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5
제275화. 대진표 누가 짰냐?
베릭은 땅바닥에 철퍼덕 앉은 채 종이를 뚫어지라 노려봤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려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그는 전등 쪽으로 종이를 비추며 연신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쓰는 것은 무리더라도, 이름과 숫자 정도는 읽을 수 있는데. 담당자가 너무 개발새발로 적어 내린 탓에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다.
“베릭. 이건 내 이름. 180이라고 적힌 게 키 맞지? 그럼 이 아래 177은 뭔데?”
첫 관문, 신체검사의 검진표였다. 수백 명을 신속하게 처리하다 보니, 담당자의 수기가 흘러내리듯 그어져 있었다.
안 그래도 까막눈,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이니. 옆에서 가만 듣던 시아오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80번, 베릭. 키 177.”
“내 키가 177이라고? 그럴 리 없는데? 너는?”
촤아악!
베릭은 시아오시의 검진표를 빼앗아 같은 항목을 비교했다. 그의 키는 ‘179.7’ 소수점까지 아주 친절하게 찍혀있는 것 아닌가. 베릭은 벌떡 일어나서 항의하듯 종이를 흔들었다.
“장난해? 나랑 시아 키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난다고? 그리고 나는 왜 점 안 찍어줘? 다시 잴래!”
담당관은 기계적으로 펜대를 움직인 채, 베릭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워낙에 황궁에서 유명한 자 아니던가.
진행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몇 번이나 붉은 머리 사내를 조심하라 일렀기에, 듣는 둥 마는 둥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밀려있는 사람이 수백인데, 저게 장난하나, 지금.
“다음!”
“이봐요!”
“앞에 기준표가 있습니다. 본인의 검진표를 기준으로 확인해 보신 후, 각종 결격 사유가 있는 분들은 오른쪽 문을 통해 나가주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신체적 특이 사항이 있는 타 종족 혼혈은 따로 신고하고 새로운 기준표를 받으십시오. 결격 사유가 없으신 분들은 왼쪽 문을 통해 나가시면 됩니다. 다음!”
콰앙!
담당자는 썩 꺼지라는 듯이 도장만 시원하게 찍어댔다. 한마디 더 덧붙였다가는 실격 처리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선을 알아챈 시아오시가 베릭의 웃옷을 잡아끌었다. 서둘러 왼쪽 문으로 나가자고.
“체력 시험을 마치고 온 분들 중 기준 미달자 제외, 이름표를 제출하세요!”
“여기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101번부터 200번까지 먼저 줄 서십시오. 대련을 원하지 않으면 이쪽으로 와서 신청서를 접수하십시오! 제국방위부에서 자대배치할 것입니다. 황궁친위대를 원한다면, 대련이 필수 항목입니다!”
“대련을 진행한다 하여도, 순위권 아래는 마찬가지로 제국방위부 자대배치입니다!”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접수 후에는 수정이 안 됩니다! 대련의 방식은 바깥에서 안내 중입니다!”
평소에는 구분 없이 그저 거대한 하나의 홀이던 훈련장이다. 그런데 지금은 절차와 필요에 따라 가벽을 세워 사용 공간을 따로 나누어 놓았다.
1층에서 보았을 때는 복잡하여 미로 같지만, 위에서 본다면 단면이 훤하게 보일 터. 두 사람은 체력 검사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파 틈에 스며들었다.
채앵! 챙!
그러다 보니, 정체되는 곳이 슬슬 생겨났다. 황궁친위대 소속 마검사들이 승급을 위해 겨루는 간이 투기장 앞이었으니. 이안이 손수 나선 연유가 이것이었다.
마법을 통한 안전 통제. 수준 높은 격투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앗으며, 피를 끓게 했고, 이는 곧 사기와 관련되니까.
황궁의 직원 중, 그 누구도 물러나라 외치는 자가 없다. 오히려 잘 보이도록 자리를 피해주며 군중들이 마검사의 전투를 만끽하라 허락했다.
“와. 세상에.”
“마검사들은 저렇게 싸우는구나. 상상 이상이다.”
“마법사들은 더 세겠지? 하늘을 찢기도 한다던데.”
“그게 말이나 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지.”
“아니, 마검사도 저리 싸우는데, 마법사라고 못 할 게 뭐 있나? 대단하네, 대단해. 한 명이 군대 하나와 맞먹는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어. 와하하하!”
“잘한다! 와아아아!”
저것이 마검사. 황제를 모시고, 제국의 안위를 지키며, 제국민들의 일상을 수호하는 자들. 저들이 있다면 하나 두려울 것 없으니, 제국민들은 안심하고 장병이 될 자들은 긍지를 가져라. 황궁은 그걸 의도했다.
고취시키기 위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군중들은 이미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걸 느끼는 중이었다.
“거기서 안으로 들어가면 어떡해?”
