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
제27화. 화친식
드디어 그날이었다.
이안은 침대에 앉아 바깥으로 터오는 해를 지켜봤다. 브라츠 영지에서 눈을 뜬 이후, 이 순간만을 위해 달려왔다.
똑똑.
“이안 님.”
해나가 이안을 부르며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어제 운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조그만 눈이 퉁퉁 부어서는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해나. 세상에.”
“짐은 다 싸셨어요?”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지만, 한껏 진지한 아이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꾸릴 것도 없다. 옷가지 조금과 잡다한 서적 몇 가지. 그리고 방에서 유일하게 ‘이안’의 것이라 여겨지는 화분.
“…짐이라도 많았으면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저택에 남겨진 자들이 이안을 추억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안은 웃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셔츠 하나만 해도 금화 두어 개 값어치는 훌쩍 넘어갈 것이다. 촘촘하게 박힌 흰색 자수와 금박들이 이안을 귀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아버지는?”
“막 기침하셨습니다. 식당으로 모셔오라 하셨어요.”
“그래. 나가지.”
이안은 해나를 지나쳐 문을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등을 돌려 나지막이 당부했다.
“해나. 가능하다면, 내가 가고 나서 저택 일을 그만두었으면 한다.”
“네? 그게 무슨…….”
“힘들겠지만, 그것이 너에게 이로울 테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다오. 물론, 백작이, 아니지. 백작님은 모르게끔.”
해나가 의아하게 쳐다봤으나, 이안은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 이상은 해나의 선택이 중요했으니까.
식당엔 이미 완벽하게 치장을 마친 데르가와 메리 부인 그리고 첼이 앉아있었다.
“앉아라.”
“네. 아버지.”
마지막 식사다. 하지만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분위기였다. 이들에게 이안은 애초에 스며들지 못한 가족이지 않나.
“화친식의 순서는 잘 익혀두었겠지.”
“문제없습니다.”
“네가 살아 있는 이유를 항상 명심하거라.”
“그럼요. 브라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이안의 기분이 평소보다 좋아 보였다. 국경을 넘어가면 당장 목이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저런 여유가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제가 다음 생일에 돌아오면-”
그는 고기를 한 점 썰어 먹으며 말했다.
살아만 있다면, 이안의 생일을 주기로 짧은 귀환이 주어질 것이었다. 데르가가 멈칫거리며 고기 씹는 것을 멈췄다.
“어머니를 뵈어도 될까요?”
“…이안.”
“멀리 떠나는데 몰린 경도 못 뵙고, 어머니도 못 뵙고 가질 않습니까.”
몰린은 천려족이 브라츠 저택을 떠난 아침, 급하게 짐을 꾸려 중앙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이안과의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무리 수순이었으니, 딱히 인사할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마 아직도 그들의 마차는 들판을 내달리고 있을 터. 오고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달. 이안이 대사막에서 돌아올 때쯤 그들도 돌아올 것이다.
“흐음. 어미라.”
데르가가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어미의 부탁인 척, 구룻잎을 밀수해 오라는 전언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메리 부인의 눈매가 사납게 휘었으나, 데르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쯤 하면 한 번쯤은 보게 해주지.”
“감사합니다.”
이안은 아직 모르는 걸까? 어미, 필리아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걸? 항간에서는 옆집 마구간 지기와 눈 맞아 도망갔다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도박 빚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팔려갔다는 말이 돌았다.
“백작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집사의 안내가 들려왔다. 백작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일어났다.
“가지.”
데르가를 선두로 모두가 본채 밖으로 나섰다. 무장한 소수의 사병과 그들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기사들. 이안은 이곳에 와서 처음 본 참이었다.
‘숫자가 하나, 둘, 셋… 총 열이군.’
그때였다.
해나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눈물을 머금으며 이안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손을 꼭 붙들며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꼭, 꼭 살아서 돌아오세요.”
“생일날 맛있는 걸 해드리겠습니다.”
