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1
제271화. 최고의 만찬
로만드로의 저택.
비비안나와 시종 미니는 이른 점심부터 해가 질 때까지, 조리대 앞에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있었다. 로만드로가 오랜만에 집에서 식사하는 것도 있지만, 더한 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마님. 이건 더 구우면 될까요?”
“음. 촉촉하니 맛있다. 이만하면 되겠어. 미니, 가서 술이 넉넉한지 봐주렴. 그사이 전사들께서 동을 내지 않았을까 걱정이란다. 진 저하께서는 술을 못 드시니, 음료에도 빠짐이 있어서는 아니 돼.”
“물론이지요. 마님. 제가 새벽에 신선한 우유를 담아놓았습니다. 시원한 것과 따뜻한 것,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바로 황자 저하이시자 유일의 후계자 그리고 차기 황제, 진이다. 황궁에서 보기도 하였고, 마법부에 기거하는 동안에는 식사 또한 같이한 영광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확연히 달랐다. 감히 저택에 초대하여 만찬을 내는 것이니. 로만드로 내외가 귀족이었다면 사교계가 온 시선을 내어 그들을 주목했으리라.
“새로 맞춘 식탁보 좋아, 깨끗해. 의자도 편한 것으로 바꾸었고, 전등, 장식용 초, 식전 샐러드 볼, 그림…….”
비비안나는 매의 눈으로 식당 곳곳을 살펴댔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하여 문제가 없었지만, 약속 시각이 다가올수록 초조해 어쩔 수 없다.
그때, 천천히 열리는 식당 문. 필리아가 조심스러운 낯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안이 사준 코랄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더한 아름다움이 세상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화사했다.
“부인, 혹 제가 도울 게 없을까요?”
“오, 세상에. 필리아, 전혀 없어요. 아침부터 정원 일을 하셨잖아요. 그만하면 전문 정원사도 힘들어서 일찍 퇴근했을 거예요. 모두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쉬세요.”
“미니가 바빠 보여서요. 일손을 도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부인의 드레스가 구겨지면 제 마음이 아파서요. 그리고 오늘 만찬은 ‘제가’ 진 저하께 대접하는 것이니, 오롯이 제 선에서 해결하고 싶답니다.”
황자에게 음식 대접할 영광이 어디 흔하게 오는가? 저에게 그걸 온전히 허락해 달라는, 예의 있는 거절이었다.
필리아가 살포시 웃으며 주방을 둘러봤다. 정원에서 꺾어온 꽃들이 완벽하게 장식되어, 숲속 정원에 있는 기분이었다.
“저기, 부인.”
“네, 부인. 말씀하세요.”
비비안나는 계속 그림을 걸었다 떼기를 반복하며 대답했다. 필리아의 난처한 기색도 알아채지 못한 채.
“의논드릴 것이 있는데요. 혹…….”
“마님! 마님! 꺄아아앗! 오셨습니다, 마차가 들어왔어요!”
콰앙! 우당탕탕!
미니의 외침에, 필리아의 말허리가 잘려 버렸다. 비비안나는 긴장했다는 듯 어깨를 바짝 굳히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올 것이 왔다.
“필리아. 혹 급한 일인가요?”
“아니요. 전혀요. 별거 아니에요.”
“고마워요. 손님맞이를 먼저 하고, 우리 얘기해요.”
“네. 같이 나가시죠. 부인, 그리고 오늘 머리 장식 너무 멋있어요. 완벽한 안주인이세요.”
비비안나는 필리아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남기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네르사른과 몇몇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정원에 나와 있었다.
끼이익!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문을 열자, 제일 먼저 로만드로가 내렸다. 그는 비비안나를 보고 반가워했지만, 노련한 관료답게 점잖음을 유지하며 진을 안내했다.
진이 정원으로 들어서며 신기하게 눈을 반짝였다. 이곳이 로만드로의 집이자, 이안과 베릭이 입궁 전 머물렀던 곳이라! 비비안나가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리 발걸음 해주시다니, 한없이 영광입니다.”
“비비안나, 만찬에 초대해 주어 고맙네. 간소하지만 받아주시게.”
“세상에. 꽃이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이것은 필리아의 것이오.”
“저하, 감사합니다. 아, 저, 저하라고 불러도 될는지요? 암행 시에는 다른 신분을 쓰신다 들어서요.”
“물론. 괜찮아. 우리밖에 없고, 또 오늘 일정은 이것이 마지막이니까.”
진은 부인들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며 가볍게 껴안았다. 다들 마법부에서 아침저녁으로 보았던 얼굴들인데, 이리 거처를 옮긴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 못 본 기분이 든다.
“와. 고기 냄새 죽인다!”
“헉, 피, 피가!”
“이거 내 거 아님! 괜춘!”
“미니, 가서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오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저하의 암행 중에 이런 유혈 사태라니요.”
게다가 어째서, 베릭은 이 집에 올 때마다 저리 피떡이 되어 오는 것인가!
