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8
제278화. 나름의 이유
늦어도 너무 늦어진 회의다. 모두 서둘러서 나서는 와중에도 제이럿 대장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오가는 자들의 가벼운 질책을 받아내면서,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보고서까지 정리한 뒤였다.
그는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궐련을 태우기 위해 불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내어진 라이터 하나. 퀸타나였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퇴근 안 하십니까? 늦었는데.”
“그러는 제이럿 대장님은요?”
할 말이 있나 보군. 제이럿은 궐련을 단단히 깨물며 연기를 피워냈다.
수상 역시 일어나질 않았다. 그들은 회의실이 비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제이럿에게 한마디씩 던지던 관료들도 분위기를 읽고 쉬쉬거리며 퇴장했다.
끼이익.
쾅!
바깥에서 대기하는 시종들 외, 수상과 퀸타나 그리고 제이럿만 남았다. 제이럿은 반쯤 탄 궐련을 재떨이에 털어대며 물었다.
“하문하실 게 있으십니까, 수상님?”
“제이럿 대장. 그대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 내 기억으로는 벌써 삼십 년이 훌쩍 넘은 것 같은데.”
“수상께서 행정부 부장관일 때 입궁했으니까요.”
제이럿이 슬쩍 웃었다. 참으로 오랜 옛날이지 않나? 그때는 바르사베의 아비인 페트레이오도 옆에 있었고, 리아마 및 베올스 역시 동기로 함께 수련했다. 제국의 최강자라는 명예와 황제 수호라는 영예를 위해 고단히도 굴러댔던 나날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삼십 년. 참으로 긴 세월일세. 제이럿. 나는 그대를 알아. 그대는 신의가 두텁고 총명하며, 의지가 있는 자이지.”
“돌려서 혼내지 마십시오. 저는 무인(武人)입니다.”
수상이 웃으며 미간을 잘게 찌푸렸다. 이미 이안이 회의 내내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경고하였으나, 수상 역시 한 번 더 언질 주려 함이라. 퀸타나는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희미한 연기를 내뱉었다.
“황궁이 수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자네의 의도는 내 깊이 헤아리지만, 이번에는 실수였어. 어찌 잠잠해진 수면에 돌을 던지려 하는가? 게다가 제국민들이 함께하는 축제의 장에서. 베릭과 시아오시라는 자는 진 저하의 수족일세.”
외로운 어린 황자의 곁이다. 그런데 이리 분란을 만들어내다니. 수상은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며 꾸중했다.
“이안 경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
“수상님. 베릭과 시아오시는 말입니다. 진 저하의 수족이 아니라 이안 경의 수족입니다. 두 사람의 근간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히 보십시오.”
“제이럿.”
“베올스가-”
제이럿은 잠시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는 듯, 삼대장 베올스의 이름을 꺼냈다. 황제를 함께 지켰던 기사이자, 아르센 사태에서 허무하게 죽었던 친우.
“얼마 전에 베올스의 저택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에게 남긴 작은 서신을 발견했다고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묻고 싶습니다. 수상님. 저도 베올스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스윽.
제이럿은 품에서 곱게 접힌 서신을 꺼내 책상에 올려두었다. 읽어보라는 눈짓. 퀸타나가 수상을 대신하여 서신을 펼쳤다.
-제이럿. 이것이 너의 손에 닿았다면 나는 지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겠구나. 이것은 아르센 저하의 마력확인식 전날 밤에 쓰인 것이다. 제이럿. 동료이자, 친우인 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나에게 주어진 지엄한 임무를 이어서 완수해다오. 오로지 황제 폐하의 권한만이 세상의 중심에서 단단히 서 있기를.
퀸타나가 잠시 멈칫거리며 수상을 힐끔거렸다.
-황궁의 그 누구도, 무게를 함부로 올릴 수 없다. 그것이 ‘수상’이든, ‘마법부 장관’이든, 다른 누가 되었든. 명심하고 지키자. 지평선이 기울면, 바위가 굴러내린다. 그 바위는 황제 폐하를 해할 것이다.
수상은 속으로 잔 신음을 내질렀다.
베올스는 황제가 동결할 당시 옆에 있었던 자. 황제가 남긴 마지막 염려를 그대로 짊어진 자였다. 황제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를 이용하여 모반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특히 황실의 피를 잇지 않은 수상과 이안이 그 대상이었을 터. 딜라이나는 어쨌거나 황가의 일원이었으니.