“괜찮아! 아직 기회 있어! 레이! 정신 차려!”
“황궁친위대의 명예가 코앞이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친위대들 역시 열기에 동참하여 한마디씩 내질렀다. 싸워라! 계속 싸워라! 대장직을 위함도 있겠지만, 궁극의 목표는 황궁의 긍지를 내세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끝없는 강함을 갈구하는 것.
“너무, 너무 멋있다.”
“그러게. 황궁친위대는 몇 명 선발한다고 했지?”
“인원수는 공개 안 됐어. 아무래도 상위 서른 명 안에는 들어야 하지 않을까?”
“서른 명? 많이 빡센데.”
“원래 저기는 소수정예라고. 아무나 못 들어가. 대련 접수자가 적으면 가능성 있을 것 같은데. 흐음, 고민되는군.”
평소에도 경외의 대상인데, 다들 제복까지 멋들어지게 차려입어서 그런지 유독 눈에 띄었다. 대련하지 않겠노라 생각했던 자들의 마음을 흔들 만큼, 아주 화려하게.
퍼엉! 펑!
콰아아아앙!
마검사들의 검이 맞물리면서 거대한 폭발을 만들어냈다. 매캐한 연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치솟고, 광풍이 휘몰아쳤으나 오래 가지 않았다. 구경꾼들의 발치에 닿기 전,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군중과 마검사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마법이다! 이안이 한 건가?’
지이잉. 지잉.
펑! 채앵!
2층에 선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보호벽을 유지하며 안전에 유의를 가하고 있던 덕이라.
베릭은 주위를 둘러보며 이안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쪽에 간 걸까? 몇 번 눈을 굴려대니, 이안 대신 제이럿과 시선이 딱 하고 마주쳤다. 칫, 재수 없게.
스윽.
베릭이 엄지로 목을 그으며 흉악스러운 표정을 지어댔다. 제이럿 대장, 두고 봐라. 이번 선발 끝에 대장이 된다면 너 진짜 죽여버릴 거다.
하지만 제이럿은 베릭을 깔끔하게 무시하곤, 허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로 서류에 뭔가를 기록할 뿐이다. 아마 대련자들의 점수를 매기고 있는 것이겠지.
“…….”
“아, 응응.”
시아오시가 베릭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마검사들 싸우는 걸 뒤로하고, 그들은 야외로 나아갔다. 이제 기초 체력 시험을 본 다음, 대진표가 나올 때까지 밥도 먹고 쉬면서 대기하면 될 일.
삐이익!
바르사베다. 어차피 놀리는 몸, 직원들 손이 모자란다고 하여 지원을 나온 듯했다. 베릭이 반가워서 아는 척을 해 보았으나, 바르사베는 단호하게 무시하며 공과 사를 구별했다.
“일렬!”
“이, 일렬!”
삐이익!
“기초 체력 시험은 다음을 중점으로 볼 것입니다. 근력, 지구력, 순발력, 민첩성, 유연성! 먼저 달리기 2종입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이제부터 진짜 점수로 포함되는 부분인 것이라. 다른 참가자들은 웃통을 훌렁훌렁 벗으면서 위협적인 몸을 과시하였고, 은근한 신경전을 펼쳤다.
반면 시아오시는 제자리에서 탁탁 가볍게 뛰며 몸을 풀 뿐, 베릭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느아아앍!”
팔과 다리를 걷은 채 괴상한 기합만 내질러댔다. 그 모습이 퍽 웃겼는지, 곳곳에서 비웃음이 터졌다.
바르사베는 텅 빈 제 어금니를 혀끝으로 매만지며 호루라기를 물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를 이리 만든 베릭만큼은 떨어지면 안 되지.
삐이익!
“우아아아!”
호각 신호와 함께, 장정들이 앞으로 힘차게 달려나갔다. 유독 볕이 뜨거운, 한낮의 황궁이었다.
* * *
평소와 달리, 2층은 관계자들만이 상주하고 있었다. 혼잡한 1층을 가로지를 수 없어, 위층을 통해 움직이는 직원들, 보호벽으로 안전을 총괄하는 마법사들, 그리고…….
“저자, 실력이 좀 괜찮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특히 맷집이. 예.”
“방금 기술은 특히 좋았습니다. 저는 가산점 줄 만하다 여겨집니다. 실전에서는 잘 안 쓰지만, 명맥을 이어갈 가치가 있어요. 크흠.”
황궁친위대와 제국방위부의 상관들이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상 친위대의 상급자라 하면, 제이럿과 그의 오른팔이 다였고 제국방위부는 각 소속군만큼 머릿수가 있는 터라 비율 차이가 컸지만 말이다. 그래도 우선권만큼은 황궁친위대에 있는 터라, 다들 한마디씩 첨언하며 제이럿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개중 누군가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자는…….”
