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2
제272화. 왕의 사정
날씨가 좋았다. 정신없이 서류 결재에 집중하던 이안이, 흐트러지는 나뭇가지에 시선을 빼앗길 만큼. 이안은 마법부 별채가 들어올 정원을 바라보며 펜을 내려놓았다.
진의 암행, 그러니까 티모시를 만난 지 벌써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필시 국경을 넘어가기 전, 방문한다 하였거늘 아직 기미가 없는 것이라. 그의 신분상, 절대 입바른 소리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는데.
“이안 님. 여기 마저 서명 부탁드립니다.”
옆에 서 있던 마법사가 조심스레 재촉하자, 이안은 펜을 마저 그어냈다.
화사한 바깥과 달리 집무실은 그득한 서류 더미로 인하여 답답했다. 이곳 소파를 제일 좋아하는 베릭이 밖으로 달려 나간 것만 해도 알 만하지 않나? 이안은 다음 보고서를 건네받으며 물었다.
“베릭은? 또 훈련장에 간 것인가?”
“아마도요? 식당이 조용한 걸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주방장이 시아오시 칭찬을 그렇게 해댑니다. 매일같이 훈련장에 같이 나가주어 식당이 평화롭다고요. 큰일 한다며 어찌나 시아오시를 치켜세우던지요.”
이안이 피식 웃었다. 황궁친위대와 제국방위부의 인재 선발이 조만간 열릴 것이었다. 베릭과 시아오시는 체력 단련 및 체계적인 검술을 배우기 위해 성실히 훈련장으로 나섰고, 저들의 이점을 완벽하게 누리고 있었다.
대체 평민 중 그 누가, 황궁 훈련장 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며, 제국의 정점인 제이럿 대장에게 일대일 교습을 받겠는가? 차락, 이안은 보고서를 넘기며 덧붙였다.
“몸 쓰고 돌아오면 두 배로 먹는다 들었는데.”
“그때는 주방장 퇴근이라 괜찮습니다. 아침마다 욕하긴 하지만요. 얼굴 안 보는 게 어디겠습니까.”
똑똑.
“들어오시오.”
인기척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녔는지, 머리칼이 살짝 젖어있는 로만드로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마법사에게 양해 구하듯 눈인사했다.
“단독으로 보고할 게 있네만.”
“아, 실례하겠습니다. 호출해 주십시오, 이안 님.”
이안은 마법사가 나가는 와중에도 관자놀이를 짚은 채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둘밖에 없지만, 로만드로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그가 내려놓은 것은 손바닥만 한 쪽지였다. 전서구에 묶여 온 것인지, 이곳저곳이 구겨져 있었다.
“이안, 그림자가 보낸 것일세.”
“…첫 보고치고는 좀 늦었습니다.”
멜라니아에게 붙여놓은 그림자가 그녀의 동선 및 상황을 보고해 올린 것이다. 이안의 꾸중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쪽지의 서문은 지연 연유를 밝히고 있었다.
-멜라니아가 국경 경비대의 감시를 피하고자 북동쪽 오지의 숲을 가로질렀습니다. 전서구를 구할 수 없었기에, 이리 시일이 걸렸습니다. 이것을 쓰는 지금, 저는 루스웨나 북쪽 소도시 아옌에 있습니다. 멜라니아는 루스웨나에 정착할 예정이 없는지, 계속 신분을 숨긴 채 이동을 강행 중입니다. 경비대의 신분증 검사에 걸린 적도 있으나, 지시하신 대로 도와주었습니다.
멜라니아를 살려 보낸 연유 중 제일 큰 것이 러더포드 상단과의 접촉을 성사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상단의 위치 따위를 얻어내고자 한 것인데, 그녀가 경비대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차질이 생기지 않겠나?
그림자는 이안의 명령대로, 적당한 선에서 그녀를 ‘관리’하는 중이었다.
“뭐라 적혀있나?”
“루스웨나를 가로질러 올라가는 중입니다. 동선 외, 아직 특별한 것은 없는 듯합니다.”
이안은 마력으로 쪽지를 태워 없애 버렸다. 그의 측근 외, 황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안이었다. 심지어는 수상조차.
모종의 이유가 있다 한들, 반역으로 멸문한 핏줄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새어나갈 길 없이, 철저한 침묵으로 유지해 가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또 보고할 것이 있나요?”
“아코렐라 말인데, 상태가 호전되고 있긴 하지만 현재 황궁에 남아있던 각린 감염 치료제를 모두 소진하여 새로이 제조해야 한다고 하네.”