비비안나의 현기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릭은 배고프다는 말만 반복하며 저택으로 달려들었다. 곧장 전사들에게 붙잡혀, 겨드랑이 사이에 머리통이 죄이고 말았지만.
“아악! 이거 놔!”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 안 해? 싸가지 없는 놈!”
“죽다 살아났다며? 멀쩡하네! 여전해. 음음.”
“아, 놓으라고! 지금 배고파서 죽기 직전이니까!”
시끌벅적한 소란이 정원을 정답게 채웠다. 진은 앞서가는 베릭을 따라 걸었고, 저택의 모두가 자연스레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안은 필리아와 네르사른을 향해 가벼이 눈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응. 덕분에. 이안이는? 또 피를 흘렸다고 들었어.”
“아닙니다. 이제는 좀 덜해요. 드레스 아름답네요.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네르사른 님도, 제국의 복장이 이젠 어색하지 않아 보입니다.”
“슬슬 적응할 때가 되었지요. 중앙 벗어나면 되돌아가겠지만.”
“함께 들어가시죠.”
이안이 필리아의 등을 받치며 안내했다. 그러자 필리아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안의 칭찬이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분명 이안이 직접 골라서 보내주었다고 들었는데, 어찌 처음 보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
“오오, 여기가 로만드로의 저택이라. 정갈하고, 기품이 넘치는군.”
“2층은 이안 님이 쓰시던 방입니다. 식사 후에 구경하시겠어요? 음식이 따뜻하여, 지금 드시면 제일일 것입니다.”
“이안 형님이 쓰던 방?”
“네? 형님이요?”
진은 놀란 듯이 입을 틀어막았고, 비비안나의 눈은 댕그래졌다. 형님이라니! 아무리 친하다고 한들, 문제의 소지가 꽤 있는 호칭이다. 로만드로는 진에게 의자를 빼주며 달래주었다.
“오늘 종일 그리 부르셔서 입에 붙으신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저희 말고 다른 관료들이 있을 때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유념하겠네.”
그들은 원탁에 둘러앉아 냅킨을 펼쳤다. 대저택이 아니다 보니, 식당 전체가 꽉 들어차 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널찍한 곳에서 식사하던 진은, 의외로 이것이 마음에 들었다. 상대와 가까이하여 대화를 쉽게 나눌 수 있었으니까. 손 뻗어 음식을 덜어주고, 잔을 채워주는 것이 또 다른 맛을 선사했다.
식사가 본격적으로 들어서자, 로만드로가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안. 인제 일러주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티모시 사절은 왜 거기 있었고?”
진 역시 샐러드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릭은 식탁 맨 끝자락, 비비안나가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서 미친 듯이 고기를 먹느라 대화가 오가는지도 몰랐다.
“집시를 찾는다고 하더이다. 노인이고, 볼에 흉터가 있는 자라 했어요. 인근까지는 정보로 접근하였는데, 하필 위치가 위치인지라. 불법 노예화를 가정하고 살피는 중이었습니다.”
“볼에 흉터가 있는 집시?”
“예. 저하. 왜 그러십니까?”
“아까, 공원에서 내 보았네. 대화도 하였어.”
고기를 썰던 이안이 손을 멈추었다.
“볼의 흉터라기보다는, 틈이 나 있는 것 같았지. 아가미처럼.”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수정구슬로 과거와 미래를 보았지.”
예언하는 노인 집시가 한둘도 아니고, 워낙에 험한 인생을 사는 자들이다 보니 얼굴의 흉터 역시 특별할 것 없다.
하지만, 진이 그 집시를 만난 게 과연 우연인가?
“티모시가 직접 찾으러 나선 걸 보니, 특별한 집시인 것 같았습니다. 특이점이 있어 보이던가요?”
“비밀을 먹는 자라 칭하였다. 그 대가로 점을 봐주었는데…….”
진의 말문이 잦아들자, 다들 의아하게 아이를 쳐다봤다. 사소한 비밀이라고, 칭찬받기 위해 뒤에서 외국어를 연습했던 일을 일러주었다고, 그리 말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콱, 틀어막히는 느낌과 함께 혀가 안 움직이는 것이다.
이안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목에 뭔가 걸리셨습니까?”
“뭐!? 아이고, 저하! 기침, 기침 크게 해보세요!”
“미니! 가서 의사를-”
“아니. 나 괜찮네.”
진이 당황한 듯 눈만 끔뻑거리며 손을 가로젓자,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진은 우유를 벌컥 마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가로 주었던 비밀을 말하려고 했더니, 말문이 막혔어. 금언 마법과 굉장히 비슷한 효과인 것 같은데.”
이안은 진을 찬찬히 살폈다. 확실히, 진이 설명한 것은 금언 마법과 유사하다. 하지만 집시가 어떻게?
티모시가 몇 달 동안 이리저리 떠돌며 찾는 이유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안은 진의 잔에 우유를 따라주며 토닥였다.
