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6
제276화. 서로의 목적
“으갸아악!”
베릭은 완전히 뻗은 상대의 배에 다리 한쪽을 올리고 포효했다. 구경꾼들에게 익살스러운 윙크를 해대며 승리를 만끽했고, 이내 이안이 있는 2층으로 고개를 틀었다. 로만드로와 진이 일어나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베리익! 잘 했다! 짜식!”
“수고했네, 베릭.”
정작 이안은 마법사와 서류를 주고받으며 일하는 것 같다만. 베릭은 환히 웃으며 그들에게도 윙크를 날렸다. 여기 좀 보라고, 나 이겼다고. 그러자 로만드로가 자지러지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것 좀 하지 말라며.
끼이익.
투기장을 내려오자, 시아오시가 수건과 물병을 건네주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시원하게 땀만 뺀 베릭이었건만, 그와 비교하여 시아오시는 온몸이 상처로 가득했다. 도저히 이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아니, 저 정도면 이겨도 졌다고 보는 게 맞지 않나? 베릭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물었다.
“시아, 너 괜찮아? 아까 보니까 계속 얻어맞던데. 대체 왜 그래? 그러다 어디 다치면 다음 경기 어떻게 하려고?”
최소한의 일격. 시아오시는 그걸 철저하게 지켰다. 설령 그 순간을 위해 감내할 것이 많다고 해도, 불필요한 공격은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기 싫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리라. 노예로 겪었던 폭력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아니까. 시아오시가 대답 없이 수건을 내밀자, 베릭은 고개를 내저었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
“승자는 이쪽으로 와서 다음 대련 동의서에 서명하세요.”
“아, 오키오키! 승자 베릭, 갑니다요!”
진행요원의 부름에 베릭이 좋다고 달려가 펜을 집어 들었다. 아까 시아오시에게 대충 물어보았을 때는 부상과 관련한 주의 사항이 적혀있다고 하였다.
까막눈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으나, 아래 빈칸에 그림을 그리면 다음 대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안 할 이유가 없지! 베릭은 소 그림을 그린 다음 눈을 반짝였다.
“나 지금 몇 위지?”
“잠시만요. 아직 평가 점수가 안 내려왔습니다. 아까 47위였으니까, 이제 30위 안으로 진입하지 않을까 싶어요.”
승패와 상관없이 2층에서 보고 있는 관계자들의 평가 점수 역시 순위에 영향을 끼친다. 베릭은 제이럿 대장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저씨! 점수 좀 팍팍 줘! 나 연승 중이라고!”
“시끄럽다. 태도 감점.”
“아아악! 미쳤나 봐, 진짜. 고, 고, 공사과를 구분하라는 말도 몰라?”
“공사과는 모르겠는데. 공과 사는 알아도.”
제이럿은 혀를 끌끌 차며 특이 사항에 기록했다. ‘상식 부족, 대부분의 사고가 먹는 것과 연관되어 있음.’ 그리고…….
“베릭. 다음 대련 동의서를 읽긴 했나?”
“아니? 나 글 못 읽는데?”
“…문맹도 추가해야겠군.”
“설마 그거 감점? 나 글 못 읽어도 괜찮아!”
“그것은 네 생각이다. 무지(無知)의 문제는 본인이 무지하다는 걸 모르는 데 있으니까. 그리고 베릭, 생각을 해보아라. 상대는 널 아는데, 네가 상대를 모른다면 참으로 힘든 싸움이 되지 않겠나?”
“아니? 다 이기면 그만인데?”
“…이해력 부족도 추가해야겠군.”
“이해했다! 이해했다아아!”
베릭이 펄쩍펄쩍 뛰어대며 반발하는 순간, 뒤에서 진행요원의 안내가 들려왔다.
“베릭 참가자, 내려왔던 투기장으로 다시 올라가십시오. 바로 대련을 시작합니다.”
“제이럿 아저씨! 잘 봐! 글 몰라도 문제없다는 거 보여줄게! 그러면 감점하는 거 다 지워라!”
타닥타닥!
베릭은 계단 두 개씩 밟으며 먼저 올라섰다. 몸까지 제대로 풀었으니, 이번에는 아주 박살을 내주마! 베릭이 주위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며 고개를 휙휙 돌려댔다.
누굴까? 쟤인가? 아니면 저놈? 아오, 누구지?
끼이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시아오시가 서 있었다. 베릭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눈을 끔뻑였다.
“시아?”
“…….”
“와씨, 대진표 누가 짰냐?!”