“이안 님. 조심히 가세요.”
몇 달 사이, 데르가 가족보다 이들과 쌓은 유대감이 더욱 깊었다. 이안은 방긋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해나가 엉엉 울어 젖히며 소리를 키우자 백작이 경을 쳤다.
“경사스러운 날 통곡이라니! 집사!”
“죄송합니다. 백작님. 주의시키겠습니다.”
“어서 출발해!”
하지만 저택 사용인들 대부분이 이안을 둘러싸고 있는 터라, 콕 집어 체벌을 내리지는 못했다. 이안은 해나의 손등을 꼭 붙잡으며 인사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해나.”
“도련님! 흐윽…….”
“또 보자꾸나.”
또 보자. 미래를 기약하는 말에 해나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데르가의 살벌한 시선에, 이안은 시간 끌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데르가는 저택의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연신 꿍얼거렸다.
“이럇!”
히이잉!
마부의 채찍질과 동시에 저택이 멀어졌다.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브라츠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이안은 데르가를 힐끔거렸다. 저 품 안에 인장이 있으리라.
‘보좌관은 아직도 못 일어났다지?’
의식불명에 빠진 지 일주일이 넘어갔다. 이만하면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어차피 일어난다 한들, 이안은 사막에 있겠지만.
* * *
달그닥달그닥!
서너 시간쯤 달렸을까. 녹음 졌던 땅이 황폐하게 변해갔다. 대사막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쉬이익.
문을 열자 마부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거칠게 휘날렸다. 푸른 하늘과 금빛 모래산. 저 멀리 서 있는 수십 마리의 쿠실레. 그리고 그들의 주인인 천려족.
“저긴…….”
국경을 표시하는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놓여있었다. 데르가와 일행들은 그사이를 지나가며, 천려족에게 다가갔다.
‘국경을 넘었다.’
세상에. 살면서 전쟁 아닌 일로 국경 넘은 일이 있던가? 이안은 조금 흥분되는 기색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가까운 곳에 흰색 돌로 세워진 작은 신전이 있었다. 어떤 장식물 없이, 그저 공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곳. 바람과 모래가 깎은 세월의 흔적이 여실했다.
“어서 오시게. 우방이여.”
낮으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였다. 아무도 그가 족장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이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절대적인 힘의 우위. 그걸 지닌 사내의 기운은 자연과 맞먹을 만큼 위대하고 묵직했으니.
“대사막의 천려족 족장, 카칸티르요.”
“바리엘 제국의 데르가 브라츠 백작이오.”
둘은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이어서 그들의 부인과 자식들 역시 인사하며 예를 갖추었다. 주요 인물들이 신전 탁상에 둘러앉았고, 각자의 병사들은 태양 아래 서서 서로를 지켜봤다.
“먼저 그대들의 호의에 감사함을 표합니다.”
“그대들의 어려움이 곧 우리의 어려움이라 약속하는 자리 아닙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주거니 받거니, 공식적인 자리라 데르가의 혀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움직였다. 카칸티르의 시선이 이안에게 닿았다.
“이자가 브라츠의 선물이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협약서를.”
데르가는 서둘러서 지시했다. 같은 내용으로 서로 적어낸 협약서 양피지가 테이블에 놓였다. 금기할 조항과 서로 무역할 물품 내역, 그리고 이안의 처지에 대해 상세히 적혀있었다.
‘천려는 브라츠에게서 화친 증표를 받으면 3년 안에 답으로 그들의 증표를 보낸다…. 천려와 브라츠는 화친조약을 맺는 순간부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아니하고…….’
장장 열댓 장에 달하는 내용이다. 데르가는 꼼꼼히 서류를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인장을 녹이는 동안, 검증하시죠.”
“좋습니다. 다만…….”
브라츠에서 준비한 것은 동질 물약이었다. 데르가의 혈육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이 아는 한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 천려족에게는 와닿지 않겠지만.
