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79
제279화. 다른 세계
“너는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이안의 말에 시아오시는 떠올렸다.
처음으로 저의 이름을 써 내렸을 때, 귀족들이 부채 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을 때, 부서의 인장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등등. 하나같이 제 삶의 지평을 넓혀주고, 세상을 더 세밀하게 보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침대에 누워 이안을 바라보고 있자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시금, 제 세상이 넓어지려 한다는 것을.
“이상적인 황궁이란, 강건한 황제를 중심으로 권신들 간의 거리가 일정한 법. 하지만 지금 이곳을 보아라. 내가 이른 것과 단 하나라도 같은 게 있는가?”
황제는 병상에 누워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모든 권력의 중심에는 이안이 있다. 그 힘이 넘치고 넘쳐, 누군가를 잠식시킨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그것이 설령 진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를 견제하려는 세력들이 힘을 뭉칠 것이다. 그런데 너는, 내 명으로 저하의 곁에 있으면서 나를 주인이라 불러. 베릭보다 먼저 잘라낼 위험인물이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시아. 네가 선택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신분은 이미 자유를 되찾았지만, 시아오시는 아직 그늘과 햇볕 사이에 서 있는 듯했다. 나아가자 다짐해도, 어쩐지 그림자가 계속 따라오는 기분.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자가 늘어진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힘을 모아, 크게 발 디딜 필요가 있었다.
이안은 다리를 꼬고 앉아 일러주었다.
“네 의지대로 진 저하의 곁에 있고 싶다면, 너에게서 나를 지우는 게 좋아. 이것은 권고에 가깝다. 진 저하가 너를 굉장히 아끼시니, 네가 있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터. 외로우신 분 아니던가.”
시아오시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 이안이 하는 말이 물처럼 흘러내렸기에. 너무 자연스럽지만, 손에 쥘 수 없어 새어나가는 것 같았다.
시아오시가 흔적을 더듬듯 되물었다. 눈앞에 이안이 있는데, 이안이 없는 것 같다.
“…어찌 그러십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증명할 수도, 멈출 수도, 그렇다고 맞설 수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을 위한 일이라 외쳐도, 결국 이안은 견제받을 것이다. 흐름이 한번 만들어지면, 정세의 결과가 새로이 나올 때까지 누구도 멈출 수 없다.
그렇다고 맞설 것인가?
진의 바리엘에서, 누구와? 대체 무얼 위해?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혹은 무엇이든.”
“…저에게 이런 말씀 하시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깊게 생각할 것 없다. 나는 너를 알고, 너는 저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니. 또한 처음으로 의지하여 나선 네가 좌절한 것이, 상황 때문이라는 걸 알아두었으면 싶어서다.”
적어도 진 곁에 마음 놓고 둘 수 있는 자. 이안이 생각하는 시아오시가 그러했다.
진은 여타 다른 황제들과 다르게 좀 특별하지 않나? 부모가 있되 없고, 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진에게 버팀목이라 한다면 이안밖에 없는데…….
‘마법부 별채 건설 후 홀로 남게 된다면 실로 위태롭다. 로만드로는 바리엘에 충성하지만, 그만큼 소중한 가정이 있어. 베릭은 논외. 여러모로, 시아오시만큼 적합한 자를 찾기 힘들지.’
“…제이럿 대장입니까? 주인님을 견제하려는 게.”
“유력하긴 하다만, 아직 모른다.”
적어도, 그 견제 세력이 진정으로 황궁과 진의 안위를 생각하는 자들이라면 좋겠다. 그리해 주면, 저에게 치중된 진의 무게를 자연스럽게 분산하여 넘길 수 있을 터.
이안은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리며 웃었다.
“모든 것은 네가 진 저하의 곁에 있고자 한다는 걸 전제로 하는 말이다. 너에겐 생각할 시간이 있어.”
이는 이안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견제 세력의 윤곽이 잡히고, 마법부 별채가 지어질 때까지는 단단히 진 앞에 서 있을 것이라.
아마, 건설 시작 기점으로 반대파의 반응이 확실하게 오겠지만.
“주인님.”
또 주인이라 부르는구나. 이안이 꾸중하듯 웃어 보였지만, 시아오시는 알아채지 못했다.
