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67
제267화. 비밀을 먹는 자
“지, 진아! 이것 좀 보렴!”
로만드로가 어색하게 진을 불렀다. 공원 벤치에 앉아 무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아이. 누가 보아도 기분이 별로인 걸 알 수 있다. 그는 아이의 심기를 풀어주기 위해 빵을 연신 흔들어댔다.
“와, 여기 비둘기 진짜 많구나!”
“로만드로 님. 바짓단 뜯기고 있습니다.”
“어? 으악! 시아, 이것 좀 받아보아라.”
“던지시면 받겠습니다.”
“비둘기, 이놈! 아이고, 그만 좀 날아!”
파다닥! 파닥!
도심에서 먹고 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비둘기들은 로만드로의 빵을 노려대며 연신 부리를 쪼아대고, 날개를 퍼덕였으며, 그르륵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바글바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로만드로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고, 새 새끼들! 이거! 시아, 도와줘!”
“죄송합니다. 이안 님이 진 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말라 하여.”
“이놈아, 거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된다고?”
“빵을 멀리 던지십시오.”
“으악! 으악!”
이리저리 쪼이며 혼자 원맨쇼를 하는 로만드로다. 퍽 웃음이 새어나오는 모습이건만, 진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한숨만 푹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즐겁고 행복했는데, 이리 한순간에 기분이 뒤집힐 수 있나?
“이안 경 언제 올까?”
“둘러만 보고 온다 하셨으니, 금방 오실 겁니다.”
실수였다. 거기서 티모시의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다. 워낙 인상이 강렬한 자라 바로 연상되어 말한 것 뿐인데. 이안은 베릭만 데리고 안쪽을 둘러보고 오겠노라 하고 가버렸다.
“…….”
“기분 푸십시오.”
“기분 아주 좋다.”
“…….”
시아오시가 난감하게 턱을 긁적였다. 말로는 좋다 하지만, 공원에 당도하여 비둘기 쪽은 쳐다도 안 보고 있지 않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진은 팔짱을 낀 채 연신 표정을 바꾸었다. 눈썹을 찌푸렸다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다시 한숨 쉬는 것 반복이다.
‘정말. 이안 경도 너무하지.’
솔직히 이안의 대응이 정석이라는 걸 알고 있다. 착각한 것이든 아니든 그 대상이 외국 사절단 핵심이었으니 확인은 확실히 해야 했고, 낯설고 번잡한 곳에 저를 데리고 가면 호위의 부담이 가중되는 것 또한 인지했다.
하지만 자꾸 볼멘소리가 나오려는 건 어쩔 수 없다. 투정이되, 이는 정당한 투정이라.
스윽.
진은 잠깐 걷기 위해 벤치에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인근의 수풀이 잘게 흐트러졌다. 은신한 기사들이 진을 따라 움직인 것이다.
“로만드로 님, 진 님 이동하십니다.”
“어, 어디 가십니까? 아니지. 어디 가니? 진!”
“좀 걷고 싶습니다.”
“같이, 같이 가자. 으아앗! 이놈들아! 비켜!”
“빵 버리셨습니까?”
“버렸는데, 냄새가 뱄어. 자꾸 엉겨 붙네!”
시아오시는 비둘기의 습격을 받는 로만드로와 진을 번갈아 보다가, 진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그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스윽.
아이는 사념을 흘려보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돗자리에 누워 낮잠 자는 가족, 정신없이 공을 쫓는 강아지 등등. 바리엘의 평화는 이토록 다채로운 모습을 수호하고 있었구나.
진이 화단을 따라 걷던 중이었다.
“아가.”
누군가 진을 부르는 게 아닌가? 남루한 로브를 뒤집어쓴 채 좌판을 깐 노인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다한 물건들이 정갈하게 깔려있고, 그녀의 뒤로도 손수레 가득 잡화가 그득하다.
“나를 부르는 것이오?”
“미안하지만, 거기 구슬을 주워주겠니?”
진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 수정구슬 하나가 천천히 굴러가고 있다. 노인의 부탁에 시아가 먼저 움직여 그걸 잡아 건네주었다.
“고마우이.”
“…….”
시아오시는 로브 아래, 노인의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진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좌판의 물건과 수정구슬을 들여다봤다. 마치 밤하늘이 그곳에 담겨있는 듯했다.
“장식용 구슬이오?”