“티모시 사절이 바리엘을 떠나기 전, 황궁에 정식으로 들를 것입니다. 그때 접견하여 자세한 걸 알아보도록 하지요.”
“응. 그래.”
“그리고 아까 적발한 불법 도박은 경비대에서 우선 처리하기로 하였으나, 사태가 심각하여 황궁 자체적인 조사단을 꾸리는 게 좋겠습니다. 인근의 치안 문제도 있고…….”
이안은 고기를 한 입 먹다가 멈칫거렸다. 필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저를 눈 흘기며 쳐다본 탓이다. 심지어는 베릭까지 먹던 걸 멈추고 야유를 보내댔으니. 이안은 저의 실수를 인정하고 피식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래. 좀 그랬어, 방금은.”
“자자, 우리 다른 얘기 할까요? 아 참. 필리아 님. 아까 하실 말씀 있다 하셨지요?”
“네? 아, 저기…….”
비비안나는 사소한 일이라 일렀던 필리아의 말이 생각나서 그를 끄집어냈다. 화제를 돌릴 때는 사소한 것만 한 게 없었으니까.
다들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썰거나 면을 집어 드는데, 필리아는 당황하여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네르사른이 걱정스레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왜 그래?”
“다, 다, 다른 게 아니라요!”
필리아가 결심했다는 듯 큰 소리를 내자, 다들 놀라서 멈칫거렸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이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뭐지? 이안이 뭔가를 잘못하였나?
“이, 이, 이안아.”
“네. 어머니.”
말씀하시라. 그리 이르는 눈빛이 담담했다. 필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도, 동생이 생기면 어떨 것 같아?”
“…….”
“…….”
다들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멈추었다. 포크가 허공에서 멈추고, 면이 집게에서 스르륵 빠져나갔으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이 깊었다.
여럿의 눈동자가 동시에 데구루루 굴렀다. 이안에게 그리고 네르사른에게, 다시 이안에게.
‘아.’
일전에, 진이 일러주었던 게 맞았나 보다.
이안은 홀로 달그락거리며 고기를 썰어댔다. 크게 개의치 않는다. 사실상, 저가 무어라 할 사안도 아니고.
“아이를 가지셨습니까?”
“…아, 아, 아마도.”
“그렇군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필리아는 사고가 멈춘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주룩 흐르는 눈물. 이안의 반응을 수십, 수백 번 머리에 그려보았으나 이런 건 예상에 없었다.
저리 남 일처럼 담담하고 차분하다니. 이안은 미리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필리아가 알 턱 없었다.
“왜 상관이 없어? 우리 가족이잖아…….”
“아, 제 말은-”
이안은 오해가 생겼다는 걸 인지하고, 차분하게 정정했다.
“어머니만 괜찮다면 상관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나는 너무 좋아.”
“그렇다면 저도 좋습니다.”
“정말?”
“네. 정말. 아주 어여쁘겠지요. 축하합니다. 어머니.”
필리아가 일어서서 이안에게 팔을 뻗자, 이안은 어미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혹 반대할까, 긴장하고 있었던 로만드로와 비비안나가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얼어있던 베릭 역시 마찬가지. 살점 붙은 뼈를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야잇! 그러면 반응 좀 격하게 축하해 줘! 싫다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그러니까, 베릭이 오랜만에 옳은 소리 하네! 아이고, 심장 벌렁거려.”
“여, 여보. 나 물 좀.”
“비비, 여기. 시원하게 마셔. 마시고 나도 좀 주고. 아우, 그 짧은 사이 속이 바싹바싹 탔네. 네르사른 님. 축하합니다! 실로 경사예요! 어이고? 네르사른 님?”
로만드로가 일어서서 네르사른의 어깨를 툭툭 쳐댔다. 힘없이 옆으로 밀리는 거대한 몸집.
쿵.
그는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필리아를 올려다봤다. 황홀하여 정신이 반쯤 빠진 것 같아 보였다.
“어…….”
이안은 그런 그에게 일어서라, 손을 내어 부축했다.
“축하합니다. 네르사른 님. 아버지가 되셨군요.”
네르사른은 처음으로, 눈시울을 붉히며 이안을 끌어안았다. 고맙다, 참으로 고맙다. 고백의 순간을 축복으로 만들어주어 참으로 고맙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스며드는 힘이었으나, 이안은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걸 본 베릭이 고기를 문 채 달려들었다.
“나도! 나도 축하해!”
“이놈, 낄 데 끼고 빠질 덴 빠지거라!”
“억! 너무해.”
언제나처럼 로만드로에게 목덜미가 잡혀 저지당했지만.
그 유쾌한 광경에 진이 웃으며 시아오시에게 꿈을 일러주었고, 비비안나는 시원한 물을 들이켜며 재차 안도했다.
다행히, 오늘은 모두의 기억에 남을 만한 최고의 만찬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