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84
제284화. 반달이 떠오르다
“이안, 나일세.”
“들어오십시오.”
로만드로는 작은 손수레를 끌며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람 허리까지 오는 종이 더미가 수북했다.
바쁘게 펜을 놀리던 이안이 바퀴 소리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틀었다. 대체 어디서 자꾸 일들이 밀려드는 것인가? 선발식이 끝난 지 며칠째, 어쩐지 업무가 더더욱 과중되는 기분이었다.
이안은 집무실을 가득 채운 보고서를 힐끗거리며 고갯짓했다.
“저쪽에 두십시오.”
“한 시간 전에도 이리했던 것 같은데. 하핫.”
“가끔 신기합니다. 올라올 게 또 있던가 싶다가도 막상 보고서를 펼치면 이해되거든요. 결재 시일 순서대로 정리해 주십시오.”
“이건 좀 천천히 해도 될 것이네. 진 저하의 임명식 당일 마법부의 동선과 역할 분담에 관한 제안서라서. 다른 부서에는 결정하여 통보만 하면 되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건 결재를 마친 것이니 내어주십시오. 자리가 모자랍니다.”
이안은 다시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고, 펜 놀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안은 로만드로가 나가지 않은 걸 알아채고 재차 고개를 들었다.
“보고할 것이 또 있습니까?”
“아, 그것이 말이네.”
로만드로가 의자를 쳐다보자, 이안이 앉아도 좋다며 눈짓으로 허락했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이안은 펜을 잉크 통에 걸쳐놓았다.
“바르사베의 거처가 좀 애매해서. 시아오시가 아직 치료를 받고 있긴 하지만, 시합을 무리 없이 치를 정도로 회복하였잖은가. 더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 없을 듯한데.”
제이럿 대장은 ‘당연히’ 바르사베의 복귀를 명하지 않았고, 이안마저 그에 관해서 언질이 없는 터라 로만드로가 직접 짚어내는 것이었다.
바빠서 그런 것인가? 하지만 어디 이안이 바쁘다고 하여 이런 것을 놓칠 인물이던가? 그는 당최 알 수 없다는 투로 조심스레 물었다.
“이안.”
“말씀하십시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일세. 요즘 황궁 분위기가 조금 미묘하게 돌아가는 듯하여서.”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이안은 짐짓 모른 척 되물었다.
“베릭과 제이럿 대장이 대련한 날 말일세. 그날 이후 황궁친위대가 유독 날이 서 있어. 베릭의 승리가 탐탁지 않은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제국방위부도 편승하여 그쪽과 같은 느낌을 내는 듯해서 말이지.”
이안이 베릭에게 마력을 넘겨주었던 걸, 모두가 보았다. 마법부 장관이 황제 폐하 옆에 제 수족을 붙이려는 의지가 있다는 걸, 모두가 안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대장 선발에 내부 심사가 포함되어 있음은 공공연했지만, 자네의 의도를 가늠하려는 소문이 너무 무성하네.”
“제 의도요? 그게 무엇이라 하더이까?”
이안은 진정으로 궁금하다며 웃어 보였다. 무해한 미소를 보자, 로만드로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어버렸다. 가까이서 본다면 이리 화사한 자인데, 멀리서 보는 자들은 그걸 모르는 것 같다.
“뭐, 여러 말이 있지. 내부 심사에서 가망 없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만회하게끔 아예 대장을 꺾어버렸다. 혹은 마법부 인력은 줄었으나 무력으로는 공고하다는 걸 알리는 거다, 등등. 사람 다섯이 모이면 다섯 가지 말이 나오고 있다네.”
워낙에 파급력이 큰 사건이지 않았나. 황궁 관계자들만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일반 참가자들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쉬이 가라앉지 않는 열기를 짐작할 수 있었고, 또한 이해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재밌군요. 행동은 하나인데, 해석은 셀 수 없다라.”
“진 저하의 임명식이 곧 있으니, 당분간은 바빠서 덜하겠지. 베릭도 임명이 불발되었고.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자중하는 게 좋겠어. 알겠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니까. 응?”