요즘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병이다 보니, 황궁에서 보관 중인 치료제 또한 소량이었다. 없는 것이 없다는 황궁에서 이 정도면, 민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음이 타당했다.
“현재 양으로 완치까지는 무리가 없답니까?”
“다행히, 조금의 차이도 없이 딱 알맞다 하더군. 제조에 필요한 재료 중 몇 개가 바리엘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 여차했으면 큰일 날 뻔하였어.”
“그렇군요. 제조는 우리 쪽 담당이 아니니, 우선 알아두고만 있겠습니다. 아코렐라의 병가는 계속 유지해 주세요.”
이제 정말 끝났겠지요? 이안이 그리 생각하며 펜을 다잡으려고 하자, 로만드로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고 티모시 사절이 입궁하였다는 전언이 왔네만. 진 저하와 함께 볼 것 아닌가?”
“아아.”
올 것이 왔군.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서 옷매무시를 다잡았다.
“진 저하께서는요?”
“본관에서 수상님과 학식 토론 중이시네. 그쪽 역시 전언이 갔을 터라. 하지만 수상께서는 안 오시지 않을까 싶어. 오후에 회의가 잡혀있다 들었거든.”
“사전 협의 없이 오는 것이니, 괜찮습니다. 저와 저하께서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먼저 맞고 있으면 저하께서 오실 것이라.”
“알겠습니다. 날도 좋은데, 정원에서 보지요.”
“그거 아주 아주 찬성일세. 이안, 자네는 볕을 쬘 필요가 있어. 자연에서 오는 모든 것이 곧 건강과 직결한다고! 밖에 누구 없나? 정원에 다과를 준비하게!”
이안은 웃으며 몇 가지 서류를 추려냈다. 티모시가 정문에서 여기까지 당도할 시간마저 허투루 보낼 수 없었기에.
이안은 실로 오랜만에 집무실을 나서 정원으로 걸어갔다. 복도를 바삐 뛰던 마법사들은 헛것을 보았나 싶어, 멈칫거리기 일쑤다.
“이안 님? 어찌 밖에 나오셨습니까?”
“나는 밖에 나오면 안 되나?”
“앗, 그 말씀이 아니라요.”
“어어? 이안 님, 저 지금 보고서 들고 가는데요.”
“책상에 올려두어라, 버고스 왕국의 사절이 와서 접견할 것이니. 늦어도 오후 중으로는 확인하여 회신하마.”
고작 얼마간 걸어가는 동안에도, 끝없이 그의 이름이 불렸다. 로만드로는 문득, 이안이 쓰러졌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마법부는 대체 어떻게 돌아갔던 것이지?
이안이 금방 깨어나긴 했다만, 지금으로 보아서는 단 반나절의 부재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한 명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다는 것. 그것은 이안의 능력이 남다르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직의 불균형을 뜻하기도 했다.
솨아아아-
그들이 정원에 들어서자,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제가 여기서 게일 황자를 처음 만났습니다.”
“아아. 그랬지. 마법부를 구경하러 왔을 때, 마주쳤다고 하였나?”
입궁하자마자 나움의 마지막 말을 따라 이곳을 찾았거늘, 별채는 없었고 게일만이 있었다.
이안은 멀리서 다가오는 마차를 발견했다. 외부인의 마차, 티모시다.
끼이익!
티모시가 마차에서 내리자, 이안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갔다. 고작 보름인데 집시 찾느라고 고생 꽤 한 모습이다. 지하 전투에서 찢겼던 소매가 너절한 채 그대로였으니.
“티모시 사절. 오랜만입니다.”
“장관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니요. 사실상 언제라고 기약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티모시는 자연스럽게 정원을 둘러보며 앉았다. 몇 번이고 황궁에 들었고, 웨슬리가 있었을 때는 안쪽도 샅샅이 구경했다.
특히, 이 정원. 여기는 그녀가 마법부 별채를 건설할 것이라 했던 부지 아닌가? 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와 관련하여 마력석과 인력 교환 논의가 오간 적 있었다.
“이곳에는 곧 마법부 별채가 들어설 것입니다.”
이안이 찻잔을 들며 그리 일렀다. 따라서 마시려던 티모시가 멈칫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듣기로 웨슬리는…….
“웨슬리 전 장관이 마법부 별채를 진행하였는데요.”
