빈 우유 잔을 꼼지락거리던 진이 우물쭈물 덧붙였다.
“내가 동생입니다!”
“예?”
“동생이고요, 혀, 혀, 형이에요.”
“그래요. 누가 봐도 형이랑 동생 같습니다.”
“뭐, 그럼 저희는 가겠습니다. 잘 마셨어요.”
“들어가십시오.”
이안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곤 자연스레 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떠하였니, 진?”
“아, 아주 좋았습니다. 형님.”
“그래. 다음에는 음…….”
무엇을 하면 되는가? 로만드로가 안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내 속삭였다.
“공원 가서 비둘기 모이 주기.”
“그래. 이것만 마시고 우리도 나가자.”
“그럽시다. 형님. 저 우유 한잔 더 먹고 싶어요.”
“주인장.”
주인장이 주문받았다는 듯 손짓하자, 베릭이 재빨리 덧붙였다.
“여기 고기구이도 삼인분 더 주세요!”
“이런, 쯧쯧. 여긴 식당이 아니라 주점이라고. 서너 점에 동화 다섯 닢이나 하는데, 뭘 자꾸 그리 처먹어? 여기서 배 채울 것이냐?”
“로만드로 님 돈도 아니잖아요. 뭔 상관?”
“이안, 우리 다음에는 쟤 두고 오자. 눈에 너무 띄어.”
암행을 가장한 나들이에 가까웠다. 원래도 그 목적이 제국민의 삶을 살피고, 그에 녹아들어 애로사항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니. 사실상 노는 것과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이라. 거기에 진의 첫 외출이라는 명분까지 붙지 않았나?
“다른 건 몰라도, 용돈은 물리는 게 좋겠습니다.”
“줬다 뺏는다고? 와, 너무하네! 치사똥방구!”
“아니. 이제 안 준다는 뜻이다. 자꾸 좌판에서 이상한 걸 사와 걸쳐대니, 저 멀리서도 너를 알아볼 수 있음이라.”
“이건 진 저하님이 골라준-”
때앵!
베릭이 실수하려 하자, 로만드로가 은쟁반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주인장이 아주 재밌는 구경을 했다는 듯, 휘파람 불며 감탄했다.
“옷이랑 보호구는 얼추 맞춘 것 같은데, 시아에게 맞는 무기가 없어서 문제로다. 차라리 제작을 하는 건 어떨지.”
“혀, 형님! 하지만 생각보다 인재 선발이 이르게 진행되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들렀던 대장간이 그나마 제일 빠르던데, 그래도 일정에는 못 미칩니다.”
진은 이안을 형님이라 부르는 것에 맛 들인 듯했다. 무슨 말만 했다 하면 저 호칭을 빼먹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은근히, 이안과 저의 상하 관계가 바뀐 걸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둘러보고, 그래도 없다면 다음에 따로 오거라.”
“네. 주인님.”
“원래 싸움은 맨손으로 하는 게 제맛인디! 오, 고기 나왔다. 오오. 왜 이렇게 많아?”
“앉은 자리에서 고기구이 일곱 접시를 시켰잖습니까. 서비스입니다. 서비스.”
베릭은 양손으로 포크를 쥔 채 고기를 우걱우걱 퍼먹기 시작했다. 이안은 값을 미리 치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소문대로 술맛과 음식 맛이 훌륭하군. 주인장.”
한데, 어째서 이리 손님이 없는지를 돌려 묻는 것이었다. 주인장은 한번에 못 알아듣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잔 추임새를 터트렸다.
“아아, 별건 아니고요. 몇 달 전부터 이쯤 되면 일대가 조용합니다. 인근에서 큰 도박판이 열리거든요. 다들 거기서 놀고먹느라 이쪽으로는 안 오지요. 그러다 새벽쯤 다 털리고 나서 하나둘씩 붐빕니다.”
“도박판?”
“예예. 카드도 치고, 홀짝도 하고, 여러 볼거리도 좋다 하더만요. 저는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요.”
그런 게 다 있군.
이안은 로만드로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 전혀.
두 사람이 잠깐의 신호를 주고받는 동안, 베릭은 두 번째 접시를 비웠다.
“상설치고는 판 열리는 기간이 긴 것 같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이니.”
불법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겠지. 이안의 중얼거림에 로만드로가 메모를 작성했다. 종일 돌아다니며 이처럼 처리할 사안이 이미 한가득이라.
“그러게. 한번 알아보겠네.”
“자, 이제 우리도 일어나지요.”
“으어어, 잠깐만. 나, 이거 아직-”
“주인장. 잘 먹었소.”
끼이익.
베릭이 허겁지겁 고기를 입에 욱여넣었으나, 그들은 기다려주지 않고 자리를 치웠다. 우유 두 잔에 기분 좋아진 진이 이안의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어댔다.
“공원은 여기서 먼가요? 형님?”
“가까울 것이다. 로만드로 님이 동선을 아주 효율적으로 짜주었으니까.”
마차를 타지 않고 계속 걸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건, 사실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처럼 오감으로 걷는 건 마음 먹고 암행할 때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타닥타닥.
공원으로 다가갈수록, 인파가 점점 많아졌다. 아마 주점 주인장이 일렀던 도박장이 인근에 있는 듯했다.
이안은 진의 손을 꽉 잡으며 베릭과 시아오시에게 경계를 높이라 신호했다. 주위에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을 기사들이 있겠으나, 어쨌거나 지금 진에게 제일 가까운 자들은 이들이다.
“키킥. 그거 내가 땄어, 임마.”
“아오! 장난해? 내가 다 올려놓은 판돈인데!”
“술 한잔 살게. 싼 걸로.”
주위에 뻗은 골목 곳곳에서 은근한 담배 연기가 새어 나왔다.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자들의 언행, 낮인데도 안쪽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술 냄새, 누군가의 헛구역질 소리.
이안이 방긋 웃으며 로만드로를 쳐다봤다.
‘동선 한번 잘 짜셨습니다.’
‘미안.’
이안의 손을 꽉 쥔 진이 슬쩍슬쩍 골목 안쪽을 구경했다. 위협적이지만, 저것들 역시 바리엘의 한 부분이지 않나. 호위들과 이안이 있는데 두려울 게 없다.
“저기, 이안.”
“안 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주점까지가 최대한의 일탈이라. 서둘러 이곳을 지나가야겠다, 이안은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독촉했다.
‘……?’
골목으로 들어가는 낯익은 모습을 볼 때까진 말이다.
이안과 함께 걷던 진 역시 같은 걸 보고 살포시 웃었다. 그러곤 아주 작게, 속삭였다.
“방금 골목으로 들어간 자, 티모시와 굉장히 닮은 것 같아. 그치요,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