어린 황자와 그의 뒤에 서 있는 마법부 장관. 임명식을 기점으로 진이 공식 후계자가 된다면, 더더욱 이에 관한 걱정과 경계가 짙어질 것이었다. 권력은 살아있는 것과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거대해지니까.
지금이 시작점인 걸 알고 있는 자들은, 필시 조금씩 진의 시선을 저들 쪽으로 돌리려 할 것이다.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니 바르사베의 거처가 새로이 정해지는 게 나을 듯했다. 그녀는 황궁친위대와 진을 바로 이어주는 길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녀의 실력과 신의는 몇 차례 증명된 바가 있고, 저하를 모시는 자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시아오시도 배울 점이 많을 자인지라, 조금만 더 두고 보겠습니다.”
“이안?”
“그리고 사실, 저하의 호위이니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긴 합니다. 맨 처음 그녀를 받아들인 것은 전적으로 저하의 뜻이었으니까요.”
로만드로는 당황해서 눈만 깜빡여댔다. 지금 이안이 바르사베를 옆에 두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걸까? ‘그’ 이안이?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분명 로만드로 저가 파악하지 못한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인데…….
“저기, 이안-”
“와아씨! 뒤지겠다아!”
콰아앙! 쾅!
로만드로의 뒷말을 확 자르며 나타나는 베릭. 로만드로가 인상을 찡그리며 훈계하였으나, 알아먹는 척 하나 없다.
“베릭. 기척 좀 하라니까!”
“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 못 해요. 아니, 친위대원들 미쳤나 봐. 무슨 첫날부터 뺑이를 그렇게 쳐? 물 한 모금 못 마시게 하고! 아오, 진짜!”
오늘은 베릭이 황궁친위대원으로서 처음 훈련장에 나간 날이었다. 분명 아침에는 멀끔하게 제복을 차려입었는데…. 오후 되니까 거지꼴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어이고, 물도 못 마셨어?”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또 웃긴 게, 신참만 못 마신대. 나보고 마시고 싶으면 훈련장 한 시간 동안 돌라는 겨.”
오. 세상에. 베릭, 그걸 바로 갈굼이라 한단다.
로만드로는 입을 틀어막으며 베릭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방금까지 예의 없다며 혼내던 건 쏙 들어간 지 오래다.
“그,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한 시간 동안 돌고 거기 물통 다 비웠지. 크하하하!”
자세히 보니, 제복 아래에는 훈련복 그대로였다. 옷 갈아입을 새 없이 바로 달려왔나 보다. 황궁친위대에서는 여러모로 베릭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으니, 이런 식으로 풀어내려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명예가 있지, 어떻게…….
“그런데 나보고 물독 다 채워오라는 거. 지들이 처마실 건 지들이 떠올 것이지. 빡쳐서 다 깬 다음 걍 왔어요. 오늘 저녁 소고기라고 해서. 로만드로 님. 근데 물독 비싼가? 크기가 나보다 조금 크긴 하던데.”
“물독을 다 깨버려? 첫날부터? 이런, 대체 왜?!”
“아, 짜증 나니까!”
로만드로는 속으로 성호를 그으며 황궁친위대를 애도했다. 안 그래도 망나니 같은 자식, 더더욱 거칠게 굴려서 사람 만들어 주십사 기도하는 바다.
“베릭.”
“앙?”
“내가 아침에 무어라 일렀지?”
“…사고 치지 말라고.”
“듣기는 했구나. 제이럿 대장에게 물독 값은 봉급에서 치르라 이르겠다. 첫 봉급 받으면 맥주 한잔밖에 못 사 먹겠는걸?”
맥주 한잔 사 먹으면 다행이다. 첫날부터 저 난리이니, 아마 한 달 뒤에는 빚을 지고 있을 수도.
베릭이 경악한 것처럼 입을 떡 벌리자, 이안은 문득 시상식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분명 ‘사고’를 운운한 것 같은데…….
“베릭, 저번에 말이다. 시상식 아침에 늦었을 때, 사고를 말하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저번에? 음? 아아!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며, 베릭이 손을 탁탁 튕겨댔다.
“별거 아니고, 그날 급하게 온다고 어떤 노인 칠 뻔했거든.”
“미친놈이!”
따악!