“삼대장의 역할은 그저 황제 폐하의 무사 안위이거늘, 베올스가 어찌 이런 고민을 하였고 저에게 넘겨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기, 제이럿.”
“그런데 놀랍게도, 현재 황궁의 상황이 베올스가 염려하던 것과 상당히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다 느꼈습니다. 아까도 보셨지요.”
이안이 불편한 심기를 보이자, 대회의의 모두가 납작 엎드려 코를 박아댔다. 이는 확실히 일반적이지 않았다.
내란과 마물 사태를 지나오며, 이안의 황궁 존재감은 현재 황제를 능가하고 있었으니. 황제를 넘어섰다 함은 결국 진을 넘어섰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회의를 어렵게 만들어 미안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는 자업자득입니다. 다른 부서에서 제대로 역할을 못 해내고 있으니 이리된 것입니다.”
이러나저러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타 부서들과 달리, 황궁친위대는 독립적이었다. 친위대는 황제의 직속부서였으며, 삼대장의 임명은 신년회의에서 결정되지도 않았다.
오로지 황제의 의지. 그것 하나만이 부서의 중추요, 그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지침이었던 것이라
지금은 황제가 병상에 누워 대리자인 수상이 함께하지만, 그 역시 침범할 수 없는 구역임이 확실했다.
“베릭과 시아오시, 둘 다 실력 좋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이안 경이 두 사람을 선발에 보낸 연유를.”
베릭은 친위대에, 시아오시는 제국방위부 쪽으로 배치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라.
수상은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계속 수염만 만지작거렸다. 고민 탓에 머리가 복잡했다. 황제의 동결, 그것을 베올스에 이어 제이럿에게도 이를 것인가? 아니면 최소한으로 비밀을 유지할 것인가?
“제가 보았을 때 이것 이상은 위험합니다. 개구리가 뜨거운 물에 익어 죽는 것과 같지요. 진 저하가 아무리 이안 경을 따른다고 한들, 사람 마음 어찌 압니까? 황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개중 한 명은 아비인 황제에게 검을 휘둘렀고, 또 다른 한 명은 연인을 직접 버렸다. 대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가만 듣던 퀸타나가 재떨이를 끌어와 궐련을 털었다.
“베릭은 마검사니까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더라도, 시아오시는 아니다?”
“어폐가 있군요, 퀸타나 부장관. 혹시 시아오시를 가까이서 지켜본 적 있습니까?”
“아니요. 진 저하와 마주할 때 멀리서만요.”
“제가 보았을 때, 시아오시는 특히 위험합니다. 진 저하와의 인연이 이안 경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특히.”
누구를 진정으로 주인 삼고 있는가? 그것이 핵심이었으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절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만큼, 위험 가능성은 비례했다.
수상은 맞잡은 손을 이마에 댄 다음, 중얼거렸다.
“그래. 제이럿 그대의 뜻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안 경을 조금씩 자극할 것이라는 겐가?”
“저 말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른 대장들은 남아있질 않아서.”
흩어져 있는 힘은 하나의 점을 위해 모인다. 현재 이안과 대척점에 있는 세력이 없었으니, 다들 쉬쉬하며 숨어든다고 하더라도 제이럿이 계속해서 나선다면 ‘인지’하게 될 것이다.
저기를 통하여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다고.
또, 견제할 수 있다고.
스윽.
제이럿은 맹세한다는 뜻으로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저는 오로지 황실을, 정확히는 황제 폐하를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진 저하가 훗날 그 자리를 잇는 것은 정해진 일. 이는 곧 저하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퀸타나가 난감하면서도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안 경도 그렇고, 제이럿도 그렇고, 둘 다 확실히 진 저하를 위한 일이기는 한데 결과적으로 이리 다를 수가 있나? 바라보는 곳은 같되, 걷는 길이 정 반대라 할 수 있다.
수상은 잠시 고민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의 동결은 알릴 필요가 없겠다. 알거나 모르거나 제이럿의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 알게 되면 오히려 이안 경의 행보를, 혹은 나의 행보를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알겠네. 그대의 뜻은 일단 알겠어.”
솔직히, 수상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진이 이안을 이리 깊게 의지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이면서도 비이상적이었다.
언제고 아주 조그만 틈이 생기면, 진이 견딜 수 있겠나? 나서서 견제해 주고, 긴장을 준다 하니 수상 입장으로는 고마울 일이라.
“하지만 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스스로 걷고자 한 길, 홀로 걸으시게.”