베릭은 그리 소리치면서도 제이럿을 올려다봤다. 당황과 재미 그리고 곤란과 환영 따위가 묘하게 뒤섞인 표정이었다.
“졸라 재밌게 짰네.”
“…….”
“근데 개빡쳐.”
처억.
베릭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평소에도 시아에게 대련 한번 해달라 노래를 불러대지 않았던가. 기회가 주어져 좋다가도 둘 중 한 명은 질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하면 짜증 났다.
“시아, 나 알지?”
안 봐줄 것이니, 최선을 다하여라.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자,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시아오시 역시 마찬가지로 자세를 취하고 2층을 힐끗거렸다.
‘주인님의 뜻일까?’
아니. 그럴 리가. 주인에게는 베릭과 자신, 둘 다 상위권으로 올라가는 게 이득인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자의 의도라는 것인데…….
‘먼저 한 명을 잘라내거나, 혹은 이 과정으로 부상 및 체력적인 소모를 이끌어내는 게 목적일 수도. 베릭은 제이럿 대장의 의도라 생각하는 것 같다. 진짜일까? 대장이라면 또 다른 시험의 일환일 수도 있다. 정확히, 나보다 베릭을 검증하기 위한…….’
삐이익!
대련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찢어지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몰아치듯 뛰어드는 베릭.
시아오시가 반사적으로 물러서며 주먹을 피했다.
“시아! 일격 같은 거 나한테는 안 통해! 그러니까!”
귓가에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저것이 정녕 사람의 주먹질이 맞는가? 시아오시는 베릭의 말에 동의했다. 다른 자들과 달리, 저걸 맞아가면서 일격을 노릴 수는 없다. 한 번만 제대로 맞아도 치명상일 것 같았으니.
시아오시는 계속 투기장을 빙빙 돌며 베릭의 공격을 피하는 데 집중했다.
‘나와 베릭, 둘 중 한 명이 올라갈 수 있다면…….’
이안이 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류 읽던 것도 멈춘 채.
시아오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둘 중 한 명이 올라간다면, 당연히 베릭이 가는 게 맞다. 마검사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그는 가치가 있으니까. 반면, 자신은 노예 출신의 보잘것없는 존재.
‘기권하여 누구의 부상도 없이 나아가는 게 맞을까? 제이럿 대장의 평가는? 베릭이라면 다른 대련으로 점수 만회를-’
“시아! 집중 안 하지!”
“…아.”
베릭이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윽박질렀다. 공격이 맞물리지도 않았는데, 시아오시의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
“나는 1등 할 거다! 그래서 제이럿 대장도 죽이고! 고기도 졸라 졸라 많이 먹을 거야!”
대장을 죽일 거라는 말에 다들 경악하여 제이럿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고 무언가를 연신 기록할 뿐이다.
베릭이 발돋움하며 시아오시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이안이랑-!”
“……!”
퍼어억!
콰앙!
이안이랑, 무엇? 시아오시가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공격이 꽂혔다. 안면을 제대로 얻어맞은 시아오시가 뒤로 나뒹굴었다.
로만드로가 진의 시야를 가려주었고, 그 역시 눈을 질끈 감은 채 신음을 흘려댔다. 식구끼리 저리 치고받는다는 게, 참으로 보기 힘들다. 정작 싸우는 베릭은 별생각 없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스윽.
제이럿은 무표정으로 펜을 끼적였다. 아탄족의 후예라 예상되는 베릭의 정체. 호전 이상의 광기와 생명 경시 그리고 날것의 도덕성 등등.
황궁에 있기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특징들이었다. 이안이 보듬어서 가만두고 있긴 하다만, 황궁친위대에 입대한다면 더는 묵과할 수 없다.
제이럿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베릭을 주시했다.
‘황제 폐하를 가까이 모시는 친위대다. 아탄족의 습성은 너무 위험하여 가까이 둘 수 없어. 베릭,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곤란해.’
퍼억! 퍽!
시아오시는 이안을 중심으로 함께 기거하는 식구였다. 인지상정을 바탕으로, 가능성을 보이는지가 관건이다.
‘아, 시발.’
베릭은 뒤통수로 느껴지는 제이럿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하였지만 말이다.
‘친우라도 줘팰 수 있는지 보는 것 같은데. 시발, 시발, 시발…….’
퍼억! 퍼억!
더 힘주어서 주먹을 갈겨댔다. 시아오시의 피가 뭉근하게 터져 올랐으나, 베릭은 가면 갈수록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재미없다. 이상하다. 뭔가, 뭔가…….