“으음. 그럴 리가. 집시에게 장식용 구슬이란 있을 수 없는 말이지. 우리는 이것으로 과거를 보고, 현재를 읽으며, 미래를 예상한단다.”
와, 집시. 말로만 듣던 그 집시다.
천려족의 부족장이 집시라는 말이 있던데, 그것 외에는 진과 어떤 접점도 없는 사람들이지 않나.
“궁금하니? 보여줄까?”
“무엇을?”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쪼그려 앉은 진이 배시시 웃었다. 제국의 황자도 못 알아보는 신통력으로 무엇을 점친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예언하는 것만큼 불확실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진의 삶이 그 증거다. 신의 음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탁조차 거짓이었으니까. 하물며 거리의 집시가 일러주는 것은 어떠하겠나?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가진 돈이 없는걸.”
“난 돈을 받지 않아.”
“그렇다면?”
바람이 살랑이자, 로브 아래로 노인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형체가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미소는 온화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볼에 틈이 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아가미를 단 인간처럼.
“나는 비밀을 먹는 자라. 네 비밀을 입 밖으로 내어 내가 듣게 해다오. 그럼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니, 내가 먹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그리하면, 내가 본 너의 과거와 미래를 읊어주마.”
재밌군. 원래 집시들의 영업 방책이 이러한가? 진이 가만 되물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혹 다른 자에게 발설하지는 않겠지?”
“물론이지. 내가 먹은 것이니, 너 역시 다른 자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혹 다른 자와 공유한 것이라면 그자의 것 역시 마찬가지.”
흐음. 무엇을 일러줄까? 진이 발끝을 까딱거리며 고민하다, 하나를 생각해 냈다.
노인은 시아오시에게 듣지 말라는 듯이 물러나라 손짓했고, 이내 상체를 가까이 숙였다. 다리가 없어서, 팔꿈치로 땅을 받치는 모습이다.
“사실, 외국어를 읽어 보일 때.”
정확히는, 이안 경 앞에서 외국어를 읽었을 때.
“으흠.”
“처음 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연습해 보았었다. 칭찬받고 싶었거든.”
“오호!”
그것참 아주 맛있는 비밀이로다! 노인이 굉장히 즐거워하며 킬킬거렸다. 그녀가 숨을 거칠게 쉴수록, 볼에 달린 아가미가 움찔거리는 것 같다.
“좋아. 이건 너밖에 모르는 비밀이구나. 아주 맛있다. 맛있어.”
노인은 만족스럽게 수정구슬을 매만졌다. 그러자 구슬 안에 가득하던 반짝이들이 자아를 가진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참, 신기하군. 마치 이안 경의 마력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 상처.”
노인이 가만 중얼거렸다. 진은 슬쩍 주위를 살폈다. 시아오시가 저 멀리 달려오는 로만드로를 보곤 여기 있노라 손짓했다. 아직 몇 마리의 비둘기를 쫓아내지 못하였구나.
“다행이다, 아가. 그것이 아니었다면 너는 이미 죽었을 것이란다.”
시아오시가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수상쩍은 것은 차치하고, 참으로 불손한 말이지 않나. 그가 말리려고 하였으나, 진이 가볍게 팔을 잡으며 저지했다.
“네가 품은 모든 의문의 시작이 그 상처라는 걸 기억해. 그리고 의심하렴. 그것이 너를 성장하게 하고, 지킬 것이라. 외로운 아이구나. 불쌍하게도.”
진은 저도 모르게 턱 끝의 상처를 매만졌다. 모든 의문의 시작이 이 상처라고? 그러고 보니…….
‘이안 경이 나에게 손을 처음 건넨 것이 그때다.’
그날 이후로, 저를 귀한 자라 속삭여 주었고 눈물을 거두라 달래주었다. 그저 내란에 휩쓸린 아이를 위로하는 건가 싶었지만, 변화의 순간은 분명히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빛을 멀리하거라. 더한 빛 옆에서는 제일 빛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겠지.”
“그대는 대체 무얼 보고 있소?”
“네가 보여주는 것.”
수정구슬의 빛이 꺼졌다. 허겁지겁 달려온 로만드로가 비둘기 깃털을 털어내며 진과 집시 노인을 살폈다. 혹, 수상한 자인가? 로만드로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녀는 웃으며 구슬을 매만졌다.
“어서 오시오. 그쪽도 점 보실라우?”