“네. 저 또한 그리할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혹 그녀의 마지막에 대해 저희가 모르는 게 있습니까?”
웨슬리 사태는 인근국에서도 뜨겁게 회자되었다. 공공연한 연인 관계였던 두 사람의 파국 자체만으로도 화제성이 있었으나, 주목되는 것은 마지막 형태였다. 제국의 장관직에 올랐던 최고의 마법사가 영속의 저주로 지옥에 떨어지고, 황자는 그로 인해 저주받았으니까.
저주가 무엇인지에 따라 국운이 정해질 것이라, 당시 인근국들은 저주를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과 비용을 투입했는지 모른다. 게일이 법정에서 거짓으로 고하기 전까지.
“아니요. 아시는 것이 다일 겁니다.”
“한데, 어째서 전 장관의 업을 이어가시려 하는 것입니까?”
일부러라도 웨슬리의 행보와 반대되는 길을 택하는 게 맞지 않나? 그녀가 추진했던 마법부 별채 건설은 폐지되는 게 옳았다.
“저 역시 마법부의 장관이니까요. 부서의 업무 효율과 입지 그리고 그 밖의 이점들을 위한 결정입니다.”
달그락.
티모시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는 단적으로 이안의 권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감히, 웨슬리의 행적을 좇는다 하더라도 황궁에서 저지할 세력이 없다는 것. 감히, 그리하겠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낸다 한들 무리가 없다는 것.
이안은 싱긋 웃으며 다과를 들라 청했다.
“버고스 왕국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 아닌가요?”
“저희는 언제나, 황실의 발전을 지지합니다.”
별채 건설이 진행되면, 버고스에서는 막대한 양의 마력석을 팔 수 있고, 나아가 대가로 마법사 또한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안의 말대로 버고스에서는 두 팔 벌려 반길 일이다.
“그래요. 말씀 감사합니다. 궁에 드셨다는 것은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다는 의미와 같다 여겨지는데요. 어찌, 원하시는 바는 이루셨습니까?”
집시를 찾았는지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티모시는 입매를 굳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안은 그를 살피며 은근히 떠보았다. 진이 공원에서 보았던 집시가 그 집시라면…….
“그날 이후, 경비대에서 불법 노예 매매 집중 단속을 시행 중입니다. 혹, 들어오는 정보가 있다면 일러드리지요. 노인에, 얼굴에 흉터가 있고, 거동이 불편한 여인 맞습니까?”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노예로 잡혔는지 아닌지는 확실한 게 아니라서요.”
“…왕께서 찾으시는 걸 보면, 단순한 집시가 아닌 듯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사연이 깊다 합니다.”
합니다? 이는 명백히 전해 들은 말을 뜻하지 않나?
“자세히 모르시나 봐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찾는 집시가 다른 집시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딱 하나였다. 바로, 비밀을 먹는다는 것.
이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티모시를 빤히 쳐다봤다. 무언가,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느낌이 들었다. 수소문하는 자조차 대상의 특징을 잘 모른다?
‘왕도 모를까? 아니지. 왕은 알고 있을 것이다. 사연이 깊다고 한들, 사절단 대표를 시켜 이리 오랜 기간 추적하게 하지 않았나. 그만큼 중요도가 깊다는 것인데…….’
“이안 님?”
“티모시 사절.”
이안이 씨익 웃었다.
티모시는 영문 모르게 대꾸하였으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만드로는 이안의 미소를 구분했다. 그가 치장하면 사람이 죽는 것처럼, 그가 저리 웃을 때면 새로운 국면이 나타나곤 하였으니.
로만드로는 재빨리 티모시의 찻잔을 채워주며 시선을 분산시켰다. 이안의 질의에 그가 허점을 보이길 원하며.
“혹 현 왕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제 두 해가 넘어갑니다.”
“아…. 그래요?”
두 가지 가정이다. 왕이 필요한 게 정확한 예언이라면, 미래를 들여다볼 만큼 중대한 사안을 앞두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안은 이것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낮추는 게 좋을 것이라 여겼다. 버고스도 오랜 세월 대륙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왕국이지 않나. 그 아무리 정확한 예언가일지라도, 대체할 만한 인물은 분명히 있을 터.
‘티모시라는 인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의미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비밀을 먹는다는 것에 초점을 두는 편이 나은데…….
‘집시가 먹은 비밀 중, 왕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혹은, 그녀의 도움을 통해 세상에서 지워 버려야 할 비밀이 있다. 무엇이 되었든, 버고스의 왕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