“윈첸 부족장님의 몸이 불편하셔서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쪽 검증은 돌아가서 하는 것으로 하지요.”
“편하신 대로요. 다만 입적 확인서는 황궁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받는 즉시 사람을 시켜 보내겠습니다.”
데르가는 자신의 피를 물약에 떨어트렸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투명한 액체는 이내 푸른색으로 변했다. 브라츠 쪽 사람들은 ‘어떤가? 인정하는가?’라는 시선이었으나, 천려족은 시큰둥했다.
“그럼 이어서 필체 확인을 진행하겠습니다.”
이안은 앞에 놓인 펜대를 잡았다. 그리고 더듬더듬, 서신으로 보냈던 내용을 서툴게 이어 썼다. 글씨체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이기에는 영 엉망이다.
“확인되십니까?”
“네르사른.”
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서 있던 제 동생을 불렀다. 허리를 숙인 채 다가온 그가 단검을 내밀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다.
스윽!
칼날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카칸티르는 피로 자신의 이름을 쓰며 서약했다. 그걸 보던 데르가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하여간 야만인들.’
인장 찍는 걸 놔두고 사서 피를 본다니까!
백작은 인장을 찍고서 왁스가 마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둘은 서류를 교환한 다음, 다시금 손을 맞잡았다.
“브라츠의 무궁한 영광을.”
“데모샤, 구룬 투(신의 축복 아래 행복)”
그리고 서로의 행운을 빌며 간소한 협약식을 마무리했다. 신전에서 사람들이 무사히 나오자, 병사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럼 이만.”
이안은 데르가를 바라봤다. 이제 이들은 마차를 타고 다시 돌아가겠지만, 이안은 천려족을 따라 사막을 건너야 했다. 데르가는 보여주기식으로 이안을 껴안았다.
“이안. 잘 지내거라.”
“네. 아버지.”
어깨를 끌어안는 손이 우악스러웠지만, 이안도 대충 맞춰주며 대꾸했다. 데르가 일행들은 미련 없이 뒤돌아 국경 바위를 되돌아갔다.
“이안.”
수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남겨진 짐을 내려다봤다.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그리고 몇몇 전사들이 무언가를 의논하며 하늘을 살폈다.
“설마 이게 다야?”
“왜? 뭐가 모자란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농담이다. 아직 다 안 왔어. 아, 마침 저기 오는군.”
이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르가가 사라진 길로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거칠고 뿌연 모래바람 사이로 보이는 붉은 머리. 그는 말에서 내려 푹푹 꺼지는 사막을 달려왔다. 말이 따라오려고 하자, 엉덩이를 차서 돌려보냈다.
“딱 맞춰 왔어.”
“이안.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네르사른의 외침에 수가 이안의 짐을 챙겼다. 사병 둘이서 나눠 든 것을 혼자 거뜬히 들었다.
“네. 준비되었습니다.”
“족장님. 저놈이 제가 말했던 놈이에요. 우리 노예로 쓸!”
수가 이를 아득아득 갈며 족장에게 말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이내 이안을 돌아봤다. 여기저기서 듣기로는 족장이 야만적인 데다 꽤 난폭하다던데…….
‘생각보다는 아닌 것 같군.’
브라츠 영지민들이 만든 괴물의 형상이었던 모양이다. 이안이 보기에는 그저 작은 부족의 믿음직한 리더, 딱 이 정도로만 보였다. 뭐, 자세한 건 앞으로 가까이에서 지내봐야 알겠지만.
“서둘러야 하니 채비하게. 잘못했다간 모래폭풍을 만날 것이야.”
여기서 대사막, 그들의 주둔지까지는 또 며칠을 달려가야 했다. 모래폭풍을 만나면 전력손실이 있을 수도 있고, 여정이 길어질 수도 있다.
“이아아안-!”
저 멀리 베릭이 소리쳤다. 카칸티르는 쿠실레 두 마리를 이안에게 내어주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