“동행을 원치는 않습니다. 가다가 제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수상님은 다른 길로 가셔야지요.”
“거참, 허어. 그렇다면, 베릭 그자는?”
“제 예상으로는, 아마 10위권 안팎에 자리하여 황궁친위대에 들어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조심히, 그리고 긴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제이럿은 수상을 돌아보며 베올스의 전언에 손을 올려두었다. 이에 관하여, 더 이를 말이 없냐는 뜻이었다.
“…그렇군. 자리를 파하지.”
“…예. 들어가십시오.”
수상은 모른 척, 일어나서 대회의장을 나섰다. 그를 뒤따라가던 퀸타나가 등을 돌리며 덧붙였다.
“제이럿 대장님.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신중히 하십시오, 하나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면 그 옆에 것을 못 봅니다. 이안 경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다 진 저하의 눈물을 놓칠까 염려스럽네요.”
명심하겠노라, 제이럿은 고갯짓으로 인사를 남겼다.
두 사람이 나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궁친위대원들이 들어섰다. 슬슬 출발하자는 듯이.
“대장님. 출발하시지요.”
“그래. 이거, 잘 챙겨라. 집무실 돌아가자마자 보고서를 작성하여 배부할 것이니.”
제이럿은 부하들에게 서류를 넘겨주며 일렀다. 아직 선발의 축제는 끝나지 않았으니. 그 역시 할 일이 많았다.
* * *
이안의 뒤를 따르는 로만드로와 금쟁반을 든 시종. 금쟁반 위에는 각국의 서신이 담겨있었다.
진의 임명식 초대장에 대한 화답이라. 그들은 진이 시아오시와 함께 있다는 걸 듣고, 발걸음을 돌리는 중이었다.
“베릭이랑 시아오시 몸 상태는 좀 어떠합니까?”
“으응. 베릭은 예상대로 멀쩡하고, 시아가 좀 걱정이지. 아무래도 치유 마법사 외 마력을 받지 못하니까.”
“많이 안 좋다고 하더이까?”
“그런 건 아니고. 고생 좀 하겠다 하네. 근데 내가 봤을 때는 그 의사 양반, 좀 심각해. 베릭 다쳤을 때 본 이후로는 어지간한 상처는 상처로도 안 보이나 봐.”
타닥타닥.
시아오시의 방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이안과 로만드로를 알아채고 급히 인사했다. 안쪽에 기척을 알림과 동시에 열리는 문. 진이 시아오시의 침대 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안 경.”
“저하. 이쪽에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임명식 초대장 회신이 와서요. 함께 읽어보시지요.”
“아아. 그래. 나 역시 기다리고 있었네.”
이안은 진을 찬찬히 살폈다. 시아오시가 저리 누워있어 속상해할 것이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 진은 그런 이안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는가?”
“아닙니다.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시아오시가 없어서 불편하셨을 터인데요.”
“응. 괜찮았네. 따르는 자들이 저리 많은데.”
“…그렇군요.”
로만드로는 아까 창가에서 노을 받던 진의 표정을 알고 있다.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였던 것 같지만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으시구나. 장하시다. 로만드로는 진을 안내하며 문을 젖혔다.
“집무실로 가시지요. 저하. 답신도 보고, 오늘 있었던 일과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잠시 의논하는 게 좋겠습니다.”
“응. 그러하지.”
시아오시는 반듯한 자세로 누워 고른 숨결을 내쉬고 있었다. 베릭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세가 엉망이었거늘. 이안은 찢어지고 피멍인 시아오시의 얼굴을 잠시 보곤, 책을 침대에서 탁상으로 옮겼다.
스윽.
그 작은 소리에 시아오시가 눈을 떴다. 애초에 자는 척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소리에 깰 정도면 진의 인기척에 진즉 정신을 차렸을 터이니.
이안은 문 쪽을 쳐다봤다. 이미 로만드로와 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님.”
“그래. 시아. 몸은 좀 어떠한가?”
“…저는 괜찮습니다. 다들 괜찮습니까?”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함축적인 물음이라. 이안은 잠시 고민하더니,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 시아오시는 저가 왜 이리되었는지 모르는 것 같아서.
“무엇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네가 제일 많이 다쳤어. 시아. 네가 어찌 베릭과 맞서게 되었는지, 혹 알겠느냐?”
“제이럿 대장이 시험하기 위해서…….”
그래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구나. 영민하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칭찬을 대신했다. 그러곤 시아오시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시아. 조금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주인이라 불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