“…저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제가 선발에 나간 것은 노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쓸모를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존재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 값이 확실하게 매겨져 있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살아가며 존재를 증명하고, 가치를 올려야 했다.
이것이 시아오시가 대련을 꺼리면서도 계속 이어갔던 이유다. 승리하면, 그래서 모두가 저를 원하게 된다면, 처음으로 인간인 채로 세상에 서는 것이라.
하여, 이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이 말씀하셨던 자유를 제가 누리고 있노라고.
“하지만 방금 또 일러주셨지요. 제 가치를 보일 길은 많으니, 좌절하지 않습니다.”
“말했듯이, 너의 선택이 전제되는 것이라.”
“예.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시아오시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제가, 선택했습니다.”
“…….”
이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는 진을 안심하고 맡길 자가 생긴 것이니, 반길 일이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아오시가 재빨리 덧붙였다.
“이안 님.”
주인님이 아니라, 이안 님. 이안은 듣기 좋은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그러니까 이안 님도 선택하십시오.”
“무엇을?”
“무엇이든. 원하시는 것을요.”
“나는…….”
이안이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나움과 함께 별채에서 책을 읽고, 마차 안에서 제국민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바리엘에 햇빛과 달빛이 깃드는 모습을 보는 것.
이안은 문고리를 잡고 중얼거렸다.
“나는 이미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 시아.”
끼이익.
문이 닫히고, 시아오시는 가만히 벽을 바라보며 잔숨을 내쉬었다.
‘이안 님에게는, 다른 세계가 있었구나.’
시아오시는 이안이 숨기고 있는 세계를 엿보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세상이 조금 넓어졌다.
그가 원하는 곳이 진정으로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이 아니라는 것.
* * *
“순서대로 루스웨나, 클리포포드, 그리고 버고스 왕국입니다. 선물함은 아래에서 먼저 개봉하여 혹 위험 물질이나, 특이 사항이 없는지 모두 확인하였습니다.”
진은 금쟁반 위에 놓여있는 서신 세 장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왕국의 품격에 맞게 고급스러운 질감이 일품이다. 그뿐인가? 각 서신을 담고 왔던 상자에는 꽃과 보석 따위가 잔뜩 들어있었다.
진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작게 발을 굴렀다.
“이안 경은 왜 이리 늦어?”
“그러게 말입니다. 오, 왔다.”
이안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진은 서둘러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이안 경. 이제 읽어볼까?”
“예. 저하. 나이프를 가져오라.”
“내가 직접 뜯고 싶은데.”
“아니 됩니다. 종이에 독을 먹였던 사례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왕국이 감히 바리엘에게 그리했다간 바로 전쟁 발발이겠지만. 어쨌거나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나이프로 인장을 뜯어냈다. 그 아래, 금빛 먹인 잉크로 적힌 답신이 모습을 보였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저하.”
“응응!”
-친애하는 진 베로시온 5황자 저하에게 올립니다. 운명을 공유하는 바리엘 대제국에 봄이 당도하였음을, 보내주신 초대장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공식 후계자 임명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루스웨나 또한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형식적인 답신이다. 아마 이전 황제들이 받았던 서신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하지만 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요, 오래도록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것이다.
아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계속 읽어달라 재촉했다.
“왕이 온다 하는가?”
“예.”
“역시 안 올 줄 알았-”
옆에서 손에 잡히는 것을 정리하던 로만드로가 반사적으로 대꾸하다 멈칫했다.
“…이안 경, 온다고?”
“예. 저하.”
“이, 이안. 지금 온다 하였나?”
“그렇습니다. 로만드로 님.”
이안을 제외, 로만드로와 진이 눈을 크게 뜨고 끔뻑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 아니던가. 엘더트가 이끄는 사절단의 재방문이 유력할 것이라 여겼는데!
로만드로가 진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저하, 축하드립니다. 루스웨나의 왕이 직접 온다면, 저하의 임명식에 뜻이 더해질 것입니다.”
“시, 신기하군. 전혀 기대도 안 했어.”
“하긴, 진 저하께서는 이제 유일한 황자 아니십니까?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리 일찍일찍 움직여 연을 트는 게 낫긴 하지요. 루스웨나의 왕이 온다면, 그 규모가 엄청날 것입니다. 이거, 생각보다 준비를 더 단단히 해야겠어요.”