“기분 더러운데.”
그걸 인지하자, 호승심이 확 꺾여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베릭이 짜증 부리듯 제이럿 쪽을 돌아봤다.
“아저씨발!”
“…뭐?”
“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인생 그렇게 살지 마!”
그리고 가운뎃손가락까지 들어 보였다. 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확실하게 알린 것이라.
제이럿은 눈썹을 까딱이며 펜 놀리는 걸 재촉했다.
“뭐가 그리 기분 나쁘지? 네가 이기고 있잖아.”
“몰라! 모른다고! 더러운 영감탱. 내가 지금까지 아저씨라고 불러줬는데, 이제 너는 아저씨도 아니다!”
인격 결함, 불손함, 거친 언행 따위가 계속 적혀갔다. 하지만-
“시아를 어떻게 더 줘패? 미친놈아! 그만 끝내!”
베릭이 그리 외치자, 제이럿은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아탄족의 습성인 ‘날것의 도덕성’에 줄을 그어 없앴다. 베릭이 연신 종을 울리라 윽박질렀으나, 제이럿은 허락하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끝내나? 상대가 기권한 것도, 기절한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개소리…….”
베릭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피떡이 된 시아오시가 쿨럭이며 일어서는 게 아닌가?
사락.
제이럿은 종이를 넘겨 시아오시 평가서를 꺼내 들었다. 실력이 괜찮지만, 문제 될 정도로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의 공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병사는 과연 황궁에 도움에 되는가?
‘뭐,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다면 호위로는 확실히 적당할 것 같다만. 이안 경이 사람 보는 눈은 좀 있군. 적재적소에 쓰는 실력도 그러하고.’
시아오시는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이안을 올려다봤다. 어찌하면 좋을지를 묻는 것처럼. 하지만 이안은 대답 대신 응원만 내려주었다.
“시아.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
기권도 괜찮다. 나아가 싸우는 것도 괜찮다. 그는 이제 노예가 아니었으니 스스로 결심할 필요가 있었다. 시아오시는 입안에서 터진 피를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베릭.”
“왜?”
너는 ‘이안이랑-’이라는 연유로 싸우는구나.
나는 ‘이안에게-’라는 연유로 싸운다. 정확히는, 자유로 던져진 저가 잘살아가는 모습을 이안에게 보이기 위해.
시아오시가 공격 자세를 취하자, 베릭이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저 지경이 되었는데, 더 줘패라고?
타앗!
하지만 어쩌겠나? 꺾이지 않은 상대를 두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베릭이 달려들자, 시아오시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그의 궤를 따라 보았다.
일격.
두 번 없을, 단 한 번의 기회만이 이길 길이다.
“아, 진짜!”
“…….”
베릭이 가까이 붙으며 주먹을 뻗자, 시아오시가 다시 한번 피했다. 이번에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틈으로 파고들며 그의 몸 아래로 가까이 붙었다.
퍼어어억!
빠아악!
서로의 주먹이 각자 턱과 옆구리에 내다 꽂혔다. 굉장한 타격음이 멀리 울렸다. 구경꾼들은 저들이 얻어맞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천천히 벌렸다.
타격음이 살벌하다 못해 경이롭다. 저 정도 소리라니. 공격이 오차 없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때만 나오는 소리다.
쿠웅!
삐이익!
대련 종료를 알리는 호각 소리. 로만드로는 진의 팔을 꽉 잡은 채 안타까운 신음만 흘려댔고, 진 역시 혀를 차댔다.
“아이고, 이런.”
“누가 이긴 것이요? 둘 다 기절했는데.”
“베릭이 이겼을 것입니다. 같이 기절했다고 한들, 이전에 따두었던 공격 점수가 있으니까요. 판정승이겠지요.”
스윽.
이안은 서류철을 덮은 채 일어나 제이럿 대장에게 다가갔다. 그는 대련이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점수를 부여하며 제 일을 다하는 중이었다.
“제이럿 대장.”
“예. 장관님.”
“어찌, 원하는 결과가 나와 만족스러운가?”
“…생각보다는요. 수확이 좀 있습니다.”
그가 입술을 축이며 이르자, 이안이 싱긋 웃었다. 미리 일러주었다면, 인력 손실 없는 다른 방식으로도 원하는 걸 보여줄 수 있었을 터인데.
깜찍한 짓이었다만, 봐줄 수는 없다.
이안은 경고하듯 나지막이 일렀다.
“조심하시오. 황궁의 인재는 그대의 것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