“아니, 되었네. 그나저나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으음? 어째서?”
“여기는 좌판 불가 구역이고, 저쪽 정문으로 돌아가면 허가된 자리가 있네. 관리자가 발견하기 전에 옮기는 게 좋을 것이라.”
“이런, 이런.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몰랐구려. 일러주어 고맙소.”
노인은 천천히 짐을 정리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로브가 완전히 걷혔다. 진 역시 그녀에게 다리가 없음을 알아챘다.
“도와줄까?”
“아가, 착하구나. 하지만 되었다. 이 정도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너무 슬프지 않겠니? 어서 가보렴.”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과 함께 몸을 돌렸다. 참으로 신기한 자라, 멀어지는 와중에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로만드로가 그 낌새를 느끼고 둘에게 물었다.
“혹,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점을 봐주었어. 비밀을 먹는 자라 하면서.”
“어허, 거참. 설정하고는. 구닥다리구먼.”
“저런 자들이 많은가?”
“저잣거리에 널렸지요. 영혼을 먹는 자부터 시작해서 미래에서 왔다 헛소리 지껄이는 놈도 있고, 뭐, 살아남기 위한 상술적 치장이지요.”
속닥속닥, 로만드로와 진이 암행인 것도 잊고 평소처럼 대화하자 시아오시가 슬쩍 눈치를 주었다. 좌판에서 노닥거리느라 주변의 이목을 살짝 끌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몇 시인가요? 로만드로 님?”
“으응. 막 오후 네 시를 지났다.”
“이안 형님이 오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공원에서 비둘기 모이 주기는 영 흐지부지 끝났다. 이대로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것이 나을까? 역시 조금 아쉬운데.
“우리, 이안 형님 데리러 가는 건 어때요?”
“이안이 오지 말라 하였는데요.”
“골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근처까지만.”
“으흠. 어차피 여기서 계속 서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 그러면 적당하게 쉴 만한 찻집이라도 있는지 볼까?”
“그거 좋아요.”
“베릭 놈이 고분고분 잘 따르고 있을지, 원.”
“걱정하지 마세요. 베릭이 그래도 이안 형님 말씀은 잘 듣지 않습니까.”
합류하면, 로만드로의 저택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입궁하는 것이 마지막 일정이었다.
진은 공원을 나서려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다리 없는 집시는 온데간데없고, 짓눌린 풀잎만 좌판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 * *
한편, 이안과 베릭이 들어갔던 뒷골목.
일행들의 걱정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다.
이안은 사방에서 훅 끼쳐오는 궐련 연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매캐한 냄새 속에 은근히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것들도 섞여 있다. 필시, 마약과 미약이리라. 그는 카드 패를 내려놓으며 남은 칩을 톡톡 두드렸다.
“오, 꽤 치는데?”
“잠깐잠깐! 나 아직 안 죽었어.”
“멍청아! 빨리 죽어. 얘 카드 이기려면 에이스 밖에 없어. 근데 그건 아까 나왔잖아.”
“으아아악! 젠장! 짜증 나!”
“어이고, 패 계산도 못 하면서 짜증은.”
“이봐, 여기도 자리 깔아줘. 나도 낄래.”
이안의 테이블을 둘러싼 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주위에서는 맥주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의 환호와 괴성 역시 음악과 함께 점철되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군. 여기 사람이래?”
“지방 출신.”
“생긴 거 마음에 안 드네.”
“너는 꼭 잘생긴 애들 보면 그러더라.”
예상에도 없던 놀음판에 끼는 것도 어이없는데, 암행 중에 이리 주목을 받다니. 이안은 미간을 짚으며 반대쪽 철창을 쳐다봤다. 베릭이 그 안에 갇혀서 고기를 열심히 뜯고 있었다.
“이안아아아! 파이팅! 힘내라, 힘!”
“너…….”
눈이 마주치자, 베릭은 철창을 열심히 흔들며 응원했다. 옆에서 지키고 있던 경비가 시끄럽다며 꼬챙이로 찌르자, 베릭은 눈을 부라리며 욕을 쏟아냈다.
“아프잖아! 뒤질라고!”
“어허, 지랄도 정도껏.”
“응, 너나. 나 여기서 나가면 너부터 댕강이야.”
이안은 앞으로 진짜 베릭을 데리고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카드를 뒤집어 내보였다. 승자를 향한 탄성이 곳곳에서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