들뜬 로만드로와 달리, 이안은 서신을 가만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시종에게 고갯짓하여 남은 것들도 뜯어보라 일렀다.
스윽.
시종이 손끝으로 종이 단면을 한 번 훑은 다음 이안에게 넘겨주었다. 서신을 재빨리 읽어가는 이안의 미간이 조금씩 찌푸려지다 못해, 비소(非笑)까지 떠올랐다.
“왜, 왜 그러는가? 이안?”
“이거, 재밌게 되었습니다.”
클리포포드는 예상했던 대로, 1왕자 노아가 방문하기로 했다.
문제는 버고스.
“버고스에서도 왕이 온다고 하네요. 티모시 사절이 함께할 것입니다.”
“버고스에서도? 이거 진실로 축제로군! 저하, 이례 없는 대통합의 축제입니다!”
로만드로가 진심으로 기뻐하자, 진 역시 따라서 살짝 웃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안 경의 표정이 저리 좋지 않은 것인가? 노아 왕자도 후계자이니, 따지고 보면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두 진의 임명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모이는 것이라.
“이안 경. 서신을 보여주겠나?”
“물론입니다. 저하.”
진은 이안에게 왜 그런지 묻는 것보다, 먼저 찾아내고자 서신을 건네받았다.
하지만 당최 알 수가 없다. 정갈하고 우아한 글씨체만 눈에 들어오고, 내용적으로는 특별히 경계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저하. 제가 왜 각국의 지도자들을 바리엘에 모으고자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이안은 그런 진의 의도를 알아채고, 넌지시 물었다. 사절 대신 왕이 직접 왔으면 좋겠다 이른 이유?
“황제의 대관식도 아니고, 황자의 임명식에 왕이 직접 참석한다는 것은 국격을 떨어트리는 일. 바리엘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그리한 것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황궁의 정세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내란과 아르센 사태를 통해 궁이 몇 번이나 봉쇄되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으리라.
바리엘을 사방으로 둘러싼 나라에서 흑심을 품었다가는 심히 귀찮아진다. 이안은 그걸 방지하기 위해, 대면하여 외교를 단단히 하고 황궁이 건재함을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루스웨나와 클리포포드 그리고 버고스, 세 왕국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국경을 맞댄 두 나라까지는 그렇다 쳐도 말이지요. 각국에 가 있는 우리 외교관이 보고 있는데, 어찌 함부로 회동하겠습니까?”
“세 나라가 동맹을 맺으면 바리엘이라도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요. 적당한 거리를 서로 유지하는 것이-”
로만드로가 맞장구치며 진에게 설명을 덧붙이는 순간이었다. 그는 설명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아, 세 나라가 한번에 모이기 위해 진의 임명식을 이용하는구나.
“임명식 날을 기준으로 머물러서 겹치는 일정이 거의 같습니다. 보통, 바리엘을 의식한다면 이럴 수는 없지요.”
왕에게 직접 초대장을 주었어도, 어디까지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 아래 던진 수였다.
“버고스 왕은 더 지켜보긴 해야겠지만요.”
“버고스 왕은 왜?”
“집시와 관련된 사안이 있습니다.”
“아아. 들었네. 공원에서 내가 보았다던 그?”
“가능성이 없잖아 있지요.”
버고스, 그래. 버고스는 그래도 좀 모르겠다 싶었는데. 루스웨나까지 동시에 수락?
“아무래도 저들끼리 은밀히 내통하는 구석이 있나 봅니다. 우리가 황궁의 건재함을 보여주려고 하듯, 그들은 황궁의 틈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게 있었다면 지금껏 해왔듯 숨겨서 하면 될 일이다. 이리 직접 모습을 보이고 언질 준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신호였다.
어차피 황제는 병상 신세에, 유일 후계자는 열 살짜리 아이이니, 이만한 기회가 없다 싶었던 게지. 예상하기로는 3국의 기습적인 동맹이 유력하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진이 조금 걱정스러운 투로 묻자, 이안이 싱긋 웃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저들이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 온다 한들, 그 상황을 만드는 쪽은 황궁이니까.
“저하께서는 임명식 날, 누구보다 환히 웃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