“아악! 안 쳤어요! 머리카락 하나 안 부딪혔다고요!”
“그걸 왜 지금 말해? 수습은 잘 하였어? 노인은 조금만 놀라도 무리가 간단 말이다!”
“완전 쌩쌩하고 괜찮았어요! 그리고 솔직히 나도 억울하다! 할매가 기어서 대로변을 지나가잖아. 바로 알아채기 힘들다고.”
“그래서 어찌했어?!”
“돈 주려고 했는데, 안 받는 걸 어째. 뭐라더라? 그, 어, 비밀을 먹는다나 뭐라나. 좀 이상해 보이긴 했어. 이안이 너 데려오라던데?”
베릭의 말에 로만드로가 헉 하니 숨을 들이쉬었다. 어지간해서는 잘 놀라지 않는 이안 역시 마찬가지다. 눈을 살짝 크게 뜨고, 펜을 내려놓는 게 아닌가?
동시에 이상해진 두 사람. 베릭이 당황스럽다며 소파 뒤로 물러났다.
“왜, 왜들 그러실까? 그날 진짜 아무 일 없었는데.”
“아니, 베릭. 자세히 좀 말해봐. 노인이, 여인이었다고? 그런데 비밀을 먹는다 하였다? 집시였지?”
“집시? 나는 그런 거 구분 못 하는디.”
“이안. 그, 대로변을 기어갔다고 하는 거로 보아, 다리가 없는 노인인 게 분명하네.”
“오! 그건 맞다. 다리 없었어!”
“세상에!”
로만드로는 거의 발작할 것처럼 머리를 쥐어 싸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댔다. 환희와 전율 그리고 충격 그 어딘가의 몸짓이다.
티모시의 부탁대로 바리엘 전역에 수배령을 내렸으나, 그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던 참이다.
그런데 베릭이?
술 처먹고 늦게 들어온 그날, 베릭이 만났다니!
“베릭, 이안을 데리고 오라는 건 또 무슨 말이야?”
“아니, 보상하고 싶으면 생각 많고, 말 적고, 이상한 애 데리고 오라 했거든. 그거 완전 이안이잖아요.”
“그치. 이, 이안이긴 하지.”
“……?”
이안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만드로를 쳐다봤다. 두 사람 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로만드로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어, 어디로? 언제?”
“반달이 뜨는 밤, 사고 났던 거기. 아, 신문사 있던 골목 근처였는데, 사거리고 모퉁이 몇 개만 돌면 큰 공원 입구 나왔다.”
반달이 뜨는 밤! 이안과 로만드로가 동시에 책장 위의 달력을 확인했다.
“오늘이잖아.”
“오늘이군.”
이안과 로만드로가 동시에 중얼거리자, 베릭이 머쓱하게 히죽 웃었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것이라.
“그래? 몰랐네?”
“…이걸 혼낼 수도 없고, 원.”
“로만드로 님. 밤까지는 아직 시간 있으니, 준비하십시오. 저는 보던 서류만 마무리하겠습니다. 정확한 위치 파악하고, 통하는 길목은 모두 막아두도록 하지요. 혹시 모르니 마법사들도 몇 차출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지.”
“베릭, 로만드로 님을 따라 나가 돕거라.”
베릭은 방금 들어와서 피곤하다며 찡얼거렸으나, 로만드로의 귀 잡아당김에 순순히 끌려나갔다.
이안은 하던 것을 마무리하기 위해 펜을 잡았으나, 다시금 내려놓고 말았다.
‘비밀을 먹는 자, 버고스의 왕이 애타게 찾는 집시.’
버고스 왕이 그녀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곧 있으면 밝혀질 것이다. 그녀를 통해 없애 버리고 싶은 비밀이 있거나, 혹은 그녀가 간직한 비밀 중 꼭 알아내고 싶은 게 있거나.
후자라면, 이안도 진정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이안도 진정으로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3국 정세에 대응하여, 필시 중요한 열쇠가 될 터. 그뿐만 아니라, 티모시의 귀화를 순리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버고스 왕에 대하여 무엇이든 알아두는 게 좋다.’
스윽.
이안은 마음을 다잡으며 창밖을 쳐다봤다.
곧 있으면 달이 뜬다.