“저거, 지금 대련하고 있는 것 맞지요?”
먼 거리인데도 유독 뭔가 시끄럽다. 아무래도 다른 대련장에서는 기합만 난무하지만, 저쪽에서는 온갖 욕설과 잡소리가 들려와서 그런 것 같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서 오는 일방적 구타여서 가능한 소란이었다.
퍼억! 퍽!
“대련? 그래! 내가 원하던 게 이런 거다! 개쉑!”
“으윽, 어어억…….”
“저번에 했던 말 그대로 해봐!”
“시, 시발놈아-”
“그래, 내가 시발놈이다! 왜 불러!”
빠아악!
제국방위부 장교들이 혀를 차대며 사람을 불렀다. 피가 바닥에 흥건한 것이, 저대로 두었다간 시험장에서 시체가 실려 나갈 판이다.
“이봐, 저기 누구야? 왼쪽 두 번째 대련장.”
“아, 제국방위부 4군 294번대 소속 햄프와 베릭입니다. 현재 두 사람 다 4승을 얻고 올라왔습니다.”
“제국방위부 소속?”
일반인이 아니라 이미 제국방위부에 소속되어 있는 장병이었다. 상위권의 우수자들이 모두 황궁친위대로 빠지는 것을 염려, 체면 살리기 용으로 인재들을 선별해 대련 참가를 종용했었다.
제국방위부도 이만큼 강한 자들이 모여있다, 혹은 강한 자들 역시 친위대만큼이나 제국방위부를 선망한다 따위의 홍보 효과를 누리려는 작전이었다. 저리 개 터지듯 두드려 맞는 장면은 작전에 없던 일이었지만.
“사람 죽겠는데, 저쯤에서 그만하지. 아, 그리고 제국방위부에서 나온 거면 좀 좋게좋게 하자고 했잖아. 최대한 대진 좀 이리저리 잘 피해서 해달라고. 근데 대체 누가-”
누가 대진을 이리 짰는가, 장교가 되물으려다가 멈칫거렸다. 베릭이라는 이름을 떠올린 것이다. 마법부 장관의 수족이자, 진 황자와 함께하는 마검사.
시종이 난색을 보이며 반대쪽을 힐끔거렸다.
“오오야! 베릭이 잘 한다! 원투, 원투 펀치! 이안, 아니지! 이안 님! 저것 좀 보십시오! 저놈이 베릭 코피 터트린 놈이라고!”
“네. 보고 있습니다. 로만드로 님. 그 전에, 이것부터 보시지요. 재작년과 비교하여 참가자들의 수가 세 배정도 폭증하였습니다. 예상보다 두 배 많은 수예요. 혹, 짐작 가는 연유가 있습니까?”
“음. 글쎄요. 따로 들리는 건 없는데요. 아무래도 황궁친위대 선발을 함께한 게 이례적이라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황궁친위대 봉급이 제국방위부보다 월등히 많으니, 다들 혹한 걸 수도 있겠네요. 이는 참가자들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연유를 알아 두면, 필시 훗날의 병력 모집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는 수상께도 보고를 올리지요.”
이안이 마법사에게 보고서를 넘기자, 진이 그의 소매를 슬쩍 붙잡았다. 들고 있던 과자가 바닥을 보인 것이라. 진이 배시시 웃자, 이안이 다정하게 물었다.
“저하. 입에 맞으십니까?”
“더 먹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그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베릭! 베릭! 와아아아! 이놈아, 방금 진짜 멋있었다아! 한방 더! 어이구, 고기 처먹인 보람이 있네! 잘 한다아!”
로만드로가 주먹을 허공에 뻗어대며 베릭을 큰 소리로 응원해 댔다. 진 역시 화들짝 놀라며 손뼉을 쳐댔고, 이안은 마법부와 진행 부서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연신 받아댔다.
스윽.
이안은 대진표를 대충 넘기며 베릭과 시아오시가 몇 번이나 더 대련해야 하는지 헤아렸다. 현재 관계자들이 매긴 점수로 본다면 베릭은 확실히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고, 시아오시는 그 뒤를 바짝 쫓는 중이다.
“음?”
“왜요? 문제 있습니까?”
이안이 의문이라는 듯 묻자, 로만드로가 서류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곤 이내, 경악스러운 투로 중얼거렸다.
“어이고, 이거 뭡니까? 누가 대진을 이따위로 짰대? 이대로 베릭이랑 시아오시가 붙는 것 아닙니까? 대체 왜?”
“상위권이 정해지기 전, 미리 둘 중 하나를 떨어트리는 게 친위대나 방위부 입장에서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짰는지는 안 봐도 훤했다. 이안은 고개를 들어 제이럿 대장을 쳐다봤다. 그 역시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쉽게 맞물렸다.
‘재밌군.’
이안이 서류를 흔들자, 제이럿은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간단한 예를 취했다.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